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야구의 수도는 누가 뭐라 해도 구도球都 부산이다. 내가 자이언츠 팬이 아니니 그 분들의 야구 사랑에 대해 한마디로 축약하는 건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지만, 반대로 그분들에게 야구에 대한 스스로의 감정을 한 단어로 표현해달라 말해도 그리 쉽게 답이 돌아올 것 같지는 않다. 가장 비슷한 단어는 애증을 넘어 어쩌면 운명이 아닐까?
사실 모든 야구 팬은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자신이 응원하는 팀에 대해 일종의 운명이나 숙명과도 같은 감정을 느낀다. 그쯤 되면 그건 감정의 영역보다는 손목이나 발목을 묶고 있는 노끈이나 사슬, 몸 어딘가를 파고들어가 제 멋대로 움직이는 힘줄처럼 실제적인 물리력에 가까워진다. 떨치려 해도 떨치지 못하고 끊으려 해도 끊을 수 없다.
허나 나는 내가 느끼는 물리력과 자이언츠 팬들이 느끼는 물리력의 강도가 같다고 자신할 수 없다. 자이언츠 팬들의 야구 사랑에는 형언할 수 없는 특별함이 있다. 깔끔하게 정비된 동백섬 산책길을 따라 걷다 맡았던 맑은 바닷내보다는 어둑한 영도 골목길을 걷다 맡은 비릿한 짠내와 이름모를 시장 언저리에서 훅 덮쳐온 뭉근한 돼지국밥 냄새같은 사랑이다. 그 안에는 꾸밈이 없고, 계산이 없다. "마, 함 해 보입시더." 누구의 팬 아니랄까봐 자이언츠 팬은 어떤 상황에서도 간지가 절절 흘러 넘친다.
1. 선발투수진
24시즌 롯데 자이언츠는 간명하게 정리하기가 어려운 부분이 많은 팀이다. 한 선수를 놓고 봐도 평가가 극과 극으로 갈린다. 난 윌커슨이 없었다면 24 롯데는 적어도 순위가 하나는 떨어졌을 거라 생각한다. 박세웅은 어떤가? 고작 6승 11패의 성적을 거둔 투수라고 하기에 그는 무려 173.1이닝을 소화하며 전체 이닝소화 3위에 이름을 올렸다. 하지만 반대로 경기 내용을 놓고 보면 윌커슨과 박세웅은 아쉬운 점이 많다. 윌커슨은 상대를 압도하지 못했고 (그만큼 잘 버텼다고 볼 수 있지만), 박세웅은 경기 내적으로도 기복이 심해서 점수를 확 몰아줬다가 다시 정신을 차리고 이닝을 꾸역꾸역 먹는 등 신뢰감이 있는 피칭을 보여주지 못했다. 이 선수들의 피칭 퀄리티가 조금만 더 좋았다면 어땠을까 싶다가도, 그래도 저만큼 이닝을 소화해준 게 어딘가 싶기도 하고, 정리하면서도 이게 정리가 맞나 싶을 정도로 어지럽다.
반즈는 반대다. 내용은 좋다. 그런데 중간에 부상으로 빠져있었던 시간이 생기며 150이닝에 턱걸이 하고 시즌을 마무리됐다. 돌아와서는 극강의 모습을 보였지만 막판에는 아쉬운 경기도 몇 있었다. 김진욱은 드디어 기대에 부응하는 듯 했지만 여전히 수치를 놓고 보면 연차에 비해 아쉬운 모습이 남아있다.
선발진에서 평가가 갈리지 않는 유일한 선수는 나균안 뿐이다. 그를 수식할 단어는 확실하다. '실망'. 물론 나균안에게 롯데 5강 탈락의 모든 책임을 씌울 순 없다. 선수는 그런 책임까지 지는 자리는 아니다. 하지만 그는 제 몫을 못했다. 단순하게 성적이 하락했다는 문제가 아니다. 주변을 잘 정돈하고 운동에 전념하는 모습만 보여줬다면 팬들은 기꺼이 응원하며 기다려줬을 것이다. 하지만 이젠 그 기다림의 성격이 바뀌었다. 앞으로 몇 번의 기회가 더 남아 있을까? 생각보단 많지 않을 것이다. 프로야구판에는 그렇게 팬들을 실망시킨 채 사라져간 선수가 너무나 많다. 모든 탑은 쌓아올리긴 어렵고 무너뜨리긴 너무나 쉽다.
2. 구원투수진
24시즌을 앞두고 롯데가 준 가장 큰 변화는 김태형 감독을 3년 총액 24억원에 영입한 것이었다. 김태형은 야구팬이면 누구나 공인하는 명장 계보에 이름을 올리고 있는 감독이다. 두산 베어스를 무려 7년 연속 한국시리즈에 진출시켰다. 그 7년동안 두산은 계속 선수 유출을 겪었고, 그 와중에도 김태형은 꾸준히 성적을 올렸다. 누구나 '김태형이라면'을 생각할 수 있게 하는 감독이다.
그러나 24시즌 롯데를 운영하는 김태형 감독의 모습에는 확실히 명암이 갈린다. 구원투수진 운영은 온통 물음표다. 24 롯데는 2연투 156회로 전체 1위, 3연투 22회로 전체 1위를 기록했다. 이미지로만 따지면 이숭용, 이승엽, 이강철 감독 등이 선수를 갈아넣었다고 보이지만 올 시즌 최악의 불펜 그라인더는 김태형이었던 셈이다. 두산팬들은 예전부터 김태형 감독이 '쓸 놈만 쓰는' 게 강한 감독이라고 말해왔다. 문제는 올 시즌 롯데에게 그 '쓸만한' 구원투수가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가장 믿음직한 허리인 구승민은 최악의 부진으로 출발했고, 마무리 김원중은 시즌 중반 이순철 해설위원에게 탭댄스 지적질을 당한 직후 성적이 급하락하더니 매번 아슬아슬한 투구를 이어갔다. 그나마 김상수가 투혼을 발휘했지만, 투혼이 사람의 몸을 움직이는 데도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한현희는 과연 FA 시즌 내내 한 번이라도 옵션을 타갔는지가 의문이다. 시즌 막판 선발에서 좋은 모습을 보인 박진은 내년을 위한 투수지 올해를 위한 투수는 아니었다. 진해수는 성적은 스페셜하지 않은데 계속 좌완스페셜리스트로 기용되었다.
그렇게 갈려나간게 전미르였다. 이번 시즌 루키인 전미르는 시즌 초반 롯데 불펜진에서 유일하게 공을 제대로 뿌리는 투수였다. 4월까지 16경기에 나와 1승 1패 3홀드 평균자책점 3.52로 초반 신인왕 레이스를 이끌기도 했다. 허나 당연히 신인투수다보니 체력적인 한계를 드러낼 수 밖에 없었고, 페이스가 떨어지는 상황속에서도 20경기를 더 소화했다. 결국 6월 17일 2군행 이후, 부상으로 2군에서도 더는 투구를 이어나가지 못한 채 시즌을 마감했다.
김태형 감독은 구원투수 부문에 있어서만큼은 팬들이 생각하는 최악의 운영을 했다. 시즌 중반 이후 롯데가 치고나갈 타이밍에서 계속 발목을 붙잡은 게 불펜진이었던 걸 생각하면 전미르의 부재는 너무나 아쉬운 대목인데, 이 아쉬움은 결국 자초한 것이라고 밖에 할 수 없다. 그나마 25시즌 전미르가 돌아와서 건강하게 공을 뿌려주면 다행일텐데, 만약 그러지 못한다면 그 후폭풍은 생각조차 하기 싫다.
그런 의미에서 24시즌의 윌커슨과 박세웅이 조금 더 좋은 평가를 받아야 한다고 난 생각한다. 이 두 선수가 이닝 소화를 못해줬다면 롯데 불펜진은 그야말로 최악의 상태로 빠져들었을 가능성이 높다. 반대로 롯데 불펜진이 더 탄탄했다면 이 선수들의 체력관리가 용이했을 테고 결국 조금 더 나은 성적을 올리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3. 공격 부문
방금 전 롯데 김태형 감독을 무슨 금지어가 될 감독인 양 씹어댔는데, 구분선 하나 건너오고 나니 이제는 찬양을 해야 할 판이다. 이래서 올 시즌 롯데가 도무지 정리가 안된다고 했던 거다. 팀 공격부문에서 24시즌 롯데 자이언츠는 23시즌에 비해 전부문 상승을 이뤄냈다. oWAR은 전체 7위에서 5위로, 타율은 4위에서 2위로, OPS는 8위에서 2위로, 순장타율은 9위에서 6위로, 홈런은 9위에서 8위로, 득점은 6위에서 3위로, wRC+도 7위에서 5위로 상승했다. 다른 건 몰라도 김태형이 야수를 보는 눈 하나만큼은 리그 어떤 감독보다 정확하다는 걸 입증한 시즌이었다.
보통 바둑을 둘 때 승패를 가르는 수를 '신의 한 수'라고 하는데 24 롯데 타선에는 신의 한 수가 너무 많다. 일단 고승민의 2루 정착은 롯데의 고민을 절반으로 줄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내야에서 제대로 포지션을 못잡고 심지어 외야로 전향까지 했던 선수를 도로 2루에 가져다 놨는데 이게 대박을 터뜨렸다. 보통 이런 경우 수비부담으로 인해 타격이 떨어져야 하는데 타격이 잘된 탓인지 수비도 나름 제 몫을 했다.
'1루+승엽'은 역시 믿을 수 있는 공식인 것일까? 나승엽의 1루 정착도 성공리에 이뤄졌다. 롯데 팬은 이제 '동희'하면 윤동희를 떠올리지 더는 한동희를 떠올리지 않는다. 외야 3~4옵션으로 알토란 같은 활약을 해준 황성빈의 성장까지. 이른바 '윤고나황'은 24시즌 롯데 자이언츠의 최고 히트상품이었다.
이뿐 아니다. 이제 롯데 팬들은 '믿고 쓰는 LG산 3루수'하면 손호영을 떠올릴 것이다. 몇 경기 채 치러지지도 않았던 시점에서 일어났던 LG 내야수 손호영과 롯데 투수 우강훈의 트레이드는 현재 스코어만 보면 롯데의 승리로 보인다. 한동희의 군입대로 무주공산이 되는 게 아닐까 싶었던 3루에서 손호영은 올 시즌 18홈런을 터뜨리며 팀에 부족한 장타력을 보강함과 동시에 안정적인 공격력을 뽐내서 '안 아픈 손호영'이 얼마나 무서운 선수인지를 보여줬다.
여기에 도무지 깨질 것 같지 않았던 시즌 202안타의 레이예스와 나름 베테랑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해낸 전준우까지. 24시즌 롯데 자이언츠는 장타력은 조금 부족하지만 상대를 계속 몰아치며 그로기 상태로 몰아넣는 공격력을 뽐냈다.
물론 아쉬운 부분이 없는 건 아니다. 나름 최선을 다했지만 유격수 자리에서 박승욱은 주전보다는 아직 백업이나 대타가 더 잘 맞는 선수라는 한계를 보였다.
가장 큰 문제는 포수였다. 주요선수 포수 자리에 '손성빈'이라는 이름이 들어와서는 안된다. 당연히 저 자리에는 유강남이 들어와야 한다. 유강남은 FA영입 이후 돈 값을 제대로 한 시즌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강남이 있는 것과 없는 것에는 차이가 있다.
포스트시즌도 아닌데 시즌 중반 이후 롯데 엔트리에는 포수만 3명이 들어있는 경우가 많았다. 경기 중반 포수에게 찬스가 걸리면 대타가 나오고 두 번째 포수가 나온다. 문제는 포수의 타격 생산성이 너무 낮아서 타순이 돌면 다시 대타가 들어가고 세 번째 포수로 경기를 마무리하는 일명 '포마카세'가 이뤄졌다. 경기를 나가는 선수나 그걸 운영해야하는 감독 코치진이나 모두 한숨나는 상황이었을 거라 생각한다. 손성빈의 성적을 보면 다른 포지션 대비 유독 떨어지는 걸 볼 수 있는데, 놀라운 건 동 포지션 대비 가장 좋은 성적이었다. 사실 그런 손성빈마저 부상이었다.
롯데 타선의 가장 큰 구멍이 포수와 유격수인데, 여기에 이미 영입한 FA 선수들이 있다는 건 정말 치명적인 문제다. 롯데의 '유돈노' 트리오는 이대로면 롯데를 넘어 KBO역사상 최악의 FA 영입 케이스로 기록될 가능성이 점점 높아지고 있는데, 이 영입을 주도한 사람은 그땐 무슨 생각이었고 지금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하기 짝이 없다.
4. 주루, 수비 부문
워낙 수비에서 독보적으로 안좋았던 기아 타이거즈의 존재에 가려져 그렇지 롯데의 수비도 꽤 불안했다. 그러나 난 이 문제를 '고질적'이라는 단어로 수식하고 싶지는 않다. 올 시즌 롯데는 많은 포지션의 주전이 이제 막 결정되었다. 수비불안은 당연히 따라올 수 밖에 없고, 시간이 갈수록 점점 나아질 가능성이 높다.
5. 총평
나는 롯데 자이언츠가 예상보다 더 빠르게 제 퍼즐들을 맞춰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아직 빈자리가 보이지만, 빈자리가 선명하게 보인다는 건 반대 의미로는 문제를 타겟팅하고 메꿀 수 있는 가능성이 그만큼 높다는 뜻이기도 하다.
보통 감독이 바뀌고 1년차에는 팀을 파악하느라 시행착오를 겪는다. 그에 비하면 롯데 야수진은 많은 포지션이 시행착오 없이 빠르게 자리를 잡았다. 그 부분은 확실한 성공이다. 대신 투수진의 물음표는 야수진보다 훨씬 크다. 퍼즐이 아예 없는 건 아닌데 금이 가 있거나 아직 제대로 크지 않아 겉돌고 헐거운 느낌이다. 만약 25시즌에 투수진의 물음표마저 느낌표로 바꿀 수 있다면 롯데는 그 오랜 우승의 한을 풀 수 있는 적기를 조만간 맞이할 거라 본다. 반대로 투수진의 물음표를 지우지 못한다면, 내년에도 난 롯데는 과연 어떤 팀인가 싶어 또 골머리를 앓을 것이다.
멋진 야구팬의 수준에 맞는 멋진 야구장이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사직구장 재건축 안이 통과되었다고 하는데, 내용을 뜯어보면 결국 다음 시장에게 첫 삽을 떠넘긴 꼴이라 이게 과연 하겠다는 의지가 있는 건가 싶기도 하다. 하도 많이 속다보니 아무래도 눈에 뭔가 보여야 믿을 수 있을 것 같다. 부산은 모두가 인정하는 구도球都다. 오래된 사직구장이 어떤 의미에서는 운치가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떤 추억은 추억일 때에야 아름답다. 낡은 야구장은 사진 속에서만 보고 싶다. 새집 냄새나는 야구장에서 울려퍼질 부산갈매기를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