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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니나 Oct 30. 2024

외로움 너머로 한 걸음

독일에서 친구 만들기

사실 지난 몇 주간 나의 상담 주제는 ‘친구 만들기’였다. 그러나 용기를 내서 우정을 쌓아갈 기회가 거의 없었고, 또 작게나마 시도했던 모든 것들이 매주 실패만 반복했기 때문에 이 주제를 애써 모른 척하며 피하고 싶었다. 그래서 오히려 다른 이야기들로 글을 채웠음을 먼저 고백하고 싶다. 또 처음에는 잠깐 스쳐 지나가는 줄 알고 조마조마했던 만족감과 행복감이 이제는 아주 낮은 곳에서 사라지지 않고 안정감 있게 머물러 있다는 것도 적어두고 싶다. 


온몸이 가렵고 벌레가 기어 다니는 것만 같아 내장까지 긁어내고 싶을 정도로 괴로웠던 소양증은 거의 사라졌다. 불면증은 여전히 오락가락하고, 불안감에 견디기 어려운 순간이 가끔 있었다. 그러나 지난 한 달 동안 공황 증상은 없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변화는, 감정적으로 무너지지 않고 한 달 이상을 버틴 것이다. 생리 주기가 될 때면 호르몬과 불안감이 겹쳐 꼭 모든 걸 망가뜨려버리고 싶은 마음이 들어 바닥 끝까지 내려가곤 했는데, 적어도 이번 한 달 동안은 그런 증상이 없었다. 제법 내 일상이 정상 궤도로 자리 잡는 중이라는 증거다.


물론 아직도 갈 길이 멀지만, 행복해지기로 결심한 만큼 나는 최선을 다해 행복해지고 싶다. 나에게는 '아무리 괴로울지라도 집요하게 나를 탐구하고, 변화시키고자 하는 의지'가 있다. 그러니 악착같이 느긋해지고, 온 힘을 다해 편안해질 것이다.




선생님은 내게 친구가 인생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여러 번 이야기해 주셨다. 지금 상담을 받으며 모든 감정을 털어놓는 것처럼, 일상 속에서 진솔한 마음을 나누고 안정감을 주는 관계가 필요하다고 했다. 나도 정말 그런 친구를 만들고 싶다. 또, 내 이야기를 속 깊이 나누고 자주 만나고 싶은 사람이 독일 어딘가에 있기를 바란다. 하지만 한국에서 깊이 사귀었던 내 친구들은 모두 여전히 한국에 살고, 독일에서는 아직 그런 친구를 만나지 못했다.


도대체 왜 나는 친구를 사귀기가 이렇게 어려울까? 


상담을 통해 함께 고민해 본 결과, 가장 큰 이유는 자신감 부족이었다. 어린 시절 나는 친구가 되고 싶은 사람에게 먼저 다가갈 줄 아는 아이였다. 어떤 기간에는 가장 친한 친구와만 좁고 깊게 교류하기도 했지만, 적어도 항상 마음을 나눌 친구는 있었다. 그러나 독일에 오고 나서 상처를 자주 받았던 것 같다. 누군가를 만나고 마음을 주기 시작할 즈음, 자꾸만 상대가 한국이나 본국으로 돌아가거나 자연스럽게 연락이 끊기는 일이 생겼다. 이런 일이 반복되자 나는 이별이나 거절이 무서워 한 걸음 내딛을 용기를 쉽게 내지 못했고, 서로가 마음을 열어야 우정이 완성되는데도, 나는 늘 거기서 한 발짝 멈추는 버릇이 생겼다.


사실 몇 년 전에도 큰 용기를 내어 새로운 관계를 시도했다가 깊은 상처를 받은 경험이 있다. 당시 나는 직장 내 괴롭힘의 피해자로, 외로운 싸움 속에서 마음을 나눌 친구가 간절히 필요했다. 그래서 온/오프라인 모임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하지만 이전에 겪었던 배신과 상처들 때문에 사람들을 쉽게 믿지 못했고, 나 자신을 드러내기를 주저했다. 하고 있는 일이나 생활에 대한 이야기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흘러가는 대화, 요즘의 화젯거리 정도로 소소하게 즐기는 관계를 원했다. 그러나 나의 방어적인 대화에서 상대는 어떤 즐거움도 느끼지 못했고, 결국 그때 만나던 사람들 모두와 교류가 끊기고 말았다. 나조차도 자신에게 실망한 그 시간들이, 이제와 생각해 보면 참 이상하게 느껴진다.




나는 왜 그토록 나를 숨겼을까? 


이유는 간단했다. 진짜 나를 드러낼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내가 느끼기에 ‘나’는 너무 부족하고 보잘것없는 존재였다. 형편없는 모습을 알게 되면 결국 다들 실망하고 떠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결국 상대들은 오히려 내가 '내 진짜 모습을 보여주지 않음'에 실망하고 떠났다.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고, 부족한 모습 그대로도 매력적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 지금은, 이게 좀 더 ‘정상적인 흐름’이라는 걸 안다. 백 번 성공한다고 해서 완벽해지는 것도, 백 번 실패한다고 해서 형편없어지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다. 오히려 더 훌륭한 건 백 번 도전했다는 것이고, 백 번 실패했다면 그만큼 배운 것이 있다는 사실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니 나는 나름의 단점과 장점을 가진 사람이고, 완벽하지는 않지만 괜찮은 사람이다. 그리고 이런 나를 이해하고 좋아해 주는 사람도 분명히 있다.




친구를 사귀는 것이 마치 인생의 짝을 찾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성격도 맞아야 하고, 공통의 관심사가 조금이라도 있어야 하며, 자주 만날 여건도 있어야 한다. 오래된 친구라면 가끔 만나도 충분히 마음을 나눌 수 있지만, 새롭게 사귄 친구와는 주기적인 만남이 필수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만남엔 언제나 용기가 필요하다. 먼저 손을 내밀 용기, 손을 맞잡을 용기, 상대방을 믿고 나를 보여줄 용기, 상대방을 편견 없이 받아들일 용기. 용기가 부족해지는 순간마다 자신감이 사라지기 일쑤지만, 나를 좋아해 주는 사람들이 있음을 잊지 않으려 애쓰고 있다. 


지난주에 드디어 용기를 내서, 어학원에서 알게 된 친구들에게 초대 메시지를 보냈다. 몇 주간이나 고민만 하고 마지막 순간엔 계속 회피했다. 매우 긴장되어 떨리고 겁도 났다. 메시지를 보내기 전부터 내가 했던 각종 말실수와 아무도 좋아할 수 없는 나의 부족한 모습, 또 실제로는 나를 싫어하는데 티를 내지 않으려고 애쓰는 가상의 친구들의 모습을 상상하며 홀로 상처받는 길고 긴 시간이었다. 


결국 용기를 내 눈을 딱 감고 메시지를 보냈다. 상담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아빠에게 원망의 편지를 보냈던 일, 남동생에게 사과의 편지를 쓴 일 못지않게 어려웠다. 메시지를 보낸 이후에도 누구도 오지 않으면 어쩌나, 부담스럽다고 느끼면 어쩌나 싶어 한참 동안 마음을 졸였다. 


하지만 뜻밖에도 모두가 반갑고 즐겁게 응답해 주었다. 오히려 집에 초대해 줘서 너무 고맙다며 단체 채팅방에 하트가 쌓이자, 그 몇 주간 얼마나 비합리적인 상상들이 내게 가득했는지 깨달았다. 그리고 친구들의 마음을 오해하고 망설였던 시간들이 부끄럽고 빨리 초대하지 못한 것이 조금 아쉽기까지 할 정도다. 지금은 설레는 마음으로 즐겁게 미리 음식을 준비하고 조금씩 청소도 하고 있다.




사흘 전에 책장을 하나 새로 더 구매했다. 책은 짐 중에서도 가장 무겁고 자리도 많이 차지하는 터라, 이사 때마다 골칫거리가 된다. 그래서 한국에 남아 있는 수많은 책들도 독일로 다 가져오지 않았고, 아끼는 책 몇 권만 들고 와 읽고 있었다. 새로 구입하는 책들도 모두 전자책으로 구매하면서, 책장에 책을 너무 쌓아두지 않으려 애썼던 것 같다. 어쩌면 언젠가는 한국으로 돌아가겠다는 생각이 마음 한편에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결혼식 이후, 마음 어딘가가 분명히 좀 채워진 것 같다. 이제는 책장을 새로 들이고, 책을 예전처럼 조금씩 사서 모으고 있다. 책은 언제나 나에게 가장 큰 기쁨을 줬었는데, 그동안 애써 외면하며 지냈다. 이곳에 잠시 머물다가 갈 사람처럼, 상처받을 일이 걱정되어 이런 작은 일에도 마음을 다 주지 않았다. 걱정이 많아 자신감도 부족했고, 용기도 부족했다.


생각해 보면 내 모든 불안은 상처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내 마음을 보호하고자 나를 과하게 보호했다. 그러나 나를 매번 상처 입힌 것은 나의 비합리적인 보호였다. 그러니 용기를 내자. 자꾸자꾸 용기를 내서, 행복해지자.


부족한 나이지만, 이 정도면 뭐 제법.. 아니, 상당히 멋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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