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키프러스의 끝
이틀 휴일을 여행자로 살았더니 다시 찾아온 농장일은 덜 고되게 느껴졌다. 올리브를 따는 일도 익숙했다. 무화과 잼을 만들고 올리브 피클을 담았다. 이름 모를 열매나 과일을 따는 일도 했다. 소소한 일거리들이라 할 만했다. 안네들이 잔소리할 일도 줄어들었다. 그녀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우린 알고 있었다. 이렇게 적응을 해 가는 것인가. 안네는 시켜놓기만 하면 뭐든 열심히 하는 한국인들에게 양껏 일을 시키고 있었다. 더 빨리 적응한 이유가 안네 때문일지도 모른다. 우리를 봐주거나 특별대우해 주질 않으니 말이다. ‘예실 유르트(녹색마을)’라는 마을 이름답게 녹색 나무 들로 가득한 이곳이 이제 정말 우리 동네 같다 느꼈다. 작은 동네는 사람은 적어도 가득 찬 분위기가 있었다. 풍성한 무화과 잎과 올리브 열매 때문이었을까.
저녁시간 매번 해 먹는 밥도 이젠 질릴 때가 되어 데니스에게 생선요리를 먹을 만한 레스토랑으로 데려다 달라 부탁했다. 마을 주민이라면 근처의 식당 정도는 가봐야 한다.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식당은 지역 주민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근처에 대학교가 있어 이곳은 학생들이 주로 찾는 식당이었다. 우리 집 레스토랑 말고 이 동네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모인 것을 처음 보았다. 우리는 이 지역에 유명한 정어리 튀김(함시)과 생선구이, 생선 샌드위치(발륵 에크멕)를 시켜 먹었다. 떠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이제야 동네 맛집을 발견하다니... 밥해먹는 것이 좋아 집밥만 먹었더니 이런 아쉬움이 남는다. 생선에 대한 집착이 강한 에디는 생선 한 마리를 혼자 온전히 즐겼다. 식당 사장님에게는 우리가 머무는 동안 적어도 몇 번은 더 오겠노라고 장담했다. 음식이 맛있다고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는 우리를 보며 기분 좋게 웃어주셨다. 맥주와 생선요리로 거한 저녁을 마치고 나니 어느새 붉은 밤이 되어 있었다. 어떻게 갈지가 걱정이었다. 데니즈의 차를 타고 올 때는 이렇게 먼 곳인 줄 몰랐다. 해안을 따라 어두운 밤길을 걷고 걸어도 우리 집은 나오지 않는다. 탓할 사람도 없으니 넷이 줄을 서서 안전하게 걷는다. 오래 걷는 일도 얼마만인지. 무거운 배낭을 메고 걷고 또 걷던 때가 가물가물하다.
마침 지나가는 버스가 보여 손을 드니 갓길로 차를 세워준다. 동네 버스인 줄 알고 탄 버스는 대학교 버스였다. 돈을 내려했지만 기사님은 돈도 받지 않는다. 우린 웬 횡재인가 싶어 신나게 자리에 앉는다. 길 잃은 외국인에 대한 배려인가 잠시 생각했다. 버스에는 여러 인종의 학생들이 많이 뒤섞여 있었다. 거기에 아시아인까지 섞였으니 공항으로 향하는 국제버스 같기도 하다. 집으로 돌아와 데니즈에게 공짜로 버스를 타고 온 횡재에 대해 늘어놓으니 대학교 스쿨버스는 무료라고 했다. 물론 우리가 학생은 아니지만 젊어 보이는 얼굴 때문에 학생이라 생각하고 돈을 안 받은 것이라 추측했다. 지하자원이 없는 북 키프러스에서 할 수 있는 국가사업은 인재를 키우는 일밖에 없어 아프리카나 외국에서 우수한 인재들을 장학생으로 많이 뽑아온다 했다. 특히나 가난한 국가에서 학생들을 많이 받는다 했다. 분단국가에다가, 자원 대신 인재 키우기에 열중하는 것은 한국과 퍽 많이 닮아 보이는 모습이었다. 우린 그 덕에 횡재를 한 것이고. 고작 버스비 몇 리라였지만 그게 뭐라고 기분이 좋으니.
다시 돌아온 주말은 어김없이 레스토랑이 열렸다. 웬일인지 두 명의 아르바이트생도 왔다. 데니즈도 지난주에 많이 힘들긴 한 모양이었다. 서빙하는 인원이 생겼으니 모두에게 여유가 생겼다. 이번 주에는 단체 손님도 없이 작은 가족단위의 손님들만 오갔다. 에디는 데니즈가 사준 고무장갑을 끼고 여유 있는 표정으로 설거지를 했다. 길상이는 음료 바의 터줏대감이 되었고 나는 더 이상 빵을 태우기는커녕 완벽한 카발트 한상을 차려냈다. 션 언니는 처음부터 일을 잘한다고 안네들의 사랑을 받았다. 레스토랑은 아무 사고 없이 잘 굴러갔다.
일요일은 우리의 마지막 근무 날이었다. 적응하기 힘들었던 일주일은 천천히 흘렀지만 마을 주민이 다 돼버린 일주일은 너무나 빠르게 흘렀다. 사진기를 들고 기록을 빼먹은지도 여러 날이다. 오랜만에 사진기를 꺼내 할머니들과 우리 모습을 남긴다. 일만 하느라 이 모습을 제대로 찍은 적이 없었다. 오늘이 마지막 날이라 생각하니 퇴사하는 사람처럼 마음속에 기쁨이 몰려왔다. 물론 아쉽다고 표현할 수도 있겠지만 농장과 레스토랑 일은 힘이 드니 우리는 후련한 기분이 먼저였다. 데니즈와 안네는 아쉬움을 감출 수 없었다.
“너흰 정말 최고야! 조금 더 있다가 가면 안 될까?”
당황스러운 데니즈의 제안에 모두가 손사래를 쳤다. 우린 여행을 계속해야 한다 했다. 사실 일이 조금만 덜 힘들었다면 유혹에 넘어갈 수도 있었다. 해먹이 흔들리는 마당에 조금 더 누워 여행을 미뤄 볼 참이었다. 하지만 농장일과 식당일은 남편과 지금까지 한 워크 어웨이 일 중에 가장 힘들었다. 에디션은 키득거리며 우리 둘은 더 있다 가는 게 어떻겠냐며 등을 떠밀었지만 2주 동안의 경험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아니 충분히 고생스러웠다.
갑자기 안네와 데니즈의 언성이 높아진다.
“엄마가 너무 힘들게 일을 시켜서 한국인들이 떠난다고!!”
“쟤네한테 물어봐!! 난 그런 적 없어!!”
모녀는 우리가 떠나는 이유가 일이 힘들어서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데니즈는 엄마 탓을 하며 쏘아붙였다. 분명 터키어로 얘기를 했는데 우리 모두 알아들을 수 있었다. 이제 말도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귀가 트인 것일까?!!!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원래 계획도 2주였으니 일정대로 가는 것뿐이라 해명했다. 안네와 데니즈는 말싸움은 잦아들었지만 우리가 떠난다는 변치 않는 사실에 모든 식구들은 아쉬워했다.
송별회는 나중에 하기로 하고 에디션과 우리는 마지막 이틀 쉬는 날을 가졌다. 키프로스는 꼬리를 가지고 있다. 카 르파즈라 불리는 국립공원은 야생 당나귀로 유명한 곳이다. 우리가 있는 예실 유르트에서 대각선으로 끝에 위치해 있었는데 지도만 봐도 궁금증이 일어나게 생긴 뾰족한 꼬리다. 지난주처럼 차를 한대 빌려 익숙한 길을 운전했다. 어느 방향으로 난 도로를 달리던지 터키의 붉은 국기와 북키프러스의 하얀 국기가 함께 서서 펄럭였다. 터키밖에 인정하지 않는 나라이니 당연한 일이겠지만 여행자의 눈에는 정체성만 모호해 보였다. 터키 사람과 언쟁해서는 안 되는 주제 두 개 중 하나는 바로 이 북키프러스 얘기라고 할 정도로 정치적으로 민감한 곳이기도 하다. 나머지 하나는 아르메니안 학살사건이다.
이윽고 도착한 국립공원의 입구에서부터 당나귀가 좋아하는 탐부린을 팔고 있었다. 시큼한 향이 나는 탐부린을 한 봉지 사서 공원으로 들어가자마자 입구에서 우리를 기다렸다는 듯이 당나귀 한 무리가 다가온다. 차에 타고 있었기 망정이지 길에서 이 녀석들을 만났다면 뒷걸음질을 치며 도망쳤을 것이다.
‘손에 든 탐 부린 내놔’
당나귀들은 말캉한 코부터 창문으로 들이민다. 먹이를 주고 싶어도 그 큰 입에 손이 물릴까 겁이 난다. 마치 깡패들처럼 우리 차를 둘러싸고는 물러설 기미가 안 보인다. 덩치가 큰 녀석부터 어린 녀석까지 이 길목을 지나는 여행자들에게 통행세를 징수하고 있었다. 말을 할 수 있었다면 거친 사투리를 뱉어냈을 것 같이 보였다. 차를 포위한 당나귀들을 피해 길 옆으로 주차를 한 다음 겨우 용기를 내 내려 본다. 남과 북 대치라도 하듯 서로를 향해 가는데 당나귀의 당당함에 손에 쥔 탐부린을 더 세게 움켜쥔다. 코를 실룩거리며 하나라도 더 먹겠다는 놈들을 상대하기란 쉽지 않았다. 입구에서 먹이를 다 털려버린 우리는 국립공원 안으로 들어가는 길 내내 당나귀들을 만났지만 줄 먹이가 없었다. 이 녀석들은 서로의 영업 영역을 지켜주기라도 하는 듯 일정 거리를 두고 생존권을 보장했다.
수많은 당나귀 팀을 지나치고 우린 가장 끝, 꼬리 부분에 도착했다. 지금까지 본 똑같은 바다였지만 산 정상에 오른 것처럼 의미 있는 곳처럼 다가왔다. 거친 절벽에서 푸른 지중해를 바라봤다.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파도마저 높게 일었다. 우리가 셀 수 없는 시간부터 지금까지 이곳을 깎아왔을 놈들이었다. 여행을 시작할 무렵에는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유적들이 더 많이 보고 싶었다. 7대 불가사의 같은 건물들이 볼 때면 흥미 넘치는 사실들에 재미가 있었다. 그런데 여행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대자연을 보는 것이 더 좋아졌다. 시간의 산물에 겸손한 마음으로 경이로움을 느끼게 된다. 오랜 시간을 매일 하루처럼 반복하는 것, 그것이 만들어낸 결과물은 입이 벌어질 정도이니 말이다. 나는 그 짧은 일상의 반복도 견디지 못하는데.. 또 자연 앞에서는 내가 하는 고민이나 고통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머리가 비워진다. 나이가 들수록 자연을 찾는 사람이 많은 것도 바로 이 이유일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이 거대한 시간을 견딘 바위, 나무, 절벽, 바다, 산을 경외심으로 바라봐야 한다. 인간은 짧은 시간 동안 이곳을 즐겁게, 행복하게 누리다가 다음 사람 또한 그렇게 살 수 있도록 물려주면 되는 것이다.
이곳까지는 사람들이 많이 오지 않는지 당나귀 무리들은 수줍음이 많았다. 공원 입구의 깡패 녀석들과 비교하면 선비 같은 녀석들이었다. 서로 적당한 거리를 두고 키프로스의 끝이라고 표시된 석판 앞에서 서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당나귀를 유독 좋아하는 션 언니는 당나귀 모양의 파우치 하나를 나에게 선물했다. 에디션과의 동행은 키프러스까지였다. 워크 어웨이가 끝나고 남 키프러스로 돌아간 다음 우린 각자의 여행을 다시 시작할 참이었다. 우린 어디로 갈지 아직 정하지 못했고 에디션은 남미로 갈 계획이었다. 우린 이 여행을 어떻게 마무리해야 할지, 어디로 가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어디든 갈 수 있어 좋은 세계여행인데 어디로 갈지를 모르겠다니… 시작할 때의 열정이 사라진 것인지, 지친 것인지, 말 그대로 모를 뿐인 것인지 고민에 빠져있었다. 여행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좋은 곳을 봐야지', '그곳에 가야지', '빨리빨리'라는 마음이 비워지고 있었다. 볼 것은 어디에나 있었고, 만날 사람도 누구든 있었다. 경험할 것은 차고 넘쳤다. 그러니 여행도 천천히, 점점 천천히 흘러갔다.
떠나기 마지막 날 밤, 우리는 데니즈와 바비큐 파티를 했다. 식당의 그릴에서 양고기 한판을 가득 구웠다. 식당의 모든 집기들이 익숙하니 냉장고를 열어 피클을 꺼내고, 길상이는 음료를 꺼냈다. 션 언니는 능숙하게 고기를 굽고 에디와 나는 테이블을 세팅했다. 레스토랑 주방이 우리 것 같으니 모르는 것이란 없었다. 오늘만큼은 주인이자 손님처럼 여유롭게 식당에서 만찬을 즐겼다. 오래 마음을 두고 머문 곳은 집으로 느껴지는데 우리는 다시 한번 집과 이별을 해야 했다.
그동안 펼쳐놓았던 짐을 다시 가방 안으로 구겨 넣었다. 짐은 늘어나지도 줄지도 않은 그대로였다. 미쳐 다 먹지 못한 간식들을 조금 더 챙겼을 뿐이었다. 데니즈는 민박 집의 건물 벽에 마지막 메시지를 써 달라했다. 얼마 전에 다녀간 독일 커플도 자전거 그림을 그려놓았다. 나는 그 옆에 우리 넷의 모습과 분단된 키프러스에 다시 평화가 있기를 기원한다는 글을 적고 마침표를 찍었다. 남자 하나 없이 여자들만의 힘으로 꾸려나가는 민박과 레스토랑은 우리가 빠져나가면 썰렁해질 것 같았다. 2주였을 뿐인데 제일 말없이 무뚝뚝하던 안네가 눈물을 흘렸다. 함께 밥 먹으면서 드는 정도 무섭지만 일하면서 든 정은 그보다 더한 것이었다. 그 눈물에 모두 마음이 찡해졌다. 올리브를 따며 함께 마시던 진한 커피도, 식당에서 지지고 볶던 전쟁도 끝이 난 것이다. 안네와 데니즈는 또 다른 여행자들을 기다리며 이곳을 지키고 있을 것이다. 우리가 다시 북 키프러스에 올 수 있을지, 또 이 사람들을 만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작별인사를 오래오래 한 다음 데니즈의 차를 타고 다시 남으로 넘어왔다. 차에 앉아 여권만 내밀었을 뿐인데 국경을 간단히 통과했다. 남과 북으로 나뉜 의미가 있는 것인지 도통 알 수 없었다.
우린 다시 각자의 여행을 시작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