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 팬들은 은근히 '어떤 팀이 가장 인기가 많은가'를 두고 신경전을 벌일 때가 있다. 암묵적으로 KBO리그의 최고 인기팀은 기아 타이거즈 라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 10여 년 전만 해도 기아와 롯데가 최고 인기팀 양강처럼 다뤄졌는데, 그 사이 기아가 두 번의 우승을 한 것이 아무래도 격차를 벌리는 데 꽤 기여를 했을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 이런 부분은 코에 걸면 코걸이이고 귀에 걸면 귀걸이라서 똑부러지게 답을 내놓기는 어렵다.
여기서 궁금해지는 질문이 하나 있다. '어떤 팀이 세컨드 팀으로 가장 인기가 많은가?' 이다. 물론 꼭 세컨드 팀을 두라는 법은 없다. 세컨드 팀에 대한 관심과 응원은 '내 팀'과 경기가 없거나 관련이 없을 때만 유지되기에 충성도는 극히 낮은 팬심이라 봐야 한다. 어떤 의미에서 세컨드 팀으로 인기가 많다는 건 기분 나쁜 일일 수도 있다. 모두가 싫어하지 않는다는 건 반대로 모두에게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뜻일지도 모르니까.
그렇지만 세컨드 팀으로 자주 뽑힌다는 건 그만큼 경기 내외적으로 좋은 이미지를 쌓아올렸다는 뜻이기도 하다. 프로스포츠는 크게 보면 엔터테인먼트 산업군에 속한다는 말에 난 백퍼센트 동의한다. 충성도 높은 팬덤을 구축하는 일만큼 안티를 적게 만드는 일도 중요하다. 이 측면에서 보면 KBO에서 가장 앞서 있는 팀이 바로 한화 이글스가 아닐까 한다.
1. 선발투수진
시즌을 출발하며 한화는 대형 호재를 맞이했다. 바로 류현진의 컴백이었다. 이때 모든 전문가들은 한화가 5강 진입은 당연하며 잘하면 24시즌 우승 도전도 가능 할 것이라 예상했다. 한때 한화의 살림을 혼자 도맡았던 김민우가 돌아왔고, 23시즌 신인왕인 문동주가 있고, 매우 만족스럽진 않았어도 나름 검증된 외국인 투수들이었던 페냐와 산체스의 재계약을 마쳤기에 마지막 한자리를 신인 최대어급인 황준서나 이태양, 장민재 등이 메워준다면 10개구단 어느 팀과도 승부를 볼만한 투수진이라는 평가는 당연하고도 적절했다. 여기에 류현진을 더한 거다. 그러니 5선발이 꽉 차고 남아 도는 상황으로 보였다.
하지만 시즌이 출발하자마자 김민우가 토미존 수술로 시즌아웃 되어버렸다. 불길했지만 이 정도는 견딜만한 선발 뎁스라고 여겨졌다. 그런데 믿었던 류현진이 시즌 준비가 잘 되지 않은 듯 이름과는 걸맞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여기에 외국인 투수의 부진이 겹쳤다. 비시즌 동안 국대에 계속 불려나간 탓인지 문동주도 23시즌보다 못한 모습을 보였다. 5선발 라인에서 나름 자리를 잡아줄 거라 생각했던 베테랑 투수들도 부상 문제로 1군에 얼굴을 보이지 못했다. 첫 등판에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던 황준서는 체력문제를 여실히 드러내며 1년차부터 프로 선발 로테이션을 도는 건 실로 말도 안되는 일이라는 걸 다시 한번 확인시켜줬다.
한화 이글스의 가장 큰 강점으로 여겨졌고, 이름만 나열하면 타팀 팬들이 숨 막혀할 정도로 대단해보였던 게 바로 선발진인데, 24시즌 한화는 류현진이 안돌아왔다면 안좋은 의미로 공포의 선발진이 되었을 것이다. 그나마 시즌 중반부터 류현진이 어느 정도 제 페이스를 찾아갔고, 부상선수 대체 선발로 들어온 와이스가 자리를 잡으면서 큰 고비는 넘겼다. 그러나 대체 외국인인 바리야의 부진, 문동주의 아쉬운 이닝이팅, 5선발 부재 등의 문제는 시즌 내내 한화를 괴롭히는 가시가 되었다.
2. 구원투수진
24시즌 한화의 구원투수진을 보면 아쉬움과 기대가 공존한다. 일단 시즌 초반에 괜찮은 모습을 보였던 이민우와 한승혁이 시즌 전체로 놓고보면 그 선수들의 평균치에 수렴해버렸다는 점이 아쉽다. 특히 ABS와 한승혁이 잘 어울릴 거라 생각했는데 25시즌에는 이 선수들이 고점을 얼마나 길게 유지할 수 있는지가 중요하다. 박상원의 초반 부진으로 마무리 자리를 맡은 주현상은 시즌 내내 좋은 모습을 보여줬다. 후반기에 들어서면서 박상원도 제 페이스를 찾았고, 무엇보다 김서현이 드디어 포텐을 터뜨리기 시작했다는 점이 24시즌 한화의 투타를 통틀어 최고의 수확이 아닐까 싶다.
구위로 상대를 압박하는 불펜투수의 가치가 점점 올라가고 있는 상황이다. KBO리그를 통틀어 김서현보다 좋은 구위를 가진 불펜투수는 잘 떠오르지 않는다. 김서현만 제대로 자리를 잡을 수 있다고 해도 한화 불펜은 충분한 경쟁력을 갖출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여전히 좌우 구성 측면에 있어서 아쉬운 점이 보이는 건 사실이지만, 왼손타자라고 한들 김서현의 공을 쉽게 칠 수 있는 타자는 리그에 몇 되지 않는다.
24시즌 한화는 시즌 중반 감독교체를 단행했다. 같이 바둑판에 시선을 두고 있지만 훈수를 하는 것과 직접 대국을 두는 것은 엄연히 다른 일이라는 걸 최원호 전 감독은 뼈저리게 느꼈을 거라 보인다. 한화의 픽은 김경문이었다. 한때 한화는 김인식-김응용-김성근 이라는 삼김三金시대를 지나며 '명장의 무덤'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썼는데, 이번에도 그 삼김 못지 않은 이름값의 명장을 데려오며 많은 우려를 낳은 것도 사실이었다. 특히나 '김성근에 가려져서 그렇지 김경문도 그 못지 않은 투수 그라인더'라는 얘기는 한화팬들의 걱정을 불러일으켰다. 안그래도 갈아마시기 딱 좋아보이는 '신인급의 싹수가 좋은 투수'들이 많은 한화였으니까 더욱 그랬다.
허나 김경문 감독은 '사람은 변할 수 있다'는 걸 증명했다. 그것도 좋은 쪽으로 변할 수 있다는 걸 말이다. 올 시즌 한화는 유일하게 '3연투'가 없는 팀이었다. 이건 여러 의미로 대단함을 넘어서 감동적인 기록이었다고 할 수 있다. 아마 3연투 제한을 풀었다면 몇 경기는 더 이겼을지도 모른다. 그 몇 경기로 인해 5강을 갔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감독과 코치진이 한번 세운 원칙을 무너뜨리지 않았고, 그로 인해 한화는 좋은 자원들의 능력을 최대한 보존한 채로 25시즌을 맞이하게 되었다. 25시즌 한화가 좋은 성과를 얻게 된다면 24시즌의 이 인내가 더 높은 평가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3. 공격 부문
팀 공격지표를 보면 바로 눈에 띄지만 딱히 좋다고 할 수 있는 부문이 없다. 타고투저 시즌인데 키움과 더불어 쌍끌이로 타저투고를 하고 있었던 셈이다.
타격을 이야기하면 가장 먼저 쓴소리를 하게 되는 선수는 당연히 노시환이다. 노시환은 스탯티즈 기준으로 2023시즌 전체 공격WAR 1위 선수였다. 홈런 31개로 1위, 타점 101개로 1위, OPS는 0.929를 기록하며 최정에 이어 2위를 기록할 정도로 최고의 한 해를 보냈다. 당연히 많은 전문가와 팬들은 노시환을 '상수'로 봤다. 그런데 팀의 중심을 잡고, MVP경쟁을 해야하는 노시환이 동포지션인 3루에서도 너무 많은 선수에게 뒤쳐지는 성적을 거두고 말았다. 이로인해 한화 타선의 파괴력이 엄청나게 줄어버렸다.
여기에 시즌 극초반 '15 테임즈'의 재림인가 싶을 정도로 엄청난 생산성을 보였던 페라자가 중반 이후로는 계속 가라앉는 모습을 보인 점도 아쉬운 부분이다. 어떤 팀이든 외국인 타자는 그 팀 타선의 '치트키' 역할을 해줘야 한다. 23시즌 우승을 한 LG 트윈스를 보자. 사실 오스틴 딘이 없었더라도 LG 타선은 약하지 않았다. 그러나 오스틴이라는 치트키의 존재가 LG를 우승으로 이끌었다. (24시즌 기아는 조금 다르다. 여긴 소크라테스가 치트키 역할을 못했지만, 김도영이 그 역할을 해버렸다.) 페라자를 타팀 외국인 타자인 로하스, 에레디아, 레이예스 중 하나로 바꿔서 생각해보자. 타선 전체의 무게감이 달라진다.
물론 FA 영입을 한 채은성과 안치홍의 활약도도 돈값을 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런데 이 선수들은 커리어 내내 이보다 더 큰 활약을 하기보다는 이보다 더 떨어지지 않는 성적을 거두는, 늘 제 몫을 하지만 제 몫만 하는 선수들이라고 봐야 하기 때문에 앞으로도 한화와 남은 계약 내내 평균치를 뽑아줄 거라 생각한다.
이 표를 작성하면서 가장 아쉬운 선수는 문현빈이었다. 많은 전문가와 한화에 관심이 있는 팬들이 한 목소리로 타격포텐이 있다고 말하는 선수가 바로 문현빈이다. 어디든 한 포지션을 주전으로 잡아주는 게 선수 본인을 위해서든 팀 전체를 위해서든 좋은 길인데 그게 안되고 있는 게 아쉽다.
이건 다시 말해서 팀 야수진 구성의 문제라고도 볼 수 있는데, 한화는 선수가 없는 게 아니라 비슷한 느낌의 선수가 너무 많다. 외야에는 수비가 약한데 타격이 특출나지 않은 선수 투성이이고, 내야에 코너 야수는 있는데 키스톤을 볼만한 선수가 몇 되지 않는다.
24시즌 후반기를 보자. 페라자 쪽으로 공이 날아가면 경기장에 있는 모두가 긴장을 해야 했다. 노시환은 잔부상이 있었다. 1루와 지명 슬롯을 채은성과 안치홍이 나눠썼다. 1루에 채은성을 세웠다면 나머지 셋이 지명타자를 돌아가며 치고 둘은 선발에서 빠지는 게 맞는 상황인데 차마 그럴 수가 없으니 수비가 약하거나 안되는 상태로 둘이 라인업에 올라갔다. 개인적으로 안치홍 2루는 최소한 경기당 안타 1개는 상대에게 헌납하는 수준의 수비라 보지만, 그게 페라자 외야나 노시환 3루보다 낫다면 어쩔 수가 없는 선택이 된다. 물론 가장 큰 아쉬움은 어떻게든 억지로 포지션을 꿰어맞춰 선수들을 세워놓아도 생산성이 기대보다 낮았다는 데 있겠다.
4. 주루, 수비 부문
한때 '행복 수비'라고 불리며 한 시즌이 끝날 때마다 에러 모음집을 양산해냈던 시절에 비하면 리그 평균에 다다르는 수비 수치를 보이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대신 센터라인이 여전히 약하기 때문에 보이는 숫자보다 범위의 문제는 가지고 있는 상태라고 봐야 한다. 그래도 이 문제를 팀이 인지 하고 있다는 점은 긍정적인 신호다.
수치를 정리하면서 진짜 예상외였던 게 바로 도루성공율이었다. 당연히 도루성공율 최하위는 LG일거라 생각했는데 한화였다. 김경문 감독이 주루를 강조한다는 뉘앙스의 기사를 자주 접할 수 있었는데, 그럴 수 밖에 없는 구조 아닌가 싶었다. 주루가 저렇게 되면 상대팀이 수비에서 긴장을 할만한 요소가 줄어든다.
5. 총평
한화 이글스라는 팀을 보면 성적을 내기 위한 움직임이 적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생각해보면 파격적인 시도도 많이 했다. 갑자기 베테랑을 전부 다 빼내고 주축 선수들을 어린 선수들로 꾸리는 실험도 해봤고, 지도 컨셉이 다른 명장들도 여럿 모셔왔었고, 심지어 외국인 코칭스탭들로 치른 시즌도 있다. FA 시즌을 조용히 넘어가는 편도 아니다. 최근만 봐도 채은성-안치홍-심우준-엄상백 등 큰 손 역할을 도맡아 해오고 있다.
그런데 한화의 성적은 움직임에 비하면 아쉬워보인다. 여러가지 설명이 있을 수 있다. 육성이 아쉽다, 선수 수급이 아쉽다, 팜이 아쉽다 등등. 그런데 잔혹하게도 프로는 늘 결과로 말한다. 결과적으로 한화는 '열심히'는 했는데, '충분히'하진 못했다. 특히나 프런트의 판단이 그랬다. 외국인 투수 운용에 있어서 변화와 안정 중 안정을 선택했는데, '23시즌 9위 팀이 안정을 꾀하는' 건 문장만 들어도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반대로 24시즌의 아쉬운 점 중 많은 부분을 외국인 선수 운용이 차지한다고 보면 이건 한 팀이 가장 빠르게 체질개선을 할 수 있는 문제라고도 할 수 있다. 특히나 좋은 외국인 선수들이 메이저리그의 진출 통로로 KBO리그 무대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고 있는만큼 한화는 가파르게 스탭업을 할 가능성도 높다.
희노애락이 넘쳐나는 야구장에서 보살이 웬말인가
24 시즌 극초반 한화가 비상하며 '고산병'을 외쳤을 때, 나는 '드디어 한화의 시간이 왔는가'라고 생각했다. 모두가 꿈꾸는 강력한 통곡의 벽을 앞세운 투수왕국, 나는 여전히 한화가 충분히 그럴만한 저력이 있는 팀이라고 생각한다. 비상은 짧고 하강은 길었지만 모든 것을 잃고 아예 추락한 것은 아니다. 독수리는 바람을 타면 아직 날아오를 수 있다. 그리고 독수리는 꼭 바람이 불지 않아도 바람이 부는 곳까지 날갯짓을 할 힘이있다. 내년엔 정말 까마득하게 날아오를 독수리를 볼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