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비의 프레이밍 10
우리나라에 야구가 처음 보급된 건 1899년 인천으로 알려져 있다. 개항과 더불어 자연스러운 현상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에 야구를 처음 받아들인 지역이라는 자랑스러운 시작에 비해 프로야구 인천 지역연고의 역사는 안타까움으로 얼룩져 있다. 삼미-청보-태평양으로 이어졌던 만년 약체라인에서 벗어나 드디어 2000년대 초반을 호령한 현대 유니콘스로 넘어왔지만 무리한 연고지 이전으로 도리어 인천 야구팬의 마음에 상처만 주고 말았다. 삼청태현의 역사를 공식적으로 이어받은 팀이 없다는 것(그로 인해 이 주제만 나오면 괜히 분란만 생긴다는 점)은 야구 팬의 한 사람으로서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나 만년 약체로 여겨졌던 인천의 야구는 2000년대 중반 야신 김성근과 함께 대반격에 나선다. 속칭 벌떼야구를 펼치며 강해보이지 않는데 도무지 이길 수 없는 끈끈한 팀컬러로 2007년부터 4년 동안 3번의 우승, 그 이후로도 두 번의 준우승을 차지하며 6년간 KBO를 호령했다. 이후로 인천야구에서 약팀의 이미지는 찾아볼 수 없다. 심지어 SK 와이번스를 이어받은 SSG 랜더스는 2022년 KBO 역사상 유일무이한 '와이어 투 와이어' 통합우승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워낙 대단한 기록을 만들어낸 22시즌이어서 랜더스가 다시 왕조를 여는 게 아닐까 싶었지만 23시즌 3위, 24시즌은 6위로 물러앉았다. 와이번스와 랜더스의 역사를 보면 이럴 때 다시 치고 올라가는 저력을 보여줬다. 지난 10년 간 2회 이상 우승을 한 팀은 단 셋 뿐이고(베어스 3회, 타이거즈 2회, 와이번스-랜더스 2회) 2017년 이후 춘추전국시대라 불리며 매 해 우승팀이 바뀌어 온 걸 생각하면 어떤 팀이든 언제라도 다시 우승에 도전할 모습으로 나타나도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올 시즌 랜더스는 그 어떤 팀 보다 받아든 성적표를 잘 분석해보는 게 중요하다. 이걸 어떻게 해석하는가에 따라 향후 몇 년의 흐름이 뒤바뀔 갈림길을 맞이하고 있기 때문이다.
1. 선발투수진
1선발로 데려왔다는 더거는 2024시즌 외국인 선수 중 첫 퇴출사례가 되고 말았다. 그나마 이후 교체선수로 데려온 앤더슨이 준수한 성적을 올리며 선발진에 구멍이 나는 것은 메울 수 있었다. 엘리아스는 나이 탓인지 내구성 문제를 보였으나 그가 빠진 사이 대체 외국인 선수였던 시라카와가 (약간 널뛰기를 했어도) 나쁘지 않은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외국인 선발이 베스트는 아니었더라도 나름의 역할은 해준 셈이라 보면, 문제는 역시 국내투수진이었다.
김광현은 신인시절을 제외하면 가장 안좋은 모습을 보였던 한 해였다. 구속측면에서는 크게 변화가 없었음에도 속구가 상대타자들에게 잘 통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줬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이런 김광현이 국내 선발투수 중 가장 나은 선수였다는 점이다. 제2의 김광현을 기대했던 오원석은 결국 알을 깨지 못한 채 시즌 종료 후 KT 위즈로 트레이드 되어버렸다. 나름 기회를 받은 송영진은 기회를 잘 살리지 못했다.
이럴 때마다 아쉬워지는 건 박종훈과 문승원이다. 당연히 선발진의 한 축을 맡아 줄 거라 믿었던 두 선수가 장기계약 이후 동반부진에 빠져버리니 팀으로서도 답이 없다. 이 둘이 2026년까지 계약되어 있다는 건 팀으로서는 무척 곤혹스러운 일이다. 심지어 박종훈은 2차 드래프트에 풀렸다는 소리가 공공연히 나돌았는데 심지어 데려가는 팀조차 없었다.
2. 구원투수진
랜더스의 불펜투수진은 '노/ 경/ 은' 이 세 선수로 이뤄져 있는 게 아니냐는 우스갯소리가 돌았을 정도로 노경은은 SSG경기를 틀면 나온다는 느낌이었다. 구원투수가 83이닝을 소화한다는 건 선발투수로 치면 170~180이닝은 소화하는 수준의 부담이었을 텐데 노경은은 초인적인 자기 관리로 그걸 시즌 끝까지 훌륭하게 해냈다. 노경은의 연차와 계속되는 많은 이닝소화에 대한 우려가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난 노경은이기에 앞으로도 몇 년간은 더 잘해주리라 믿는다. 이번 시즌 최고의 구원투수는 누가 뭐래도 노경은이었다.
여기서 잠깐 투수 혹사 이야기로 새보자. 우리는 혹사로 일이 년 반짝 하고 사라지는 투수들을 꽤 많이 봐온 게 사실이다. 역대급 재능으로 무려 계약금 10억원을 받고 입단했던 타이거즈의 한기주가 그랬고, 이제 골프선수와 유튜버가 되어버린 윤석민도 어떤 의미로서는 혹사의 희생양이다. 리그에서 '명장' 소리를 듣는다는 건 당연히 혹사를 시킨다는 증명서처럼 느껴진다. 경기 중 갑자기 팔꿈치나 어깨를 부여잡은 채 덕아웃으로 사라지는 뒷모습이 한 선수의 마지막 모습이 되는 것도 부지기수다.
우리의 태도는 이렇게 갈린다. 투수의 팔은 소모품이니만큼 아껴서 관리를 해줘야 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반대쪽은 이렇게 말한다. 투수의 팔은 소모품이니만큼 어차피 아무리 관리를 해줘도 결국은 못쓰게 되는 거다. 전자가 인도적인 태도고 후자는 승리를 위해 뭐든 해도 된다는 승리지상주의 적인 태도라고 매도할 수는 없다. 둘 중 무엇이 정확한 이야기인지는 사실 아무도 모른다. 성적도 나고 선수들 관리도 잘하게 되면 누구나 좋겠지만 이걸 비례관계로 만들기 위해서는 팀의 선수층이 두꺼워야 하는데 선수층이 얇은 KBO리그의 특성상 성적과 선수관리는 보통 반비례하기 마련이다.
노경은 같은 노장 선수의 혹사는 그래서인지 다들 속으로 안타깝기는 하지만 이해할만한 측면이 있다고 하고 넘어간다. 그러면 2002년생 조병현은 어떻게 봐야 할까? 그나마 조병현은 시즌 중반 마무리로 보직변경이 되며 추후로는 자연스럽게 관리가 될 가능성이 높으니 또 넘어간다 치면 올해로 스물일곱이 된 한두솔은 어떻게 봐야 하나. 혹사가 무서운 건 팀에서 단 한 선수만 당하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백번 양보해서 이제 선수시절의 황혼을 지나는 노장들이야 언제 은퇴를 해도 이상하지 않으니 되도록 많은 등판을 가져갈 수 있다고도 하겠지만, 앞으로 선수생활이 길게 남아있고 팀의 미래를 책임져야 하는 선수들이 현재를 위해 미래를 갈아넣는 걸 어떻게 이해할 수 있나? 백번 양보하고 또 한번 더 양보해서 그 혹사를 통해 우승이라도 한다면 모르겠다. 그것도 아니면 그건 대체 누구를 위한 혹사인가?
3. 공격 부문
SSG의 야수 베스트 라인업은 그 어느 팀 못지 않게 탄탄하다. 박성한 정준재 같은 젊고 빠른 야수들이 앞으로 나서면 리그 최고의 교타자인 에레디아와 레전드 최정이 뒤를 받친다. 추신수 한유섬처럼 제 역할을 언제든지 해줄 수 있는 선수들이 타순 여기저기 배치되어 있고 가장 아쉽다봐야 포수 이지영 자리인데 실상 이지영도 나쁜 에버리지의 타자가 아니다. 어느 팀이든 베스트는 좋지 않느냐고 반문할 지 모르겠지만 공격에서 이만큼의 짜임새를 갖춘 팀은 리그에 몇 되지 않는다.
그런데 전체 기록을 보면 모든 지표에서 약 7~8위권을 오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 선수들을 모았는데 이런 기록이 나오는 게 맞나 싶다. 올 시즌 SSG를 보면 느껴지는 건 혹사의 문제가 꼭 투수에게만 있는 건 아니라는 사실이다. '철인'이라 불리며 야수라면 한 시즌의 전 경기를 출전하는 게 당연하게 여겨지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투수가 그렇듯이 야수의 혹사도 결국은 부진과 부상을 부른다.
SSG의 베스트라인업은 강력하다. 그 힘은 올 시즌에도 느낄 수 있었다. 시즌 후반부 롯데와 한화의 추격이 매서웠던 시점에 이를 뿌리치고 결국 KT와 5강경쟁을 벌인 건 SSG였다. 난 이게 베스트가 좋은 팀의 힘이라고 생각한다. 반대로 베스트 라인업에 대한 의존이 심한 팀일 수록 변수에 취약한 모습을 보인다. 이 변수 안에는 '시간'도 존재한다. 베스트 라인업 중 핵심을 이루는 선수들이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어간다는 건 SSG로서는 근본적인 불안함이 커진다는 뜻이다. 게다가 올해는 추신수가 은퇴를 하기도 했다.
4. 주루, 수비 부문
주루 쪽에서는 안정감이 있었지만 수비에서는 의외로 안정감이 떨어졌다. 박성한의 실책 숫자가 눈에 띄는데 이 부분도 역시 박성한의 수비이닝이 1115이닝에 달하는 걸 생각해보면 이해가 가는 측면이 있다. 아무리 젋고 체력이 뒷받침되는 선수라 해도 키스톤의 경우에는 백업이 필요하지 않나 싶다. 실책은 싸게 내는 세금이다. 갑자기 부상과 같은 벌금을 맞으면 당장 주머니가 텅 빈 느낌이 들 거다.
5. 총평
SSG의 아쉬움은 아무래도 얇은 선수층에 있다. 나름 어린 선수들이 없는 건 아닌데 생각보다 자리를 잘 잡지 못하고 있다. 그나마 야수진에서는 몇몇 이름들이라도 있지 투수진은 그마저도 잘 보이지 않는다. 이 문제에 대한 장기적인 대책이 없다면 부자 망해도 3년은 간다고 하지만 드디어 부자 망한지 4년 이후를 맞이 할 가능성도 있어 보인다.
그런데 이렇게 선수들 문제만 이야기하고 넘어갈 수 없는게 바로 24시즌 SSG 랜더스다. 지난 2024 시즌을 3위로 마친 랜더스는 감독교체를 알렸다. 다들 의아해한 선택이었다. 당장 김원형 전 감독에게 아쉬운 게 아예 없었다고 할 수는 없다. 야수진이 늘 그 이름 그대로라는 게 김원형 감독에게 쏟아진 원성 중 가장 큰 부분이었으니 새 감독이 들어오면 그 부분만큼은 나아지려니 했다. 하지만 새로 부임한 이숭용 감독은 선수 운영의 새로움은 보여주지 못한 채 인터뷰 스킬의 신기원만 열어젖혔다. 어쩜 인터뷰만 하면 매번 이렇게 문제가 되는지 신기할 정도였다. 감독이 기자들 앞에서 선수탓, 코치탓을 하면 그 팀이 제대로 굴러갈까 싶은데, 우리가 흔히 원하는 '책임지는 리더'의 모습이 그에게서는 거의 보이질 않았다.
5위 결정 타이브레이크 경기를 마치고 SSG 팬들은 구단버스에 대고 '이숭용 나가'를 외쳐댔다. 이게 야구쪽이기보다 축구 서포터즈들에게서 보이는 문화라는 이야기를 듣고 개인적으론 썩 바람직하진 않다 싶긴 했지만, 그래도 그 심정만큼은 십분 이해가 갔다. 이숭용 감독이 흔히들 하는 것처럼 '내 탓이요.'만 했더라도 여론이 훨씬 낫지 않았을까? 이제 1년차 감독에게 팀의 문제에 대한 모든 책임을 지라고 할만큼 야구 팬들은 어리석지 않다. 랜더스가 우승을 한지도 얼마 되지 않았다. 랜더스 팬들은 팀이 조금씩 강해져가는 과정을 즐길 준비가 되어 있었을 텐데, 감독이 도리어 뜻대로 안되는 상황을 못 받아들인 게 아닌가 싶다.
SSG는 베스트 라인업이 좋은 팀이다. 그만큼 야구에 대한 이해도가 높은 선수들이 많은 팀이란 뜻이기도 하다. 이런 팀일 수록 리더는 전체를 하나로 묶으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본인만 살겠다고 모든 책임을 미뤄버리면 정말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지 못해서 망쳐버리고 만다. 다시금 그런 생각이 든다. 랜더스도, SSG도, 그리고 이 나라도 리더 복이 없어서 문제란 생각 말이다.
https://youtu.be/It4KMVKbZBk?si=oS-po433T5JG1am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