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정을 추구할 때 부딪히는 역설
잠깐 행복했다가 사라지는 들뜬 기분일 줄 알았는데, 이번 주도 여전히 행복하다. ‘행복해지는 방법을 깨달았기 때문일까?’ 이런 생각을 하다가도, 혹시 또 큰코다칠 일이 생길까 봐 불안해진다. 그래서 행복을 자랑하지 않고 조용히 나눌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도 생각해 본다. 그만큼 지금의 안정적이고 편안한 상태를 잃지 않고 유지하고 싶다는 소망이 크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을 얻으려 애쓸수록 손안에 꽉 쥔 모래처럼 흩어져 버릴 수 있다는 생각도 해야 한다. 참, 복잡하다. 행복하면 그저 행복하구나 하고 안심해도 될 것을 여러 단계로 경계하고 있다. 이렇게 행복 앞에서는 아직도 초짜처럼 어설프다.
어제 전 직장 상사와 함께 점심을 먹었다. 누구나 그만둔 회사에 사연이 하나둘쯤 있겠지만, 특히나 그 회사는 절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약 5년 동안 별일을 다 겪으며 함께 버텼기 때문에, 우리 사이엔 일종의 전우애 같은 것이 있었다. 안부도 묻고 겸사겸사 만난 자리에서 그는 내게 결혼을 축하한다며 대뜸 축의금을 건넸다. 예상치 못한 선물에 나는 눈물이 핑 돌았다. 켄의 가족들로부터 이미 많은 축하를 받았지만, 결혼 후 나의 지인이 직접 나를 만나 결혼을 축하해 준 적은 처음이었기 때문인 것 같다. 괜찮다, 행복하다고 말했어도 어쩐지 조금 허전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 마음이 정말 고마웠다. 주책맞게 나오는 눈물을 닦고, 주문한 햄버거를 맛있게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헤어졌다.
독일 생활은 외지인에게는 참 고단하다. 독일이라 특히 어렵다는 뜻은 아니다. 그저 타향살이가 늘 그렇듯이, 이곳에 섞여서 사회의 일원으로 인정받는 것이 어렵기 때문이다. 이민자는 얼마나 오래 살았는지에 상관없이 늘 어느 정도는 바닥에서 살짝 들뜬 채 아무리 눌러도 눌러붙지 않는 느낌으로 붕 떠 있다. 일곱 살 때 필리핀에서 독일로 건너와 평생을 산 켄조차도 그런 감정을 완전히 떨쳐내지 못했다. 얼마 전, 넷플릭스에서 <흑백 요리사>라는 프로그램을 보던 켄이 에드워드 리의 음식을 보고 나에게 반갑게 소리쳤다. “저거야, 저거! 내가 평생 느꼈던 기분!” 미국인도 한국인도 아닌 채,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늘 고민하며 살아온 에드워드 리의 이야기에 켄이 깊이 공감한 것이다.
오늘 아침엔 알고리즘의 선택을 받은 하나의 짧은 영상이 내 휴대폰에 떴다. 한국 생활을 하는 외국인의 인터뷰였는데, 한국인들과 친구를 맺기 어렵다는 내용이었다. 참 묘했다. 내가 독일에서 느끼는 심리적 고립감을 그들은 한국에서 느끼고 있다니. 어쩐지 주변을 맴도는 것 같은 기분. 우리는 어쩌면 인종이나 국적을 떠나 외국인으로서 타국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새로운 범주로 새로 묶인 것이다. 우리들은 각자 있는 곳에서는 ‘이주민’이라고 불리겠지.
학창 시절, ‘주변인’이라는 개념을 배운 기억이 있다. 나는 어디를 가든 잘 속하지 못하는, 늘 주변에 머무는 사람이었다. 어른도 아이도 아닌 청소년 시절에, 나는 그 개념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20대의 방황도 주변인으로서의 방황이었다. 연극배우로 활동했지만, 연극으로 생계를 유지할 수 없었기에 나는 예술인도, 그렇다고 아마추어도 아닌 애매한 경계에 있었다. 꿈을 이루지도 못했고, 그렇다고 계속 꿈을 꾸지도 못하는 어정쩡한 상태에서 어느 쪽에도 속하지 못하는 기분이었다.
이제 독일에 거주한 지 10년이 되어가기에 완전히 한국사회에 속한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여전히 독일사회에 완전히 속하지도 못한 감정을 느낀다. 독일에서도 늘 어디서나 괜히 서성거리는 것 같다. 내가 주인인 것 같은 편안함보다는, 어디에도 딱 들어맞지 않는 불안한 주변인이라는 느낌이 든다. 어쩌면 이것이 나의 불안감의 근원일지도 모른다. 까딱 잘못하면 진짜 내가 들통나서, 주변인으로조차 남을 수 없을 것 같아 부단히 더 노력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지금 나의 행복의 근원은 결혼을 통해 나와 남편으로만 구성된, 가족이라는 진정한 소속을 갖게 된 안정감 때문일까? 내가 직접 운영하는 회사를 소유함으로써 고용 불안에서 벗어나 어느 정도의 안전을 확보한 것도 분명하다. 게다가 그보다 더 본질적인 ‘한국인’이라는 소속감이 여전히 내 안에 깊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도 맞다. 이 소속감은 결혼이나 회사 소유와 같은 물리적인 안정감보다 더 내면적이고 근본적이다.
변하지 않는 것일수록, 그 소속감은 더 강해지는 듯하다. 소유하거나 제도화된 것이 아니라, 내가 태어난 곳, 즉 나의 뿌리에서 오는 국적이 주는 소속감이라 유독 더 강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래서 자꾸만 해외에서의 생활이 길어질수록, 한국인이라는 소속감이 나를 더욱 지탱해주고, 이를 통해 나는 더 큰 안정감을 얻게 되는 것 같다.
얼마 전 내가 좋아하는 한강 작가님이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정말 행복하고, 기뻤다. 그가 아시아 여성 최초로 노벨상을 받았다는 것도, 또 한국인이라는 것도, 그리고 내가 평상시에 즐겨 읽던 책을 쓰신 분이라는 것도 모두 좋았다. 그저 이 모든 것이 나를 기쁘게 했다. 함께 소속된 여러 카테고리 안에서 경사가 났다는 느낌 때문도 있었을 것이다.
자주 느끼지만, 나는 참 모순적인 사람이다. 늘 그렇다. 이 시점에서 진지하게 고백하건데 사실 나는 진심으로 세계가 하나가 되어 평등하고 평화로운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국적이나 인종, 성별, 나이와 같은 차이들을 넘어, 결국 인류나 지구의 구성체로서 모든 생명체가 경계 없이 행복할 수 있는 세상이 내가 꿈꾸는 유토피아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런 소속감에서 오는 안정감이 본능적이고 즉각적인 기쁨을 준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도 없다.
본질적으로 낯선 것에 대한 적대감은 생존 본능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 그러니 소속감에서 오는 안정감 역시 인간이 문화를 통해 진화하고 발전해온 본능이라고 봐야 한다. 본능에는 옳고 그른 것이 없겠지만, 내가 얻는 소속감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거꾸로 더 안정된 심리 상태를 추구한다면 폭넓은 소속감을 갖는 방법을 고려해 볼 수 있지 않을까?
경계를 완전히 허물 수 없다면, 나의 경계를 가능한 한 크게 확장하는 방법이 있을 것이다. 곧 포용성이 심리적 안정과 연결된다는 말로 이해될 수도 있다. 낯선 이를 경계하고 선을 긋는 순간, 불안과 공포가 생기기 때문에 배척하기 쉽지만, 포용성을 가지고 따뜻하게 안아줄 때 그 용기는 곧 안정감으로 보상된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면, 나는 경계를 허문 경험이 거의 없다. 아무리 애를 써서 떠올려 보아도 경계 앞에서 서성인 적은 많았으나, 완전히 허물어본 적은 없는 것 같다. 이렇게 겁을 먹고 실천으로 옮기지 못했기 때문에, 오히려 모두가 평등한 유토피아를 꿈꾸는 것 아닐까? 모든 경계에서 더 예민하게 불안감을 느끼기 때문에 더욱 그런 꿈을 꾸는 것일지도 모른다. 행복의 경계 앞에서 겁을 집어먹고 어떻게 하면 이 경계 안에서 나가지 않고 오래 머무를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것도, 그 경계가 두렵기 때문일 것이다.
그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거나, 혹은 그 경계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거나, 그렇지 않다면 나의 테두리를 넓히는 방법도 있을 것이다. 어떤 날은 불행할 수 있고, 어떤 날은 행복할 수 있지만, 그 모든 것이 나의 소중한 일상이라고 생각해 버리면 된다.
나는 아시안 여성이지만, 결국에는 인간이며, 지구 안에 살고 있고, 온 우주에서는 하나의 생명체로 존재한다. 나의 테두리를 확장하면, 한국 여성이 노벨상을 받았을 때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기쁘고 행복한 일을 온몸으로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에 따르는 고통이 수반됨을 각오해야 한다. 얼마 전 다시 읽은 한강의 소설 속 수없이 죽어나간 역사 속 인물들을 떠올리며 매우 괴로웠다. 세상의 모든 괴로움을 다 끌어안아 슬퍼하려면, 그 슬픔에는 끝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슬픔도 기쁨도, 불행도 행복도 모두 내가 느끼는 일시적인 감정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그 둘의 차이는 그리 크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러므로 불안과 안정도 그다지 다를 것이 없다. 그렇게 생각하면 모래알을 움켜 잡으려 했던 손아귀에도 자연스레 힘이 풀린다. 내 손에 있어야만 내 모래가 아니다. 그저 잡으려 하지 말고 흘러가게 두자. 바람에 흩날리도록 두고, 그저 지켜보자. 그러니까, 편안하게 그저 존재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