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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니나 Oct 23. 2024

무모한 나, 함께 해주는 너

트래킹의 추억

우리는 종종 잠들기 전에 침대에서 나란히 누워 한참 수다를 떨곤 한다. 어제의 주제는 나의 무모함과 켄의 안전지향적인 성향이었다. 그러다 갑자기 그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기억나? 산속에서 길을 잃어서.." 말을 제대로 시작하기도 전에 웃음부터 나왔다. 내 웃음에 켄은 무슨 이야기인지 단박에 알아듣고 따라 웃었다. "그때 그거 사슴? 아니지, 무스였나?" 여전히 정체를 알 수 없는 그 거대한 동물에 대해 떠올리면 아직도 무섭다. "진짜 무서웠는데.." 다시 키득거리며 그렇게 우리는 잠들기 전까지 한참을 수다 떨었다. 그때 그 일이 우리가 했던 가장 큰 모험이자 위험이 아니었을까 싶다.




2021년, 나는 김은희 작가가 방송에서 추천한 책 빌 브라이슨의 <나를 부르는 숲>을 읽고 나서, 트래킹의 매력에 완전히 빠져들었다. 그 이후 관련된 서적이나 영화, 다큐멘터리를 모두 찾아보며 트래킹에 대한 환상을 품게 되었다. 자연 속에서 걷는다는 것은 단순한 체험을 넘어, '나를 다시 찾는 여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결심했다. ‘올해 내 생일에는 무조건 혼자 트래킹을 떠나야겠어!’ 말없이 훌쩍 떠나는 것이 좀 더 낭만적이었겠지만, 혼자서 낯선 산에서 죽으면 켄이 너무 슬퍼할 것 같아 나의 계획을 켄에게 털어놓았다.


당연히 켄은 안된다며 길길이 날뛰었다. 평소에 한 시간만 걸어도 지치는 내가 트래킹 경험도 없이 4박 5일동안 겨울 산을 타겠다니, 미쳤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지금 생각해도 무모한 도전이었는데, 여전히 나는 가끔 그렇게 앞뒤 없이 결정을 내리곤 한다. 켄은 며칠 동안 내 계획을 꺾으려고 했지만 나는 정말 단호했다.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떠나야 한다는 생각만이 나를 사로잡고 있었다. 그때 이 생각이 얼마나 강하게 자리 잡았던지, 마치 포기하면 내 인생을 포기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결국 켄은 마지못해 조건을 걸었다. “혼자서는 절대 안돼. 같이 가자.”


예정에도 없던 트래킹을 떠나게 된 켄은 하루도 빠짐없이 투덜거리며 내 마음을 돌리려 애썼다. 처음부터 4박 5일은 너무 힘들 테니 초보자 코스로 가자거나, 날이 좀 따뜻해지면 가자고 꼬드겼다. 그러나 나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트래킹을 준비했다. 텐트를 포함해 등산복과 장비 등을 사며 곧 다가올 모험을 잔뜩 기대하고 있었다. 게다가 경험은 전혀 없었지만, 몇 달 동안 인터넷에서 정보를 모은 덕에 이미 중급자가 된 것처럼 자신감이 넘쳤 흘렀다.


내가 세운 계획은 이랬다. 마지막 날 내 생일을 맞기 위해서 생일 4일 전에 출발한다. 그리고 트래킹 코스는 하루에 약 3시간에서 4시간을 걷는 곳으로 골랐다. 약 100km 정도가 되는 코스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중간에 인터넷 지도를 사용하기 힘들 수도 있기에 미리 지도를 다운로드하였고, 이정표가 잘 되어있다는 후기도 꼼꼼하게 찾아보았다. 


드디어 출발일, 장비를 챙기고 무거운 가방을 집에서 들자마자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엌!” 세상에, 이걸 들고 4박 5일을 어떻게 걷지?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지만 이제 와서 포기할 수는 없었다. 우리는 코스 입구에 주차를 하고 가방을 들쳐메고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처음엔 평탄한 도로라서 어렵지 않게 시작할 수 있었다. 무거운 가방이 몸을 짓누르는 것 같았지만, 나보다 더 무거운 가방을 든 켄이 웃으며 농담을 건네자 안심도 되었다. 그렇게 사진을 찍으며 즐겁게 걸었다.




처음 두 시간은 꽤 잘 걸었다. 이렇게만 한다면 모든 일정이 성공적으로 끝날 것 같았다. 하지만 4월은 트래킹을 즐기기에 적절한 계절이 아니었고, 길은 겨울 내내 손을 보지 않은 듯 망가져 있었다. 안내표지도 알아보기 힘들었고, 풀이 무성하게 자라 어디가 길인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출발 이후 두 시간 동안 사람은 한 명도 만나지 못했다. 점점 옅은 공포가 밀려왔다. ‘여기서 죽으면 여름이 되어서야 누군가 우리를 발견하겠지.’ 나는 이런 생각을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지만, 켄도 같은 생각에 갇혀있었다고 했다.


2시간 30분쯤 지났을 때, 우리는 결국 길을 잃었다. 핸드폰에 지도는 있었지만 GPS가 잡히지 않아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었고, 이정표도 보이지 않았다. “어디로 가야 하는 거야?” 그렇게 서로 불안함과 피로, 짜증이 몰려와 투닥거리기 시작했다. 길을 잃고 나서 4시간쯤 지났을 때, 우리는 소리를 높여가며 한참 서로에게 책임을 돌리고 있었다.


“왜 준비도 제대로 하지 않고 트래킹을 하겠다고 한 거야! 내가 여름에 가자고 했잖아!”

“언제 내가 같이 와달라고 했어? 혼자 간다니까 네가 따라온 거잖아!”

“그걸 말이라고 해?”


순간, 갑자기 커다란 동물이 길 한가운데서 우리를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다. 사슴인지 무스인지 모를 그 동물과 우리는 몇 분 간 어떤 소리도 내지 못한 채 대치 상태로 굳어 있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쿵쿵거렸고, 공포감에 사로잡혀 눈앞이 번쩍번쩍 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그 동물이 천천히 돌아서서 모습이 사라졌을 때에야 겨우 긴장이 풀렸다. 그 뒤에 그 길로는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할 것 같아,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네 발로 기듯 미친 듯이 길도 없는 숲 속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사람이 공포에 질리면 웃음이 난다는 게 진짜였다. 우리는 무거운 가방을 이고 네발로 기어서 산을 오르면서 또 미친 듯이 웃어댔다. “그게 뭐야? 뭐였어?” 놀람과 공포가 뒤섞인 웃음이었다. 한참을 기어올라 다른 길이 나타났고, 운 좋게 이정표를 다시 찾았다. 인터넷도 터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지도를 확인해 보니 우리는 겨우 절반밖에 오지 못한 절망적인 상태였다. 이미 4시간을 걸었는데, 앞으로 길을 잘 찾더라도 2시간은 족히 더 걸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곧 해가 질 테니 부지런히 걷는 수밖에는 없었다.




설상가상 이번에는 비가 내렸다. 그러나 내가 누군가! 몇 달 동안 인터넷과 책, 영화와 다큐멘터리로 트래킹 정보 박사쯤은 되지 않던가! 트래킹 중에 비를 만나면 짐과 옷이 젖기 전에 반드시 우비를 챙겨서 입어야 한다는 생각이 스쳤다. "얼어 죽을 수도 있다니까!" 나는 켄을 거의 반 협박하며 우비를 꺼내야 한다고 말했지만, 켄은 곧 그칠 비라며 그냥 계속 걷자는 의견을 냈다. 우비가 가방 아래쪽에 있어 꺼내기 힘들다는 이유도 있었다. 지칠 대로 지쳐있고 끝없는 싸움에 감정소모도 심해서, 나는 거의 울음이 날 지경이었다. 끝없이 우비를 보채는 내 울음섞인 목소리에 켄이 화를 참는 게 느껴졌고, 결국 걸음을 멈춰 가방에서 우비를 꺼내려고 켄은 온갖 애를 써야 했다. 내 가방에선 우비가 금방 나왔지만 켄의 가방에서는 모든 짐을 다 꺼내고 나서야 우비를 겨우 찾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우비를 찾자마자 거짓말처럼 비가 그쳤다. "이 망할 우비!(Scheiße Pancho!)" 켄이 욕을 하며 우비를 내동댕이 쳤다. 아무도 없는 조용한 산에 쩌렁쩌렁 켄이 지르는 욕설이 끝없이 울려 퍼졌다. 이때 나도 제정신이 아니었던지, 내가 한 모든 잘못은 새까맣게 잊고 산에서 내려가기만 하면 이 남자와 헤어지겠다고 얼마나 속으로 다짐했는지 모른다. (독일어로는 이 욕이 '샤이쎄 판초!'라는 발음인데 상황과 맞지 않는 판초라는 귀여운 어감 때문에, 이 때를 떠올릴 때마다 더 웃음이 난다.)


그날 밤, 해드랜턴을 켜고 7시간을 걸은 끝에 텐트를 칠 장소에 도착했다. 밤새 추울 수 있다며 켄은 모닥불을 켰고, 나는 텐트를 쳤다. 비에 젖은 나무 탓에 불이 잘 붙지 않아 모닥불과 텐트가 동시에 완성되었다. 굳은 분위기 속에서 우리는 텐트 안으로 들어가 먹을 것을 꺼냈다. 평소 요리가 취미인 켄이 싸온 호화로운 샌드위치를 보며 나는 또 한참을 웃었다. 이러니까 가방이 무겁지!




배를 채우고 끙끙거리며 침낭 속으로 들어가 불을 끄고 누우니 정말 세상이 너무 어두웠다. 도심과는 다르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우호호호호호, 오호호호, 호우우우우.." 같은 동물 소리들이 끊임없이 들렸다. 딱따구리 같은 새소리부터 어떤 짐승의 소리인지 알 수 없는 이상한 괴성들 때문에 공포에 질려 나는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맷돼지가 갑자기 텐트로 달려들면 어쩌지? 책에서 곰이 나올 때는 어떻게 해야 한다고 했더라? 정말이지 너무 춥고, 너무 무서웠다. 밤귀가 밝은 켄도 잠을 잘 못 자는 것 같았으나 괜히 자존심이 상해 말 한마디 걸기도 어려웠다. 


결국 한숨도 자지 못한 채 해가 떴고, 나는 켄이 일어나는 소리를 듣자마자 다급하게 외쳤다. "집에 가자!" 이 말을 들은 켄의 얼굴에 화색이 펴 올랐다. 이 고생을 며칠 더 할 생각에 일어나기 싫었다던 켄은 세상 근심 없는 얼굴로 짐을 싸며 "진짜지? 거짓말 아니지? 후회 안 하지?"를 내게 연신 물어보았다. 나는 더 고민할 것도 없었다. 이만하면 충분했다. 그리고 집에 가서 어서 따뜻한 물에 샤워를 하고 싶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우리는 행복한 얼굴로 사진을 찍고 바리바리 싸 온 음식들도 꺼내먹고 커피까지 야무지게 챙겨서 마셨다. 집이 최고였다. 집에 도착한 첫날엔 발톱이 빠졌고 손발이 퉁퉁 부어올랐다. 그리고 그 해 생일은 산속이 아닌 발코니에서 소박하게 맞았다. 해드랜턴을 켜고 작은 스토브에 불을 붙여 캠핑 분위기를 내면서 고기를 요리해 먹었다. 어찌나 맛있었는지 모른다. 


어마어마하게 무거웠던 가방, 집에 가는 길이라 피곤한데도 웃음기가 있다


이제 올해도 겨우 두 달밖에 남지 않았다. 얼마전 크리스마스 카드를 구입했고, 가까운 사람들에게 편지를 썼다. 산다는 것이 늘 그렇지만 올해는 우리 둘에게 유독 힘든 일이 많았다. 그리고 또 그 일들을 함께 해결해 가며 더욱 끈끈해진 것 같다. 무모하게 도전한 트래킹만큼이나 새로 시작한 일이 많은 한 해였다. 


나는 언제나 무모하고, 켄은 그런 나의 도전을 함께 해준다. 그러니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때 기억처럼 이 모든 일들도 결국 깔깔거리며 웃을 추억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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