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
허 주무관의 실력은 기대 이상이었다. 김 국장, 정 과장, 곽 과장.. 진오의 인사에 감 놓아라 배 놓아라 할 수 있는 사람들 모두 그의 이동을 흔쾌하게 받아들였다. 늘 인사과의 일방적인 연락을 받고 가라는 대로 짐을 쌌던 진오는 이 상황이 낯설었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이제 그는 김 국장과 정 과장의 지시를 직원들에게 전파하고 자료를 취합하여 보고하는 국(局)의 총괄 사무관이었다.
“앞으로 좀 바빠질 것 같아. 연이 등원이랑 목욕은 그래도 최대한 챙겨보겠지만 일이 너무 많아지면 힘들 수도 있어. 그래도 어차피 승진하려면 언젠가 해야 하는 고생이니까 짧고 굵게, 빨리 끝내는 게 목표야.”
연이가 수월하게 잠든 밤, 진오는 민정에게 자신의 인사이동에 대해 이야기했다. 진오의 말을 듣기는 했는지 민정은 애꿎은 티브이 리모컨만 만지작댔다. 민정이 리모컨을 만질 때마다 티브이 속 채널은 오르락 내리락했고 과장된 웃음소리는 리믹스 된 음악처럼 커졌다 줄었다를 반복했다.
“요즘엔 티브이에 볼 게 없네. 티브이도 늙나 봐. 아니면 내가 늙는 건가.”
민정의 티브이 타령에 진오는 묘하게 기분이 상했다.
“내 말 못 들었어? 아님 못 들은 척하는 거야?”
“너무 잘 들었어. 이렇게 가까이에서 말하는데 설마 못 듣겠어? 핵심 보직으로 이동하니까 축하라도 해 줘? 어차피 원래 집에서 하는 것도 별로 없잖아. 열심히 일해서 어서 빨리 승진하세요.”
진오는 민정의 얼굴을 재빨리 살폈다. 티브이 섬광에 비친 민정의 옆얼굴이 굳어 있었다.
“왜 화를 내는데?”
“화를 내는 게 아니라 그냥 웃겨서. 연이 등원이야 출근할 때 어차피 같이 하는 거고, 목욕은 지금도 내가 더 많이 하는 것 같은데. 그 외의 육아는 알지도 못하고 알려 하지도 않잖아. 집안일은 별로 하지도 않으면서 되게 많이 한다는 듯이 생색내는 게 너무 웃겨.”
민정은 티브이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말했다. 육아와 집안일은 진오에게 결코 유리한 전장이 아니었다. 그는 그걸 너무 늦게 깨달았고 그제서야 태도를 바꿨다.
“너무 힘들면 우리도 등하원 도우미 쓸까? 사람들 말 들어보니까 한 달에 150만 원 정도면 아침에 어린이집 데려다주고 저녁에 7~8시까지 봐주시면서 밥도 먹여주신대.”
“좋아. 돈은 그렇다 치고 도우미 관리는 누가 할래? 그것도 사람 상대하는 건데 신경 쓸 일이 한두 개일까? 맞는 사람 나타날 때까지 면접도 봐야 하고, 좀 괜찮다 싶다가도 종종 기싸움도 해야 하는데 누가 할 거냐고.”
“나는 그냥 그런 옵션도 있다고 이야기한 것뿐이야. 네가 힘들어하는 것 같아서 도우려는 마음이었어. 사람 쓰면 힘든 점도 당연히 많지.”
“도우려는 마음? 연이는 나 혼자 낳았어? 돕기는 뭘 도와, 같이 하는 거지.”
진오는 의도치 않게 아내의 역린을 건드렸다. 민정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더니 급기야 티브이 소리를 압도하기 시작했다.
“당장 내일 연이 준비물이 뭔지는 아니? 내일 무슨 학원을 가야 하는지, 학원 버스는 몇 시에 어디서 타고 내리는지 아냐고. 등하원 도우미 써봐야 문제 생길까 봐 나 혼자 전전긍긍할게 뻔한데 도대체 누구 좋으라고 쓰라는 거야? 월 150만 원으로 그저 열심히 일하는 네 마음 편하자는 거잖아. 그 돈도 다 네가 버니? 그것도 아니잖아.”
아내의 말이 구구절절 옳았기에 진오는 입을 다물었다. 같은 주제로 싸운 일이 한두 번도 아니었고 명확한 해결책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시간을 버텨 아이가 무사히 크기를 바라는 수밖엔 없었다.
민정에게 승진은 특히 민감한 주제였다. 일머리가 좋아 사원에서 대리까지 동기들 중 가장 빨리 승진한 것도 잠시, 출산과 육아 휴직 그리고 본사에서 대전 지사로의 인사이동을 거치며 과장 승진이 한없이 밀렸다.
물론 승진에 큰 욕심만 없다면, 지사는 본사보다 일이 적으면서 월급은 같았기 때문에 만족하는 직원도 많았다. 하지만 민정은 그러한 종류의 사람이 아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대학생이 되듯이 직장인이라면 당연히 한 단계 한 단계 더 높은 곳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좋은 대학을 나온 80년대 생들의 전형이랄까. 어렵다, 어렵다 했어도 80년대 생들이 사회에 진출할 때는 정규직 공채가 주류였고, 크게 일탈하지 않은 명문대생들은 대부분 그 막차를 탔다. 그래서 정규직 공채라는 제도가 사실상 사라지게 된 90년대 생보다는 윗세대와 감성적으로 통하는 부분이 많았고, 상사와 회사의 권위가 통하는 마지막 세대이기도 했다.
“장모님을 우리 집에 모실까? 연이도 5살이라 등하원만 챙기면 되니까 몸이 힘든 일은 별로 없으실 텐데. 어차피 서울에 혼자 계실 바에야 세종 내려오셔서 손주도 봐주시고, 그 대신에 우리가 용돈도 좀 드리면 적적하지 않으시고 좋잖아.”
“나라고 그 생각을 안 했을까. 근데 우리 엄마는 허리 아프시대. 나도 아프시다는데 더 이상 부탁하고 싶지 않고. 게다가 엄마가 얼마나 바쁜 줄 알아? 허리는 아프지만 이모들이랑 등산도 가야 하고, 동네 아줌마들이랑 꽃꽂이도 배워야 하고, 요즘엔 춤도 배우신데. 당신 말마따나 엄마의 의무는 오빠랑 나 키운 거에서 다 끝난 거고, 손주까지 봐줘야 할 의무는 원래 없는 거니까.”
민정의 말에 진오도 수긍했다. 장인어른이 돌아가시고 몇 해가 지났지만 장모님은 외로워 보이기는커녕 제2의 삶을 찾은 듯 생기가 넘쳤다. 민정에 따르면 장모님은 원래부터 자식에게 별 기대가 없었다. 학교에서 시험을 못 보면 민정은 분해서 울었지만, 장모님은 그런 일로 왜 우냐고 조용히 힐난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일까. 민정 역시 장모님이 육아를 도와줄 거란 기대가 없었고 모녀관계는 그럭저럭 균형이 맞았지만, 같이 있으면 늘 아슬아슬해서 옆에서 보는 사람이 더 불안했다. 장모님 이야기를 끝으로 민정과 진오는 모두 말이 없었다. 육아라는 세계는 늘 그랬다. 장기 계획은커녕 단기 계획도 자주 흔들렸고, 부부 모두 최선을 다했지만 민정은 공정하지 않다고 느꼈다.
진오는 세종에 처음 오던 날을 기억했다. 전 날 눈이 많이 오긴 했어도 오후에는 제법 기온이 올라 쌓인 눈이 녹아가는 1월의 주말이었다. 뒷자리에 이제 막 돌을 지난 연이와 민정을 태우고 서울에서 세종을 향하는 길은 생각보다 멀었다. 경부 고속도로를 타고 천안을 지나서도 한참이나 국도를 타고 들어갔다. 서울에서 통근하지 말라고 일부러 교통을 불편하게 만들었다는 풍문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절로 드는 길이었다. 진오는 운전이 길어지자 여행 가는 기분이라고 애써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민정은 도대체 몇 년짜리 여행이냐며 시큰둥했다.
세종에 들어서자 레미콘 차량에서 흘러내린 콘크리트와 채 녹지 못한 눈이 섞여 진창이었다. 차도만큼 넓은 인도엔 한낮인데도 걸어 다니는 인적이 드물었고 공사 현장마다 크레인만 즐비했다. 그들은 공사판에 놀라며 서둘러 신도시의 시범 단지 격인 첫마을의 부동산으로 향했다.
“한 달 안에 이사를 해야 하는데 적당한 전셋집이 있을까요. 청사 공무원들은 주로 어디 사나요?”
부부는 조급한 마음에 질문을 쏟아냈다. 하지만 공인중개사는 서두르지 않아도 된다고 조언했다. 입주 물량이 한 번에 쏟아져 집 주인들은 세입자를 못 구해서 난리라, 지금이라도 당장 입주할 수 있는 전셋집은 널려 있다고 부부의 마음을 안심시켰다. 서울에서 내쳐 달려온 진오와 민정의 흥분이 좀 가라앉자 중개사는 부동산 한 쪽 벽을 다 차지하게 걸어놓은 지도를 가리키며 앞으로 20년간의 세종시 개발 계획을 브리핑하기 시작했다. 중개인이 참고하라며 앞에 놓은 자료에는 알록달록한 지적편집도에 아파트 이름과 세대수, 입주 일자가 빼곡히 적혀 있었다.
“세종시는 환상형 도시로 계획되었어요. 환상적이라서 환상형 도시는 아니고요, 중심을 비운 동그란 도넛 모양이라서 환상형 도시라고 해요. 그래서 간선 도로 모양도 청사를 중심으로 수레바퀴처럼 생겼죠. 청사가 직장이면 세종시내 어디에 살아도, 오가는데 걸리는 시간은 대부분 비슷하단 뜻이에요. 그러니까 서울 같은 도시를 빗대서 중심지를 찾으려는 생각은 여기에선 버리세요. 자꾸 중심이 어디냐, 나중에 더 많이 오를 동네가 어디냐를 물어보는 공무원 손님들이 많은데 다 무의미한 질문입니다. 병은 의사에게, 약은 약사에게, 부동산은 공인중개사에게. 간단한 이치인데 공무원 양반들은 참 남의 말을 안 믿어요.”
진오와 민정은 서울로 돌아와 부동산에서 준 지도를 펼쳐놓고 한참을 쳐다보았다. 중개사의 말처럼 청사와 호수 공원을 6개의 생활권이 빙 둘러싸고 있었고 고리 모양의 간선도로에서 그대로 직진하면 출발한 지점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었다. 지구는 둥그니까 자꾸 걸어 나가면 온 세상 어린이들 다 만나고 오겠다는 노랫말처럼 세종에선 직진만 하면 전 부처 공무원들을 다 만나고 올 것만 같았다.
“그래도 중심지가 있지 않을까? 시내가 없는 도시가 어딨겠어?”
민정이 고개를 갸웃했다. 진오 역시 지도를 이리 돌려보고 저리 돌려보았지만 여기나 저기나 같아 보였다.
“우리가 지도를 본다고 알겠어? 먼저 내려간 동기들한테 어느 동네가 좋은지 한 번 물어볼게.”
진오는 몇몇에게 조언을 구했지만 그들은 각자의 논리로 결국 자신이 분양받은 아파트가 있는 동네를 최고라고 주장했다. 이미 자기 자본이 투하된 사람들의 말은 그만큼 객관적이지 못했다. 부부는 결국 세종에 내려가 몇 년간 전셋집을 전전하다 특별분양을 받아 아파트를 구입했다. 서울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저렴한 분양가 덕택에 가능한 일이었다.
부부는 완전히 정착한 이후에도 도시의 시내를 찾지 못했다. 세종은 생활권마다 주거 단지의 수준이나 상권의 규모가 놀라울 정도로 동일했다. 진오는 가끔 민정에게 물었다. 아직도 세종에 시내가 있을 거라 생각하냐고. 민정은 이 도시를 몰랐을 때의 이야기라며 손사래를 쳤다.
“결국 서울로 돌아가야 해. 여기에는 목표로 삼을만한 곳이 없어. 어디나 똑같다는 건 어디에 있어도 실패한다는 뜻이야.”
어떤 사람은 도시에서 평등과 조화를 확인할 때 편안함을 느끼고, 또 다른 사람은 집중과 발전을 경험할 때 희열을 느낀다. 전자가 정치적 견해를 도시 계획으로 풀어낸 결과라면 후자는 경제적 번영의 자연스러운 부산물에 가깝다. 오랫동안 도시 계획가들은 전자를 추구했지만 대도시의 습속은 여전히 후자에 가깝다. 진오와 민정 역시 서울의 경쟁과 효율을 습득한 상태에서, 갑자기 마주한 평등과 조화라는 세종의 이념이 그저 낯설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