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오랜만에 연이가 일찍 잠든 밤. 진오는 티브이를 켜놓은 채 리모컨으로 채널만 오르락내리락, 민정은 소파에 앉아 핸드폰에 열중하는 평온한 시간.
“당신이라면 어떻게 할 것 같아?”
민정이 한숨을 내쉬며 핸드폰을 내밀었다. 맘 카페 글이었다. 청사 어린이집을 다니는 아이가 같은 반 친구에게 얻어맞았다. 아이 엄마가 속상한 마음에 이리저리 알아보니, 하필 때린 아이의 아버지는 남편보다 직급이 높은 같은 부서의 공무원. 때린 아이의 부모에게 연락을 하려다 혹시 불이익이 있을까 어찌해야 할지 의견을 물으니, 남편은 아이들끼리 치고받고 싸울 수도 있는 거지 그런 문제로 연락을 하냐며 타박만 한다는 글이었다.
“아무리 직급이 높아도 애가 많이 다쳤으면 사과도 받고 보상 요구도 해야지. 근데 조금 다친 거면 그냥 넘어가야 하지 않나. 서로 몇 십 년을 얼굴 보고 살아야 하는 관계인데 괜히 서로 피곤해지잖아.”
“많이 다치고 조금 다치고의 기준은 뭔데? 전치 4주?”
“딱 부러진 기준이 어딨겠어. 조금 까진 거면 넘어가고, 어디가 부러졌으면 그래도 이야기해 봐야지. 당신이라면 어떻게 할 것 같은데?”
수세에 몰린 진오가 민정에게 질문을 돌렸다.
“나라면, 연이에게 어떻게 하고 싶냐고 물어볼 것 같아. 그리고 하고 싶다는 대로 해줄 거야. 사과를 받고 싶다고 하면 사과를 주선할 거고, 더 이상 그 친구를 보고 싶지 않다고 하면 반을 옮기거나 아예 어린이집을 바꿀 거야. 아이는 자기 마음만 고요하게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이 있으니까. 어른은 몰라도 아이는 자기만의 정답을 알 거야.”
“최종환 의원실, 박정호 비서관입니다.”
모르는 번호의 전화에서 날선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진오는 반사적으로 최대한 공손하게 전화를 받았다. 하지만 상대는 초면이라고 해서 예의를 차리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입법조사관한테 자료를 받았는데. 여당 간사가 낸 법안을 주무 부처에서 반대하다고. 참, 이거 황당해서 말이 안 나오네.”
제풀에 제가 지칠 때까지 말하도록 두는 것이 낫단 생각에 진오는 잠자코 이야기를 듣기만 했다.
“보조금을 하도 여러 단체가 나눠 가지니까 통합관리단체 하나 만들어서 깔끔하게 관리하자는 건데 도대체 뭘 신중하게 검토하겠다는 건지도 모르겠고. BH랑도 이야기 다 된 법안이고. 아니 뭐, 국회랑 청와대 위에 공무원 있어요? 요즘도 이런 사람들이 있네. 하여간 우리 보좌관님이 내일 과장 좀 보잡니다. 모시고 올라오세요. 3시, 의원회관.”
박 비서관은 제 할 말이 끝나자 상대방의 답을 듣지도 않고 전화를 툭 끊었다. 진오는 재빨리 정 과장에게 상황을 보고했다.
“과장님. 내일 의원실 좀 가셔야 할 것 같습니다.”
“최 의원실 땜에 그러지? 안 그래도 방금 청와대에서 연락받았어. 자기네랑 여당 간사가 협의해서 낸 법안을 부처에서 반대하면 어쩌자는 거냐고. 아니, 그러면 미리 우리한테 이야기라도 해주든가. 일단은 내일 대비해서 자료 똑바로 준비하자. 깨질 때 깨지더라도 반대 의견은 내 봐야지. 회람 돌려서 관련 단체들한테 받은 반대 의견 정리하고, 통합관리단체 만들면 운영비나 위탁사업비같이 쓸데없는 예산 매년 얼마나 들어가는지 표 좀 붙이고. 나중에 정산 과정에서 책임 소지가 생길 수도 있다고 부작용도 좀 곁들여서 쓰고..”
정 과장의 상세한 지시가 이어졌다. 진오는 업무수첩에 그의 지시를 꼼꼼하게 받아 적으며 물었다.
“국장님한테도 빨리 보고드려야 하지 않을까요? 최 의원실에서 난리 났다고.”
정 과장이 씩 웃었다. 진오에게 가까이 오라는 손짓을 하며 목소리를 한껏 낮췄다.
“김 국장이 커버를 안 치니까 우리한테 다들 난리지. 그 양반 서울사무소에 짱 박혀서 의원실 전화 받으면 실무자랑 의사소통이 잘 안된 것 같다느니, 정확하게 알아보고 연락 주겠다느니 하면서 시간이나 끌고 있을걸. 나중에 어떤 방향이든 우리가 다 정리해서 상황이 클리어 해지면 장관한테 보고나 하겠지. 그래도 자료는 작성해서 보여드려. 뭐가 문제인지는 알고 있어야 할 거 아니야.”
다음 날, 국회 의원회관. 정 과장과 진오는 약속보다 일찍 도착했지만 박 비서관은 자리를 비우고 약속 시간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그들은 비서가 안내한 간이 의자에 앉아 그를 하염없이 기다렸다.
“아이고~ 늦어서 죄송합니다. 여기가 과장님이신가?”
박 비서관. 건들대는 걸음걸이에 짧은 머리. 멀리서 봐도 티가 날 정도로 큰 명품 로고가 가슴에 새겨진 셔츠를 입고 있었지만 배가 많이 나온 탓인지 태가 나지 않는 외향. 전형적인 책상물림들과는 결이 다른 사람임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 뒤로, 박 비서관보다 연배가 높아 보이는 한 사람, 조 보좌관. 정 과장과 조 보좌관은 구면이었다.
“정 과장님을 여기서 뵙네요. 아직도 과장이에요? 정 과장님 능력이면 벌써 국장 달았을 줄 알았는데.”
조 보좌관이 정 과장에게 악수를 청했고, 정 과장도 ‘최 의원실에 계신 줄 알았으면 먼저 연락드릴 걸 그랬다’며 화답했다. 통성명과 명함을 주고받은 후 자리를 잡자 진오는 어제 작성한 보고서를 조 보좌관과 박 비서관에게 건넸다. 정 과장이 설명을 시작하려는데 보고서를 대충 슥슥 훑어보던 박 비서관이 선수를 쳤다.
“됐고요. 저희가 과장님한테 설명 들으려고 오늘 뵙자고 한 게 아니잖아요. 여당 간사가 낸 법안을 주무부처에서 반대하는 콩가루 집안 이야기를 하자고 부른 거지.”
“저희가 아예 반대하는 게 아니라 관련 협, 단체들이 통합관리단체를 받아들일 분위기가 좀 마련될 때까지 신중하게 시간을 갖자는 취지로..”
진오가 항변하자 박 비서관이 책상을 손으로 내리치며 말을 끊었다.
“아니 그게 언제냐고. 여기 있는 분들 자리 옮기고, 후임자 오고, 회기 지나서 법안 폐기되고, 다시 설득하고. 시간만 끌면서 하지 말자는 이야기지. 공무원 상대를 얼마나 많이 하는데 우리를 너무 말랑하게 보시네.”
“방금 전에 김 국장님하고도 통화했어요. 국장님도 굳이 반대할 이유는 없다고 하시던데. 보니까 과장님이 버티시는 거네. 이래봐야 국회에서 법안 통과시키면 막을 방법도 없으시잖아요. 내일모레 상임위에서 굳이 우리 영감하고 장관님이 얼굴 붉힐 일 만들지 말자는 취지로 지금 부탁드리는 거지, 선택권을 드리는 게 아니에요. 찬성하시든 말든 우리는 우리대로 밀고 나갑니다.”
험악한 분위기를 잡는 게 박 비서관의 일이라면, 조 보좌관은 잠자코 있다 카운터펀치를 날리는 역할이었다. 수세에 몰린 정 과장이 현실론을 꺼냈다.
“굳이 법에 안 넣고도 연말에 예산 편성해서 내년에 바로 보조금 통합관리단체 만들면 그만이지 않습니까. 법 개정 사항도 아닌데 굳이 이러실 이유가 있습니까.”
“법에 근거가 없으면 단체가 언제 없어질지 모르잖아요? 아닌 말로다가 우리 영감이 다음 선거에서 떨어지면 내가 거기 사무총장 자리에 가야 할지도 모르는데, 그 사이에 없어지면 안 되지. 따박따박 월급 나오는 공무원 하고는 상황이 달라요, 우리는.”
조 보좌관과 박 비서관이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다. 공간과 공기를 지배한 거칠고 무례한 웃음이었다. 박 비서관이 마지막 경고를 날렸다.
“긴 말 안 합니다. 의견 안 바꾸시면 이번 국정감사 때 여당이 야당보다 더하다는 소리 한 번 나오게 해드릴게요.”
회의인지 협박인지 모를 면담이 끝났다. 서울역으로 향하는 택시는 퇴근시간과 겹친 탓인지 마포대교에서 도통 움직이지 않았다. 정 과장은 뒷좌석에 앉아 창밖을 골똘히 바라보았고, 조수석의 진오는 내려가는 KTX 표를 구하기 위해 코레일 앱을 무한 새로 고침 했다. 찰나의 경쟁을 거쳐 예매는 성공했지만 그가 얻은 2개의 좌석은 불행히도 나란히 붙은 옆자리였다. 혹여 다른 취소표가 나올지 몰라 진오는 포기하지 않고 핸드폰을 붙잡고 있는데, 생각을 끝낸 정 과장이 나지막이 말했다.
“법안 의견 수정하자. 수용으로 바꿔.”
정 과장은 진오의 대답은 듣지도 않고 작심한 듯 전화를 걸었다.
“형, 조 보좌관 만났어. 겁나게 깰 줄 알았는데 신사적이던데? 어어.. 수용 의견으로 바꿀게. 김 국장이 이미 오케이 했는데 내가 왜 버텨. 어어.. 내용은 말도 안 되지, 근데 그 이야기 지금 해봐야 소용없고. 어어.. 걔들 의도 뻔하지, 자기 식구들 자리 만들어서 꽂으려고. 어어.. 장관님 보고는 김 국장님이 다시 할 거야. 어어.. 형은 BH에서 언제 들어와? 언제 소주 한잔해야지.”
진오는 어안이 벙벙했다. 무너지기엔 너무 이른 타이밍 아닌가? 아직 의원실 한 번 다녀온 것 밖에 없는데. 야당이 물어뜯고 여론전으로 가면 꼭 불리한 게임만은 아닌데. 수많은 의문이 들었지만 택시 안은 긴 말을 하기엔 적절치 않았다.
러시아워를 뚫고 도착한 서울역 플랫폼은 열차의 엔진 소리, 출발하고 도착한다는 안내방송, 들뜬 사람들의 목소리와 캐리어 바퀴 소리가 겹쳐 매우 시끄러웠다. 진오는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 소음을 뚫고 거의 소리를 지르듯 물었다.
“과장님, 이렇게 쉽게 수용할 거면서 처음에는 왜 신중 검토 의견으로 내신 겁니까?”
정 과장은 진오의 질문에 걸음을 멈췄다.
“조 보좌관 이야기 못 들었어? 국장이 반대 안 한다잖아. 상명하복! 공무원이 까라면 까야지. 게다가 관리하는 단체 하나 늘어나면 우리도 좋아. 지금은 쟤들이 기웃거려도 결국 나중엔 퇴직 관료 몫이 될 수도 있어. 우리도 언제까지 현직은 아닌데 나중도 생각해야지. 꼭 나쁜 일은 아니야.”
“저렇게 대놓고 낙하산 태우겠다는 단체는 꼭 사고 치던데요. 나중에 문제 생기면 우리가 관리 책임이니 뭐니 완전히 뒤집어쓰는 거 아닙니까.”
“우리가 왜 책임을 져. 국장이 하라고 지시했는데. 우린 처음부터 반대했고 기록에도 많이 남겼잖아. 입법 조사관한테 반대 의견도 냈고, 국장한테 정리해서 보고도 했고, 또 오늘 의원실도 다녀왔고. 실무자가 뭘 얼마나, 어떻게 더하겠어. 이제부터 문제 생기면 하라고 지시한 사람들이 책임져야지. 사무실로 돌아가서 작성한 자료, 날짜, 보고 시기, 면담 일정 자세하게 정리해서 가지고 있어. 나중에 진짜 문제 되면 결국 그 기록이 우리를 살린다, 알았지?”
정 과장이 진오의 어깨를 툭툭 몇 번 치고는 빙긋 웃으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서울에 올라올 때보다 한결 가벼운 걸음이었다. 진오는 앞서가는 정 과장의 뒤를 열심히 뒤쫓았다. 그와 나란히 앉는 옆자리가 오늘만은 싫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