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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도화 Oct 15. 2023

아무리 노력해도 꽃이 아니라 줄기 밖에 되지 못한다니

# 9

 크리스마스는 미자에게 13월의 월급과 같았다. 이브와 당일의 케이크 장사만으로도 평소 한 달 치 매출은 충분히 나왔으니까. 공짜는 아니었다. 대목을 준비하기 위해선 온 가족의 총력전이 필요했다. 미자는 열흘 전부터 각종 재료의 수급을 꼼꼼하게 챙겼고 태평은 회사 근처 을지로 인쇄 골목을 헤집고 돌아다니며 연말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포스터를 구하러 다녔다. 아이들도 빵집 이곳저곳을 플라워 트리와 풍선, 조명으로 꾸미는데 열중했고 케이크를 담을 박스도 미리 접어두었다. 


 첫해에는 모두 신이 났다. 어른들은 예상외의 매출에 놀랐고, 아이들은 어른의 일에 일조했다는 뿌듯함에 기뻐했다. 하지만 세 번째가 되자 아이들마저 크리스마스 대목을 준비하는 모든 과정이 피로하고 식상하게 느껴졌다. 이브 전날 밤 열두시가 넘은 시간까지 케이크 박스를 접고 가게를 꾸미는 일은 꽤나 고됐고, 미자와 태평 역시 지난해보다 매출을 더 올리고 싶은 욕심에 신경이 곤두섰다. 시시껄렁한 말을 건네며 분위기를 밝게 하던 미도 역시 가게를 떠났으니, 냉혹한 노동의 현장은 연말 분위기의 장식이 머쓱하게 냉랭한 기류만 흘렀다. 


 “엄마, 나 내일 친구들하고 놀러 나가게 용돈 좀 주면 안 돼?”


 가게 한가운데에서 케이크 박스를 접던 진현이 어렵게 말을 꺼냈다. 언니의 말에 진원도 귀를 쫑긋 세웠다. 


 “용돈은 무슨 용돈이야! 그리고 내일 어딜 놀러나가? 크리스마스이브에 얼마나 바쁜지 몰라서 그래?”


 조금 전까지 반죽을 치덕대던 미자가 카운터에 앉아 팔목을 제 손으로 주무르며 날카롭게 대답했다. 팔목과 어깨는 파스 자국이 지워지기도 전에 새로운 파스로 다시 덮여 간지러울 지경이었다. 


 미자의 사전에 용돈이란 개념은 존재하지 않았다. 빡빡한 주머니 사정도 마음에 걸렸지만, 이유의 전부는 아니었다. 정기적으로 용돈을 주면 어디에 쓰는지 알 수 없어 불안했고, 아이들이 한 번에 돈을 다 써버릴 것 같아 미덥지 않았다. 하지만 중학생에게 돈 필요한 일은 너무나도 많았다. 친구들과 노래방도 가야 했고, 대학생처럼 몰래 삐삐도 만들고 싶었으며 통이 넓은 청바지나 카세트테이프도 사고 싶었다. 궁여지책으로 참고서나 학원비를 부풀려 타낸 돈의 일부를 빼 돌렸지만 용돈을 충당하기엔 턱도 없었다.


 “열두시 넘어서까지 일하는데 용돈 달라는 게 그렇게 잘못된 일이야? 알바생도 이렇게는 안 부려 먹겠다. 작년에 이모가 했던 몫까지 우리가 다하고 있잖아. 진원아, 너도 한 마디 좀 해 봐.”


 진현은 지원군을 기대하며 동생을 쳐다봤으나, 진원은 언니의 기대와는 달리 고개를 푹 숙였다.


 “먹여주고 길러 줬더니 용돈까지 내놓으라 그러니? 책을 사본다 그래도 시답지 않을 판에 고작 용돈 받아서 친구들하고 놀러 다닐 궁리나 하고 있으니까 더 안 주는 거야! 내년이면 고등학생인데 공부는 안 할 거야? 동생들도 있는데 진짜 한 번 혼나볼래?”


 갑자기 어디에서 그런 힘이 나왔는지 미자는 큰 소리로 윽박질렀다. 좀 조용히 말하라는 태평의 핀잔에도, 미자는 당신도 딱 부러지게 말 좀 해보라고 오히려 받아쳤다.


 “그래서 사람들이 엄마를 싫어하는 거야. 할머니도.. 이모도.. 엄마는 정상적인 대화가 안 되는 사람이야.”


 진현이 중얼거렸다. 고개를 숙여 단발머리로 얼굴을 가린 채였다. 미자는 네가 어른들 이야기에 대해 뭘 알고 떠드나며 혼을 냈다. 태평이 다들 그만하라며 소리를 버럭 지르고 나서야 가게 안은 조용해졌다. 


 진오는 빵 봉지를 손으로 벌려 폭죽 두 개를 넣고 접착면의 비닐을 떼어내 다시 붙이는 작업에 열중했다. 엄마가 화를 내면 무서워 어디론가 숨고 싶었는데 사방팔방이 다 뚫린 빵집에선, 제 일에 집중하는 것 이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었다. 


 진오는 일을 끝내고 고개를 들어 창밖을 바라보았다. 눈이 오길 바랐지만 야속한 까만 하늘엔 바람만 불었다. 언젠가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되면 좋겠다는 바람을 이야기했을 때, 사람들이 외출하기 어려워 애써 만든 케이크가 다 팔리지 않으면 어떻게 하냐고 엄마가 핀잔을 줬던 기억이 났다.


 크리스마스 아침, 머리맡에 변변한 선물을 받아 본 적이 없던 진오는 작은 누나에게 얼마나 더 말을 잘 들어야 산타 할아버지는 선물을 주시냐고 물었다. 진원은 차갑게 대답했다. 우리에게 산타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아무리 말을 잘 들어도 우리 같은 아이들에게 산타는, 아니 엄마 아빠는 선물 따위 주지 않을 거라고. 그러니 너도 이제 기대하지 말라고. 진오는 누나의 말에 조금 울었다. 아이들이 곤히 잠든 밤, 부모가 몰래 방문을 열고 머리맡에 선물을 놓으려다 실 눈 뜬 아이와 눈이 마주쳐 산타의 존재가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는 어느 집 이야기는, 산타가 산다는 핀란드의 마을보다도 더 멀게 느껴졌다.






 크리스마스이브가 밝았다. 진오는 엄마를 도우려는 마음에 학교를 마치자마자 서둘러 빵집으로 달려갔다. 


 “아들, 배고프지? 간식으로 빵 하나 먹어.”


 케이크 빵에 연신 생크림을 바르고 과일을 올리느라 바쁜 미자가 주방에서 고개만 내밀고 소리쳤다. 진오는 고민을 거듭하다 크림빵을 골랐다. 오늘 가장 인기가 없을 것 같은 빵이었다. 쇼케이스 뒤편 평상에는 어제 접어 둔 빈 케이크 박스로 가득했다. 평소엔 진오의 고정석이었지만, 오늘만은 박스에 양보해야 했다. 할 수 없이 매장 한가운데 손님용 의자에 앉아 빵을 먹는데 목이 마른지 진오는 자꾸 헛기침을 했다. 주스 하나만 마시면 안 되냐는 아들의 질문에, 평소 음료수에 인색한 미자도 오늘만은 허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날이 어두워지면서 손님이 밀어닥쳤다. 미리 예약한 생크림 케이크를 찾는 아주머니도, 가벼운 주머니 사정에도 집에 빈손으로 들어가기 민망해 롤 케이크를 찾는 아저씨도, 갑자기 헐레벌떡 뛰어 들어와 종류 상관없이 가장 큰 케이크가 뭐냐며 묻는 청년도 모두 웃는 모습이었다. 미자는 케이크를 사 가는 손님들에게 꼬박꼬박 고맙다며 단팥빵이나 크림빵을 하나씩 덤으로 넣어 주었다. 줄어드는 크림빵을 보며 진오는 괜히 아까 크림빵을 먹었나 조금 후회했다. 


 미자 혼자서는 도저히 힘에 부치는가 싶을 무렵, 부리나케 퇴근한 태평이 도착했다. 양복을 갈아입지도 못한 채로 손님을 대하는 모습이 영 어정쩡했다. 자매는 놀러나간 모양인지 끝내 빵집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 케이크 박스가 줄어들수록 진오의 자리는 넓어졌다. 평상에서 드디어 다리를 쭉 펼 수 있게 되었을 무렵 진오는 자기도 모르게 깜빡 잠이 들었다. 불편한 자세의 설익은 꿈에서도 산타는 끝내 등장하지 않았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진오가 눈을 떴을 땐 두툼한 담요가 덮여져 있었고, 케이크 박스는 몇 개 남아있지 않았다. 


 “엄마, 나 배고파.”


 가족 모두가 변변한 저녁식사를 하지 못한 터라 허기가 졌다. 남아 있는 반찬도 없고, 어딘가 나가서 먹고 돌아오기엔 춥고 늦은 시간이었다. 미자는 밥 대신으로 쇼케이스 한구석에서 홀케이크를 꺼내려다 마음을 바꿔 조각 케이크 몇 개를 꺼냈다. 진오는 초라도 꽂고 싶었지만 엄마가 괜히 화를 낼 것 같아 소망을 입 밖에 내진 않았다. 


 모두 배고팠는지 케이크는 순식간에 없어졌다. 가게 한구석에 틀어 놓은 티브이에서는 크리스마스이브를 맞은 광화문과 신촌, 강남역을 차례로 비췄다. 거리거리마다 불은 반짝거렸고 캐럴은 연신 흘러나왔다. 길에 쏟아져 나온 가족과 연인들은 영하의 날씨에도 따뜻해 보였다. 


 “엄마, 나도 다음 크리스마스 땐 저런 데 한 번 가보고 싶어.”


 잠에서 덜 깬 지루한 얼굴로 진오가 말했다.  


 “오늘 같은 날은 차만 막히고, 밥 한 끼 먹으려고 해도 한참을 기다려야 해. 이런 날은 집에 있는 게 최고야. 눈이 안 왔기에 망정이지, 눈까지 왔어 봐.. 어휴, 상상하기도 싫다.”


 태평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자 미자는 퉁퉁 불어 눈으로 봐도 핏줄이 파랗게 튀어나온 왼쪽 종아리를 연신 주무르며 핀잔을 줬다. 


 “언제 한 번 데려가 보기나 했고? 그놈의 집이 최고다 타령은 끝도 없어요. 아들은 공부 열심히 해서 성공하면 나중에 좋은 곳 놀러 가. 엄마, 아빠는 돈 벌어야 해서 저런 데 놀러 갈 시간이 없어.” 


 “왜 엄마까지 돈을 벌어야 하는데? 다른 집은 아빠만 회사 나가던데.” 


 “엄마는 지금보다 더 좋은 동네의 아파트로 이사 가서 큰 누나, 작은 누나, 진오 각방 쓰게 해 주고 싶어. 셋 다 좋은 대학도 보내려면 학원비도 많이 들고 나중에 등록금까지 대주려면 지금부터 남들보다 성실하게 일해야 해. 엄마, 아빠가 토양을 닦아서 든든한 뿌리가 되면 그 바탕 위에서 진오랑 누나들이 튼튼한 줄기가 되고, 또 그다음 세대에서는 우리 가족도 찬란한 꽃을 피울 수 있을 거야. 특히 진오는 우리 집 장남이니까 누나들보다 더 책임감을 가져야 해. 그러니까 지금부터 공부 열심히 하고 좋은 대학 가서 나중에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알았지?”


 진오는 가문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태어난 사람이 된 것만 같아 저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 하지만 자신이 아무리 노력해도 꽃이 아니라 줄기 밖에 되지 못한다니 그건 좀 실망이었다. 열심히만 하면, 아니 잘하기만 하면 내가 꽃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미자가 정한 줄기와 꽃의 경계는 뭘까? 진오는 미자의 ‘뿌리-줄기-꽃’ 3단계 이론에 대해 궁금한 게 너무나도 많았지만 이제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가게를 정리하자는 태평의 말에 정작 아무것도 묻지 못했다.


 “오늘 당신 한 달 치 월급 벌었다.”


 매출 전표를 모두 확인한 미자가 신이 난 목소리로 말했다.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 콧노래까지 흥얼거릴 정도였다. 산타도, 선물도, 제대로 된 케이크도 없는 크리스마스였지만 진오도 덩달아 기분이 좋았다. 부부는 가게를 청소하고 집으로 돌아갈 채비를 마쳤다. 태평이 간판의 불을 끄고 마지막으로 가게를 덥히던 동그란 가스난로의 불을 껐다. 취지직-소리와 함께 바알간색으로 달아올랐던 난롯불이 꺼지자 12월의 한기가 냉큼 밀려들었다. 미자와 태평 그리고 진오는 모자를 뒤집어쓰고 외투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었다. 종종거리며 걸어도 지친 몸에서 열기는 솟아나지 않았다. 밤늦은 서울 변두리 동네의 크리스마스이브는 티브이에 나왔던 번화가의 모습이 무색할 정도로 흔한 전구 장식도, 캐럴도 없이 고요했다. 거리에는 오직 셋의 걸음 소리와 가끔 내 뿜는 하얀 입김만이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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