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제도화 Oct 15. 2023

어차피 책임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도망갈 사람

#10

 다면 평가(多面評價). 인사의 공정성과 객관성을 확보하기 위해 상급자, 동료, 하급자의 평가를 종합하는 제도. 상급자에 의한 평가로만 승진을 줄 세우기 한다는 비판에 대응하기 위해 민간의 제도를 공직사회에 차용했다. 승진자는 상급자에 의한 근무평정 점수와 상하급자 및 동료들의 다면 평가 점수를 합쳐 선발한다. 승진권에서 경합하는 경쟁자들의 근무평정은 비슷한 수준이기 때문에 다면 평가 결과는 전체 순위를 뒤집을 만큼 영향력이 컸다.


 6개월마다 한 번, 다면 평가가 끝나면 부처 내에는 삽시간에 이런저런 소문이 퍼졌다. 공식적으로 다면 평가 결과는 오로지 자기 자신밖에 알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루만 지나면 복도통신과 메신저를 통해 전체 등수가 조합되었다. 국장급에선 누가 몇 등을 했으며, 과장급에선 누가 꼴찌를 했는지 등의 평가 결과와 당사자의 평판이 결합된 정보는 호사가들의 입맛을 만족시키는 기가 막힌 안주였다.


 정 과장은 그토록 살벌한 다면 평가에서 꼬박꼬박 한자리 등수 안에 들었다. 상하급자와 동료 평가가 모두 높게 나오는 신기한 타입이었는데, 같이 일을 해 본 사람들은 그 이유를 금방 알아차렸다. 머리 회전은 빨랐지만 알고 있는 모든 걸 하급자한테 쏟아내지 않았고, 상급자의 무리한 요구는 부드럽게 받아들이되 탈 나지 않을 만큼만 실행했다. 상대의 실수를 헤집지 않았고 쓸데없이 일을 벌이지도 않았다.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만큼 정 과장은 동기들보다 승진이 빨랐고, 핵심 보직인 주무과장을 오래 한 터라 별 이변만 없다면 다음 인사 시즌에 국장급 승진은 따놓은 당상이란 평가를 받았다. 덩달아 그와 같이 일하게 된 진오에 대한 평판도 껑충 올라갔다. 그는 변한 게 없는데 자리가 사람을, 아니 평가를 만들었다. 정 과장이 밀어주는 한 진오 역시 내년 상반기 정기 인사에서 무난히 승진할 거라는 예측이 지배적이었다.


 물론 모두가 정 과장을 좋게만 보는 건 아니었다. 당장 진오의 동기인 고 사무관부터 정 과장이라면 학을 뗐다.


 “정 과장님 평소에는 일 잘하고 사람 좋지. 근데 그거 아냐? 중요한 순간 되면 안면몰수하는 거. 몇 년 전에 내가 그 양반 밑에서 일할 때 협회 애들이 찔러서 BH에서 감사 받는데 자기가 지시한 적 없다고 딱 잡아떼더라.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인 거 다 알면서도, 본인이 지시 안 했다니까 BH에서도 방법이 없잖아. 그래서 결국 나만 징계 받았잖아. 장관 표창으로 징계 지운다고 내가 그 이후에 얼마나 고생했는지 아냐.”


 진오는 고 사무관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다. 어차피 책임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도망갈 사람들만 가득한 이곳에서, 그게 정 과장만의 단점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으니까. 그보다는 동기가 자신을 견제한다는 생각에 오히려 묘하게 기분이 좋았다. 사무관 생활이 10년이라면 앞의 8년보다 뒤의 2년이 결국 더 중요하다는 선배들의 말이 떠올랐다. 말과만 전전하던 지난날보다 승진이 얼마 남지 않은 지금, 정 과장 같은 에이스와 함께 하게 된 자신의 행운에 사무실에 앉아만 있어도 절로 콧노래가 나왔다. 야근을 해도 즐거웠고 회식을 해도 넙죽넙죽 술이 들어가는 날들이었다. 






 누가 왔는지 복도 쪽에 앉은 직원들부터 차례로 일어나 웅성웅성 인사를 했다. 파도가 지평선부터 해안가로 밀려오듯 모든 사람들을 차례로 경유하고 나서야 사무실 가장 안쪽에 앉은 진오의 순서가 되었다. 모니터에 눈을 두고도 귀는 사람들의 움직임을 쫓고 있던 터라 그는 적당히 바쁜 척을 하면서도 어색하지 않은 타이밍에 일어설 수 있었다. 


 “이 사무관님, 인사하세요. 스페인 대사관 2년 파견 나가셨다가 복직해서, 우리 국에 발령받은 도 사무관님이세요.”  


 허 주무관이 도 사무관 곁에서 인사를 주선했다. 진오는 그가 왜 옆에 붙어있나 의아했지만 원래 친분이 두터운 사이겠거니,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반갑습니다, 이 사무관님. 신입 사무관 때 우리 본 적 있죠?”


 진오는 모른다고 하면 실례일까 싶어 그제야 그녀를 꼼꼼히 살폈다. 하얀색 블라우스에 무릎 선에 딱 떨어지는 하늘색 스커트, 초록색과 흰색이 적절하게 믹스된 스카프가 보통 맵시가 아니었다. 단발머리에 키도 크고 호리호리해서 얼른 봐서는 나이조차 잘 가늠이 되지 않았는데, 아무리 자세히 살펴도 언제 봤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예.. 잘 지내셨죠. 반갑습니다.”


 “이 사무관님 신입 때가 엊그제 같은데 국 총괄이라니 시간 참 빠르네. 앞으로 잘 부탁해요. 우리 정 과장님은 어디 가셨나?” 


 도 사무관은 진오에게 눈을 떼고 정 과장의 자리를 살폈다. 허 주무관이 날름 대답했다.

 

 “과장님 오늘 출장 가셨어요. 이 사무관님, 과장님 오늘 안 들어오시죠?”


 “모르겠는데요.”


 허 주무관이 도 사무관 앞에서 자신을 정 과장의 비서쯤으로 취급하는 것 같아 기분이 나빴던 진오는 일부러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괜찮아요. 모르는 분도 아니고 따로 연락드리지 뭐. 다들 신경 쓰지 마세요. 허 주무관, 다음은 국장님 방으로 갈까?”


 “예, 예. 그러시죠. 이쪽입니다.” 


 도 사무관에게 돈이라도 빌린 것처럼 쩔쩔매는 허 주무관의 모습은 꽤나 낯선 광경이었다. 꼬장꼬장한 곽 과장에게조차 농담을 빙자해 하고 싶은 말을 다하는 사람의 태도가 맞나 싶을 정도로.


 김 국장의 방은 진오의 자리 바로 뒤편이었기 때문에 자리에 앉아서도 그의 귀는 방으로 향했다. 덕담이나 몇 마디 나누고 말겠지라는 예상과는 달리 그들은 한참이 지나서도 방을 나오지 않았다. 진오는 무슨 대화를 나누는지 듣고 싶어 조용히 집중해 보았지만 방문을 닫아 말소리는 들리지 않았고, 뭐가 그리 좋은지 박장대소하는 세 사람의 웃음소리만이 간간이 들려왔다. 


 다음 날, 진오는 출근하자마자 허 주무관을 찾았다. 시간 될 때 옥상에서 커피 한잔하자는 진오의 말에 허 주무관은 일이 바쁘다며 주저했다. 사람들이 이른 점심 약속이 있다며 하나둘씩 자리에서 일어나자 그는 그제서야 진오에게 옥상으로 가자는 사인을 보냈다.  


 “잠깐 커피 한잔하자는데 누구 눈치를 그렇게 봐요? 혹시 곽 과장님?”


 진오가 황당한 표정으로 묻자, 허 주무관은 허공에 손을 휘휘 내저으며 말했다.


 “내일모레 퇴직하는 여우 눈치를 왜 봅니까. 조용한 산골을 휘저으러 들어온 호랑이 선생 눈치를 봐야지.”


 “호랑이가 누군데요?”


 진오의 질문에 허 주무관은 몰라서 묻냐는 뉘앙스로 어깨를 으쓱했다. 


 “이 사무관님은 언제 호랑이가 되시려나. 그나저나 무슨 일이세요?”


 “호랑이 선생! 도 사무관님 말이에요. 간부들하고도 친해 보이고, 외모도 공무원스럽지 않고.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 저를 잘 아는 것처럼 말하고. 기분이 묘한데요. 어떤 사람이에요?”


 진오의 질문에 허 주무관이 실실 웃으며 전자 담배를 꺼내 물었다. 타닌과 민트 냄새가 묘하게 섞인 액상의 향기가 공기를 떠돌았다.


 “도 사무관님한테 관심 있어요? 애인 하나 만들어보시게? 큭큭.”


 “아이, 농담하지 마시고. 저보다 10살은 더 많을 텐데 애인은 무슨 놈의 애인. 진짜로 궁금해서 그래요.”


 “도 사무관님 입사 때부터 유명했죠. 한예종 졸업한 피아니스트였다는데, 갑자기 서른 넘어 무슨 결심을 했는지 노량진에서 공부해서 7급 공채로 들어왔어요. 문제는, 공무원 답지 않게 세련된 외모였다는 거죠. 그 양반이 지금은 나이 들어서 좀 그래 보여도 젊었을 땐 태가 진짜 살아 있었거든요. 도 사무관님 짝사랑 안 해 본 남자 직원 없다는 소리도 파다했고요. 그런 여직원이 술자리란 술자리는 다 어울려 다니면서 이래저래 윗 사람들하고 친분을 쌓았으니, 당연히 승진도 빨랐고요. 그리고 유명한 인사 마피아 출신이기도 하고 아버지가 대기업 임원 출신이라서 집에 돈도 좀 있는 것 같고. 여러모로 무서운 양반이죠.”


 “결혼은요?”


 “진짜 애인 만드시려고?” 


 “아, 쫌.”


 “이혼했을걸요. 여하튼 지금은 법적으로 솔로.”


 결혼 여부는 괜히 물었다 싶었지만, 그래도 진오는 말이 나온 김에 궁금한 건 다 묻기로 했다.   


 “인사 마피아는 뭐예요? 어디서 들어 본 것 같긴 한데.”


 “인사과 출신들이 돌아가면서 승진 잘 되는 요직 자리에 서로 서로 꽂아주는 거예요. 하위직 인사에서는 인사과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으니까 사람들한테 대접받고 다니고, 고위직들은 따로 관리해서 자기들 함부로 못 건드리게 하고요. 지난달에 퇴직한 2차관 있죠? 그 양반이 인사 마피아들 방패막이를 오래 했는데, 앞으로 그런 역할을 할 고위직을 물색하고 다닌다는 소문이 파다해요.”


 “인사 마피아는 어떻게 되는 건데요?”


 “인사 마피아 하시려고?” 


 “아니요, 문제가 있는 것 같아서요. 남들은 승진 자리 가려고 말과에서부터 기를 쓰면서 열심히 노력하는데 인사 마피아들끼리 끌어당기는 게 공정한가요.”


 허 주무관은 오랜만에 재미난 말을 들은 사람처럼 박장대소를 했다.


 “아니, 그럼 고시 출신들은 무조건 본부에서 시작하고 7급이나 9급 출신들은 소속기관에서 시작하는 건 공정해요? 고시 출신들은 숨만 쉬고 있어도 3급은 달고 퇴직하는데 9급 출신들은 평생 5급 다는 게 소원인 건 공정합니까.”


 “그거랑 그거는 좀 다르죠.”


 “원래 인간이 자기한테 유리하면 본인이 잘해서 얻은 거고, 불리하면 불공정한 결과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서있는 위치가 그래서 중요한 거죠.” 


 대화가 끝나고 냉랭한 기운이 감돌았다. 인사 마피아에 끼지도 못하면서 왜 저렇게 열을 내나 진오는 황당했지만 그래도 분위기를 전환하고 싶었다.


 “시간도 늦었으니까 점심이라도 같이 하시죠.”


 “선약 있어서 얼른 가봐야 해요. 그리고 점심시간에 직원들한테 밥 좀 사고 다니라니까 말을 안 들으시네. 그러니까 다면 평가 등수가 그 모양이죠.”


 허 주무관은 끝까지 진오를 타박했다. 진오는 지금이라도 약속을 잡아 볼까 했지만 이미 12시가 훌쩍 넘은 시간이라 금세 포기했다. 그는 서무 직원의 책상을 뒤져 구내식당 식권 한 장을 찾아냈다. 11시 반부터 밀려든 사람들이 한차례 빠진 덕분인지 식당은 한가했고 밥은 맛있었다.


 “너는 불쌍하게 밥을 혼자 먹고 다니냐, 연락을 하지.”


 식사를 마친 고 사무관이 구내식당을 나가다 홀로 밥을 먹는 진오를 발견하고는 큰 소리로 말을 걸었다. 옆에 서 있던 일행들 역시 진오에게  어색한 인사를 건넸다. 그는 입에 넣은 밥을 다 씹지도 못한 무방비 상태에서 입을 슥슥 훔치고는 어정쩡하게 일어섰다.  


 “점심 먹을 사람 없으면, 나한테 연락 해. 혼자 궁상 떨지 말고.” 


 “일이 많아서 오늘만 혼자 먹는거야.”


 맛있게 먹으라는 말과 함께 고 사무관의 일행이 떠났고 진오는 홀로 남았다. 또 아는 사람을 마주칠까 봐, 그는 남은 밥을 최대한 빨리 입에 욱여넣고 서둘러 식당을 나섰다.

이전 09화 아무리 노력해도 꽃이 아니라 줄기 밖에 되지 못한다니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