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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옷부부 Jun 06. 2022

새드엔딩_EP2

전염병으로부터

나는  두 달 정도 여행 가이드 교육을 받아야 했다. 주 5일 동안 매일 자리에 앉아 역사공부를 하는 일은 적성에도 맞고 재미있었다. 문제는 이걸 사람들에게 설명하는 일이라는것… 그것이 직업이라는 것이었다. 사람들 앞에 나서서 얘기하는 것에 썩 자신은 없었지만 서대문형무소에서 2년 정도 역사해설을 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그때와 다를 것 없어’라며 나 스스로를 토닥였다. 터키어도 매일 한 시간씩 공부했다. 한국어에 능통한 여자 직원한명이 이곳에서 필요한 말들을 가르쳐 주었는데 그날 몇 마디 배우고 나면 시장같은 곳에서 나도 몇 마디를 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주로 숫자를 말하는 일이었지만 배운 말들을 바로 써먹으니 터키어가 빨리 늘었다.  


나와 함께 가이드를 준비하던 사람들은 마카오와 필리핀에서 가이드 경력이 있던 남자 직원들이었다. 그들에 비하면 나는 맨땅에 헤딩하는 초짜 벌거숭이었다. 둘은 내가 손님들의 기에 눌릴 것 같다며 늘 걱정했다. 속으로 제일 걱정하는 사람은 나였지만 의연해 보이려 했다. 하지만 사장님도 나에게서 그런 기미가 보였는지 가이드 대신 사무실에서 일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을 했다. 물론 솔깃했다. 큰 벽을 피해갈수 있는 기회였다. 사무실 일이 더 안정적이기도 할 테고.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니 이 낯선 이스탄불에서 안정을 찾는다는 것이 웃기는 일이었다. 모험하고 싶은 여행이었으니 난 가이드를 택하는 것이 당연한 선택이었다. 해보지도 않고 벽을 돌아가려니 자존심이 상하기도 한다.

 ‘처음엔 엉망진창 일지 몰라도 몇 번 하다 보면 나도 잘할 수 있을 거야’


내가 회사에 출근해 있는 동안 길상이는 필요한 가구, 주방기구, 침대, 커튼 쇼핑을 하느라 정신없이 뛰어다녔다. 그 덕에 매일 한 시간씩 공부한 내 터키어 실력이나 시장에서 익힌 길상이의 터키어 수준은 비슷했다. 심지어 생활에서 쓰는 단어들은 더 많이 알고 있었다. 하루 종일 같이 있는 삶을 살다가 각자 다른 낮을 보내는 것이 익숙하진 않았다. 서로 각자의 바쁜 생활에 딴생각을 할 겨를은 없었다. 매일 배운 역사나 어깨너머로 들은 가이드 직업의 TIP를 공부하기도 바빴다. 

공부해야 하는 양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그만큼 할 말이 많은 땅이었다. 로마에서 그리스로 올라가 히타이트까지 거슬러 갔다. 거의 4000년의 역사였다. 가독교, 유대교, 이슬람 세 가지 종교도 함께 공부해야 한다. 터키 관광은 보통 7박 8일, 매일 이동하는 시간은 4시간에서 6시간. 시간의 공백은 가이드의 말로 채워야 한다 했다. 설명해야 하는 역사의 양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많았다. 가이드는 마냥 즐거운 여행을 직업으로 삼는 것은 아니었다. 밖에서 보는 것과 실제 들어와 보는 것은 완전히 다른 것임을 간과했는지도 모르겠다. 



남편의 셰어하우스는 손님 받을 준비가 끝이 났다. 사실 침대와 주방만 있으면 어떤 여행자도 지낼 수 있는 곳이었다. 아프리카에서, 다합에서 함께 여행했던 개꽃 부부는 마침 이스탄불 일정이 있어 우리의 첫 손님이 되었다. 이어서 자전거 여행을 하던 손님, 아이슬란드를 여행하던 손님, 호랑이 부부까지. 처음 보는 사람들이 여행자라는 이름으로 우리 집 문을 두드렸다. 길상이도 셰어하우스 주인이라는 직업이 생겼으니 한가하던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매일 시장에서 필요한 물건들을 조금씩 샀다. 침구나 커튼을 제외하고는 거의 중고 물건들이었다. 특히나 터키는 전자제품이 비싼 탓에 중고가 아니면 우리의 빠듯한 살림에 엄두가 나지 않았다. 터키의 물가 중 가장 저렴한 것은 과일, 치즈. 채소 같은 먹거리였다. 넓은 땅에서 뭐든 나니 그 가격이 가능했지만 산업시설이 없는 나라에서 기계제품은 비싸기 그지없었다. 우린 이스탄불에서 살아남기 위해 각자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5일장은 길상이가 매일 출근 도장을 찍던 곳이었다. 내가 회사에 출근해 골머리를 썩는 동안 길상이는 집안 살림을 맡았다. 청소와 빨래, 밥을 짓고 장을 보러 다니는 일이 적성에 맞는다고 했다. 우리는 서로 적성을 찾았다 생각했다. 나도 비록 지금은 초보가이드지만 언젠가는 어깨에 힘을 주고 다니며, 터키가 손바닥 보듯 훤해질지 모르는 일이었다. 




“한국 터키 직항이 취소되었습니다.”

터키에 온 지 두어 달 때쯤 지났을 무렵이다. 중국에서 코로나 환자가 나왔다는 것을 뉴스로 들은 지 얼마 되지 않아 한국은 코로나로 온 나라가 마비되었다. 세계 곳곳에서 중국과 한국인의 입국을 허락하지 않았다. 여행사의 입장에서는 날벼락과 같은 일이었지만 ‘사스’ 때의 전례를 생각하며 이 일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회사의 분위기가 흉흉하긴 해도 잠자코 기다리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매일 출근하는 일을 반복했다. 조금 달라진 것이 있다면 지하철을 타거나 식당을 이용할 때 사람들이 나를 보는 눈빛이 달라졌다는 것이다. 분명 보통 때라면 눈인사와 함께 웃음을 건넸었는데, 요즘은 나를 보고 화들짝 놀라거나 슬금슬금 거리를 두며 피했다. 심지어 ‘코로나’라며 놀리는 일도 일어났다. 입을 틀어막고 한 줌의 공기도 같이 하지 않겠다고 숨을 꾹 참고 지나가는 사람들도 눈에 보였다. 여권 파워 세계 2위라는 타이틀이 무색하게 형제의 나라에서 조롱을 당하는 신세라니.


‘조금만 기다리면 될 거야’라고 생각했던 상황은 점점 악화되었다. 아래층 사무실의 터키 직원들이 책상을 정리한다. 상황이 나아질 때까지 교대 근무를 한다 했다. 나도 무기한 대기상태의 가이드가 되었다. 그동안 출근한 위로금 정도의  돈이 손에 쥐어졌다.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하겠는가. 에라 모르겠다. 집으로 돌아왔다. 


터키는 안전할 것이라 순진한 생각하고 있었는데 전세는 곧 역전되었다. 한국의 코로나 환자는 점점 줄어들었지만 유럽에서 시작된 확산세는 순식간에 터키로 넘어왔다. 스타벅스를 비롯한 작은 카페와 식당들도 문을 걸어 잠갔다. 우리가 갈 수 있는 곳은 마트뿐이었다. 근처 공원은 폐쇄되었지만 노인들은 계속 바깥으로 나왔다. 정부는 결국 공원의 벤치를 뜯어갔다. 50세 이상의 고령자는 바깥출입이 금지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모든 일은 순식간에 벌어져 매일매일 새로운 뉴스가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길상이의 셰어하우스에 문의도 당연히 줄었다. 들어오는 여행자가 없으니 머물 사람도 없어졌다. 몇몇 사람들로 북적이던 집은 처음 이사오던 날처럼 텅 비었다. 이스탄불에 살겠다고 집을 구한 지 두 달 만의 일이었다. 코로나로 모든 것이 바뀌어 있었다. 거리의 사람들도 절반 이상 줄었다. 회사들은 재택근무를 택했고 시장은 파리만 날렸다. 가끔 슈퍼에 장을 보러 가면 사람들이 힐끔거리며 우리를 쳐다봤다. 다행히도 동네에서 우릴 자주 보던 점원이나 빌라 주민들은 늘 따듯하게 인사해 줬지만 낯선 사람들은 경계하는 눈빛을 풀지 않았다. 세계 모든 나라에서 코로나가 얼마나 끔찍하게 진행되고 있는지 방송했고 우리는 집안에 앉아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파악하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어지러웠다. 앞으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필요한 외출 때마다 우린 손 소독제를 챙기고 마스크를 썼다. 거리에 마스크를 쓴 사람은 많지 않았다. 오히려 장갑은 모두 끼고 있었다. 손 닿는 것에 예민한 청결 문화 때문이었다. 다음번 외출부터는 우리도 장갑과 마크스를 세트로 착용했다. 집에는 정적이 흘렀다. 낮과 밤의 경계도 모호해졌다. 할 일이 딱히 없으니 일찍 자야 한다는 의무감이나 일찍 일어나야 한다는 책임감도 없었다. 이제 코로나는 전 세계를 돌아 아메리카 대륙까지 진출했다. 몇 분 간격으로 쉴 새 없이 지붕 위를 지나던 비행기는 한대도 뜨지 않게 되었다. 백신을 만들려면 최소 일 년이 넘게 걸릴 것이라는 절망적인 뉴스만 들려왔다. 하지만 계약기간 1년 중 10개월을 두고 쉽게 여길 빠져나갈 수는 없었다. 아무런 수입은 없었지만 적게 먹고 적게 쓰면 백신이 나올 때까지 견딜 수도 있을 것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어떻게 찾은 나의 정착지인데, 얼마나 사랑한다고 말하던 이스탄불인데.. 이곳 생활을 정리하기엔 멀리 와 있었다.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통장에 있는 돈을 계산해봤다. 2년 동안 8000만 원의 예산을 쓰기로 했던 우리는 집 계약과 게스트 하우스 준비로 천만 원가량을 썼다. 예산이 끝난 지 오래였다. 여행가 가이드로 돈을 벌고 남편의 셰어하우스로 생활비를 채워 넣자고 한 야무진 계획은 이미 무용지물이었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 계산해 볼수록 우리는 이스탄불의 40평 빌라에 고립된 채 점점 절망으로 빠져들었다.

 

한 달의 시간은 어떻게 흘렀는지 모르겠다. 아마 전 세계의 사람들이 이 시간을 고통과 답답함으로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 시간이 수도꼭지 잠그는 것을 깜빡한 것처럼, 그냥 그대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한국으로 가자.”

남편은 조금 더 버티길 원했지만 나는 집 안에서 견딜 수가 없었다. 이스탄불에서 한국으로 가는 전세기 신청을 받고 있었다. 어떻게든 이곳을 탈출할 수 있다면 뭐든 상관없을 것 같았다. 떠나기로, 돌아가기로 마음먹었다. 가이드의 꿈도, 셰어하우스의 희망도 모두 망했다.


 5월의 전세기에 몸을 싣었다. 954일이 끝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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