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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옷부부 May 30. 2022

HOME STREET HOME_EP2

GUEST

저녁 준비로 분주한 때, 자전거를 타고 여행 중인 독일 커플이 민박집으로 들어온다. 데니즈는 지나가는 여행자에게 무료로 숙소를 빌려주기로 다. 이 독일 커플의 입장에서는 웬 횡재냐 싶을 턱이었다. 현지인이 베푸는 갑작스러운 호의는 여행의 가장 큰 묘미가 아닐까 싶다. 식사인원이 많아졌지만 인도의 수도원과 음팡가노의 부엌살림을 맡아하던 우리에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채식을 한다는 커플을 위해 감자요리를 추가해 만들었다. 큰 식탁이라 모두가 마주 보고 둘러앉아 저녁을 먹기로 했다.

둘은 독일에서 이곳까지 자전거를 타고 왔다. 의사가 되기 위해 레지던스 과정을 마친 뒤 쉴 틈이 생겨 자전거 여행을 결심했다 한다. 여행의 주제는 ‘HOME STREET HOME’, 센스 있는 작명이었다. 버스를 타고 이동하는 것도 피곤한 일인데 각각의 자전거 아니고 하나로 이어진 자전거를 타고 다녔다. 우리라면 절대 하지 못할 일이었다. 마음이 보통 맞아가지고서는 안되는 쉽지 않을 일일 텐데 씩씩한 둘의 모습이 존경스럽기까지 했다. 이들의 목적지는 인도였다. 자전거를 타고 얼마나 달려야 인도에 도착할 수 있는 것인지 상상도 하기 힘들었다. 독일에서 키프러스 까지도 한 달이 넘게 걸렸다 했는데 인도는 몇 달이 더 걸릴 터였다. 하지만 이들이 길에서 얻을 것들은 그 시간의 가치를 뛰어넘는 경험일 것이었다. 이 대단한 여행자 커플에게 데니즈는 쉬어가는 의미에서 내일 함께 올리브를 따자고 제안했다. 순진한 둘은 농장일을 하기로 약속했다. 일꾼이 두 명이나 더 늘었으니 우리 입장에서는 땡큐다!


오늘 하루도 이른 아침 맛있는 식사 준비로 시작한다. 가장 먼저 차이를 만든다. 빵을 굽고 이곳의 전통 치즈인 할렘을 굽는다. 안네가 직접 만든 무화과 잼과 빨간 과일잼도 식탁에 오른다. 아침을 성대하게 먹는 터키의 카발트(아침식사) 문화가 있어 오랫동안 많은 음식을 먹는다. 웬만하면 간단히 아침을 먹는 나와 남편도 이곳의 식사는 느긋하게 많이 먹는다. 이미 북키프러스 사람이 다 된 것처럼 아침을 즐긴다. 신선한 과일과 올리브, 빵 사이에 구운 치츠를 넣고 잼을 발라 만든 샌드위치를 한입 베어 물고 따듯한 챠이까지 마시면 완벽한 아침이 된다. 차가운 아침 공기가 익숙해질 때까지 야외에서 밥을 먹고 있으면 하루가 서서히 열리는 느낌을 줬다.

오늘은 빗을 이용해 올리브를 긁어내기로 했다. 구부러진 포크 같은 도구는 그 모양이 생소하긴 해도 결국 대추를 수확하는 방법과 비슷했다. 나무 아래 큰 비닐을 깔고 나무를 힘차게 빗어주면 ‘후두 두두’ 경쾌한 소리를 내며 올리브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구슬처럼 가득 쌓인 올리브를 상자에 쓸어 담으면 금세 한 상자가 가득 찼다. 역동적으로 올리브를 수확하니 일꾼들도 활력이 넘친다. 시원하게 떨어지는 올리브 덕에 일 할 맛이 났다. 녹색의 올리브는 익을수록 포도 같은 자주색을 뗬다. 입에 넣어 살짝 씹어보니 떫은맛이 났다. 이 열매에서 어떻게 기름이 나는 것인지 신통방통한 일이다. 지중해의 기후는 우리의 상상만큼 평화롭지 않다. 땅은 척박해 자랄 수 있는 식물들이라고는 레몬, 포도, 올리브 정도이다. 척박할수록 더 깊게 뿌리를 내리는 과일들이다. 그렇다 보니 이 작물을 가지고 곡식과 교환하기 위한 무역이 발달할 수밖에 없었다. 키프러스 역시  키우는 것이라곤 모두 올리브와 오렌지, 무화과뿐이었다.

우리는 나무의 높은 곳까지 기어올라 올리브를 빗어 내렸다. 어린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다. 여섯 명이서 올리브 나무 한 그루를 정복하는데 한 시간이면 충분했다. 오전 동안 네 그루 정도는 해치웠다. 잠깐의 쉬는 시간을 제외하고 올리브 농사에 어떤 사명감이라도 있는 사람들처럼 무섭게 일을 했다. 박스 가득 찬 우리의 수확물을 보며 농부의 기쁨을 공감했다.


“내일 방앗간에 가서 올리브기름을 짤 거예요. 내일은 다 같이 방앗간에 갑시다”

데니즈는 방앗간에 가자고 새로운 제안 했다. 독일 커플은 얼떨결에 또 하루를 더 머물기로 한다. 방앗간 얘기를 듣고도 그냥 떠나기는 아쉬웠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제 이 마을의 올리브 나무를 봐도 신기하지 않다. 농사꾼이 다 된 것이다. 주렁주렁 매달린 올리브 알들을 보며 에디는

“저 집은 올리브가 저렇게 매달렸는데 따지도 않고 뭘 하는 거야.”

라며 남의 집 농사에 훈수를 뒀다. 고작 며칠 동안 농장 일을 돕는 것일 뿐인데 이곳에 평생 살 사람처럼 각자의 방식으로 올리브가 신경 쓰이는 것이다. 올리브를 즐겨먹지 않는 우리지만 농장에서 나오는 신선한 올리브 절임은 안 먹을 재간이 없다. 션 언니와 올리브를 두드려 으깬 다음 레몬을 띄운 소금물에 절인다. 며칠 지나면 잘 익겠지. 이제 올리브 피클은 식탁에 빠지면 섭섭한 음식이 된 것이다. 까만 올리브, 녹색 올리브, 안에 파프리카가 들어있는 것까지 모든 취향의 것들은 제 각각의 맛이 있었다. 짧은 시간 동안 한 곳을 여행할 때 한 나라와 도시에 대한 느낌은 현지 사람들, 음식, 독특한 풍경들로 머리에 남는다. 그런데 일을 했던 여행지는 단편적인 장면보다 축적된 일상의 반복된 행동, 습관, 머물렀던 집의 구조나 마당 같은 것들이 잊히지가 않는다. 키프러스는 나에게 올리브 그 자체였다. 올리브를 보면 북키프러스가 떠올랐고 그곳을 생각하면 올리브가 생각나 침이 고였다.  

제일 행복한 저녁시간이 돌아왔다. 농가민박에서 삼시 세 끼를 해 먹으며 낮에는 일을 하고 점심을 먹음과 동시에 하루 일과에서 해방이 되었다. 밖으로 나가 외식을 할 수도 있었지만 여행 내내 사 먹는 음식에 질렸기 때문에 자연스레 해 먹는 것을 택했다. 새로운 나라에 도착할 때마다 뭘 먹을지, 어떤 특산물이 있고 맛 집이 있는지 검색하는 것도 설레지 않았으니 말이다. 가끔 하는 외식은 기쁜 일이지만 매일 하는 외식은 피곤한 고민이었다. 가끔 이렇게 오래 머물 집이 생길 경우에는 그동안 먹고 싶었던 한국음식을 실컷 해 먹고 싶었다. 워크 어웨이에서 보통은 호스트가 만들어 주는 식사를 먹는 경우가 많았지만 이번처럼 직접 식사를 준비하는 경우는 더 반가운 일이었다. 매 끼니 늘 푸짐하게 야외식탁에서 함께 먹으니 맛도 운치도 더 좋았다. 더군다나 저녁은 모두 함께 먹어야 더 하루를 마무리하는 기분이 들었다. 일하고, 먹는 단순한 행위에서 서로에게 끈끈한 유대감을 느꼈다. 북적대는 분위기에 취해 데니즈는 와인을 몇 병 가져왔다. 잔에 와인을 가득 채워 연거푸 마신다. 피로가 풀리며 노곤해 지자 내친김에 각자 나라의 대표 노래를 틀어보기로 한다. 한국 대표인 우리는 사물놀이 공연을 틀어줬다. 알록달록 옷을 신기하게 감상한다. 독일 커플은 한참 고민을 하더니 벨라 차오 노래를 튼다. 심지어 이탈리아 노래였지만 모두가 아는 곡을 틀어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차오 벨라 후렴구에 맞춰 다 같이 노래를 부른다. 취기가 올라오니 노래 부르기가 한결 쉬웠다. 흥이 많은 에디는 기분이 좋아 자리에 앉아있기 힘들어했다.


이제 북키프러스 데니즈 차례였다. 데니즈는 전통민요를 틀었는데 반복되는 음계에 맞춰 모두가 손을 잡고 춤을 추는 곡이라 했다. 설명과 함께 순식간에 테이블을 박차고 나간 데니즈는 춤을 추기 시작했다. 독일 커플도, 에디도 모두 어깨동무를 하고 데니즈를 따라 포크댄스를 춘다. 분위기를 띄우는 것에 포크댄스만 한 것이 없다. 에디는 한 발 더 나가 독무대를 즐긴다. 자유로운 춤사위다. 엘리도 춤을 추라며 내 이름을 불러댔지만 자리에 앉아 팔을 허공에 휘젓고는 박수를 치는 것으로 빠져나간다. 나는 멍석을 깔아주면 잘 못하는 사람이었다. 취기가 올라와야 엉덩이도 좀 흔들고 노래도 부를 수 있는 사람이라 이 정도 와인으로는 부끄럼과 민망함을 숨길 수가 없다. 사람들은 나를 자유로운 영혼이니, 활기차네 했지만 여행 중에 만난 내 모습은 차분하고 혼자 있는 것을 훨씬 더 즐기는 것 같았다. 가끔 여행자들 속에 끼여있을 때면 몇 마디 영어로 쿨한 척하고 싶지만 슬그머니 빠져나와 혼자 있는 시간이 더 편하다. 정말 어쩌다 마음이 정말 잘 맞는 여행자를 만나면 피곤함을 술로 이겨내며 밤새 얘기를 하는 경우가 있는데 서로의 문화에 충격을 받아 도저히 궁금해 못 참을 지경일 때는 서로의 눈빛만 봐도 오늘 잠은 다 잤구나 느낌이 오는 날도 있다. 오늘은 에디에게 그런 날인 것처럼 보였다.

에디는 더 더 신나게 춤을 췄다. 션은 그 모습을 보며 ‘또 시작이네’ 하는 표정을 지었다. 둘은 정말 톱니바퀴처럼 잘 어울리는 커플이었다. 텅 빈 와인병을 보며 모두 아쉬워했지만 내일은 방앗간에 가는 중요한 날이니 잠자리에 들기로 했다. 독일 커플은 내일 이곳을 떠나기로 했다. 여행자들은 짧은 시간에도 정이 잘 든다. 더군다나 그 많은 올라브 나무를 빗겨댔으니 깊은 정이 들 수밖에 없다. 식탁은 너저분했지만 남은 음식은 없다. 차가운 밤공기를 깊이 들이마셔 본다. 배도 부르고 와인에 춤까지 췄으니 오늘 저녁은 잠이 잘 오겠다.

'올리브 방앗간!'

눈이 번쩍 떠졌다. ‘참기름을 짜는 것과 비슷하겠지’라고 생각했지만 도대체 머릿속에 그려지진 않는다. 사실 참기름을 짜는 방법도 모르니 올리브 오일은 알 턱이 없다.

며칠간 수확한 올리브를 안네의 차에 차곡차곡 싣었다. 독일 커플은 떠나기 전 숙소의 벽에 본인들의 모습을 그렸다. 어디든 흔적을 남기고 싶어 하는 인간의 욕망이기도 했지만 데니즈 역시 본인의 공간을 거쳐간 여행자들을 그렇게나마 기억하고 싶어 했다.

방앗간으로 출발하기 위해 우리가 탄 데니즈의 차 뒤로 자전거가 뒤따랐다. 두 대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었는데 발이 하나같이 움직이도록 페달을 밟았다. 각자 자전거를 타는 것보다 훨씬 힘들어 보였다.

"처음엔 힘들었어요. 뒷사람이 페달을 안 밟아 주면 나 혼자 이 무게를 끌고 나가야 하니깐요. 지금은 알아요. 서로 어떻게 배려하는지를"

여행 초반에는 몸이 힘드니 싸움을 자주 했는데 지금은 익숙해져 싸울 일이 없다고 했다. 싸움과 자전거 둘 다에 익숙해졌으리라 짐작했다. 남편과 내가 그렇듯이. 몸에 붙는 사이클 복장을 한 둘의 짐은 정말 단출했다. 자전거에 많은 짐을 싣을 수도 없겠지만 더 필요해 보이지도 않았다. 꼭 필요한 몇 개의 옷가지와 전자기기가 전부였다. 우리도 여행을 하면 할수록 짐이 줄어들었다. 필요한 것은 정해져 있었고 필요 없는 것들 은 말 그대로 짐이었다. 그 짐을 버릴 때마다 우리는 무게에서 조금 해방될 수 있었다. 나중에 어디에 정착하든 꼭 필요한 물건만 집에 놓자고 남편과 약속했다. 가볍게 사는 것만큼 스스로를 자유롭게 하는 것도 없었다.



마을 입구에 있는 큰 방앗간에 도착했다. 우리끼리 여길 지나왔다면 이곳의 용도를 절대 몰랐을 것 같은 외형이었다. 마을 사람들도 올리브를 한 트럭씩 싣고 와서 줄을 섰다. 우리가 딴 양은 많은 것도 아니었다. 안네가 먼저 줄을 서준 덕분에 우리 차례가 금방 왔다. 그동안의 결실이 한병의 올리브로 탄생하는 과정은 단순했다. 올리브를 씻으면서 큰 찌꺼기들은 걸러낸다. 다음 단계로 이어진 곳에서 씻고, 고열로 찌고 갈아서 압착하는 방식이었다. 그리고 맨 마지막은 쇠 주둥이를 통해 황금색 올리브유가 쏟아져 나왔다. 데니즈의 허락을 받고 기름을 찍어 먹어보니 부드럽고 뜨끈한 맛에 올리브 향이 진동했다. 오일 맛을 잘 모르는 나는 "아 좋네"라고 간단히 말했지만 션 언니는 올리브 향이 진하면서도 신선하다 했다. 미각과 후각은 션 언니를 따라갈 수 없다. 그녀의 입맛에는 올리브의 향이 제대로 느껴졌을 것 같았다. 우리가 수확한 300킬로의 올리브는 6L의 기름으로 변했다. 그간의 고생에 대한 결과물이었다. 독일 커플은 생수병에 갓 짜낸 오일 한 병을 담았다. 그들의 몫이었다. 이제 우리는 헤어질 때가 되었다. 전직 사진기자였던 에디는 자전거 타는 모습을 멋지게 찍어주겠다는 핑계로 조금 더 멀리 그들을 배웅했다.

쏟아지는 올리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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