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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니나 Nov 06. 2024

나를 위해, 퇴사 그리고

흔한 퇴사 이야기 하나 더 추가요

퇴사한 회사에 관한 이야기는 입 밖에 꺼내는 것만으로도 정신적으로 금세 피로해져서 내가 가장 꺼리는 주제 중 하나다. 게다가 애정을 가지고 5년이나 열심히 다닌 곳이라 딱히 흉을 보고 싶지는 않다. 각각의 상황이 모두 다르다 보니, 아무리 개인적인 이야기일지라도 오해를 불러일으킬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퇴사한 지도 15개월이 지났다. 관련되었던 사람들의 해고 소식도 전해 들었으니, 이제 이 이야기를 조금은 꺼내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애초에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부터 현재의 내 모습이 되기까지를 허심탄회하게 털어놓고 싶어 쓰기 시작한 글들이기에, 사실상 나에게 마음의 병을 안긴 가장 큰 계기인 이 시간을 제외할 수는 없다. 그토록 많은 시간과 열정을 쏟아부은 직장이었지만, 결국 남은 것은 각종 병과 지친 몸뿐이었으니 말이다.




한국에선 연극배우로 활동하며 쾌활하고 명랑하게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무엇이든 빠르게 배우는 것이 나의 가장 큰 장점이었다. 길게는 1년, 짧게는 3개월마다 새로운 아르바이트를 찾아 투잡, 쓰리잡까지 해가며 생활비를 충당했던 10년간 나의 정체성은 언제나 연극배우였다. 사무직도 여러 번 해봤고, 어느 기업에는 정직원으로 채용되어 목표한 캐스팅에 합격할 때까지 꽤 오랜 시간 직장인으로서의 삶을 살았지만, 속으로는 연극배우라는 직업이 나의 본모습이라고 생각했다.


독일에 와서는 아주 작은 회사에서 약 2년간 사무직을 했다. 일이 간단하고 무료했으며, 빛이 잘 들지 않는 어두운 사무실에서 혼자 지내야 했던 그 생활은 내 성격과 맞지 않아 결국 그만두었다. 나는 사람들과 소통하는 일을 하고 싶었고, 한국어를 사용할 수 있는 직무를 원했다. 지금도, 그 회사에서 지낸 2년이 내 정신 건강에 아주 큰 상처를 남겼다고 생각한다. 정말 작은 회사라서 매일 혼자 출근해 밥을 해 먹고, 업무를 보고, 청소를 하고 퇴근해야 했다. 게다가 전화나 이메일 업무는 종일 서투른 독일어로 해야 했기에, 비자가 아니었다면 당장 그만두었을 것이다. 그러나 퇴사를 하면 한국에 가야 했고 켄과 떨어질 수 없다고 생각해서, 나는 매일 버티는 선택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어두운 사무실로 출근하기가 싫어져 기차에 뛰어들 생각을 하는 나를 발견했다. 매우 구체적인 나의 자살 계획은 위험 신호였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상황을 바꾸지, 죽음을 선택하진 않는다.




그래서 새로운 곳으로 이직을 했다. 이번에도 작은 회사였지만, 매우 즐거웠다. 사람들을 좋아하는 외향적인 나이기에, 업무의 내용과는 상관없이 기쁜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 일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여러 번 월급이 오르고, 승진도 했다. 이때 드디어 나는 나 스스로를 더 이상 연극배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이제 완벽한 직장인이었고, 월급을 받으며 생활하는 일상이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회사가 위기 상황에 처하고, 조직이 여러 번 재편성될수록 나의 책임감은 점점 커져갔고, 상황을 바로잡고 싶다는 욕구도 멈출 줄 몰랐다. 고통받는 동료들에게 더 편한 업무 환경을 만들어 주고 싶었고, 그게 결국 내게도 안정된 일상이 될 것이라 여겼다. 그러나 몇 년이 지나면서 나는 점차 지쳐갔다. 그 작은 곳에서 서로 조금이라도 더 이익을 챙기려는 생존 싸움에 이골이 났다. 인간으로서의 품위와 존엄성은 점점 사라지고, 마치 굶주린 개처럼 서로 물어뜯는 동료들을 바라보는 게 점점 힘들어졌다. 


코로나 기간 동안 회사는 겉으로는 성장을 이룬 듯 보였지만, 내실은 여전히 다지지 못한 채 위태로운 상황에 처해 있었다. 그 사이 많은 사람들이 오고 갔고, 많은 말도 오갔다. 누군가는 내게 아직도 그 회사에 다니느냐며 놀라워했고, 누군가는 퇴사를 권하며 서슴없이 조언을 하기도 했다. 내 가장 큰 잘못은, 이 직장에 애정을 가지게 된 것이었다. 몇 년 동안 이곳에 많은 시간을 투자해 내가 성공해 낸 프로젝트들이 반가웠고, 다양한 성과들이 자랑스러웠다. 새로 갖게 된 나의 '직장인'이라는 정체성을 부여해준 그곳에 쓸데없이 최선을 다했다. 누군가는 내 임금을 다른 동료들과 비교하며 하는 일만 많은 터무니없는 박봉이라 했지만, 나는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여겼다. 다른 이들처럼 욕심을 부리며 추잡해지고 싶지 않았다. 나의 품위를 지키고 싶은 욕구가 그 무엇보다 강했다.




그러나 얼마가지 않아 품위를 지키고 싶은 나의 욕구는 바로 무너졌다. 안타깝게도, 내가 애정해 마지않는 동료들이 상처받는 큰 사건들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모두 여성이었고, 나 또한 여성이었다. 그들은 내게 동료이자 친구였다.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자, 나는 조금이라도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관리직에 올라야겠다고 결심했다. 회사 전체에서 여성 관리직은 단 한 명도 없었고, 내가 입사한 이래 나의 위에는 언제나 남성들뿐이었다. 게다가 나는 그나마 가장 오래 일했고, 가장 높은 직급에 있었다. 그녀들을 위해 기꺼이 관리직을 맡기로 했다. 회사에서도 나의 결정을 반기는 분위기로 또다시 새로운 조직 편성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결과는 처참했다. 아무리 성과로 보여줘도, 예산을 배정받지 못했다. 돈 없이 어떻게 돈을 벌 수 있단 말인가? 판매할 물건을 구하지 못하는데 무엇을 판매하겠는가? 결국 성과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코로나 기간 동안 다지지 못한 내실 탓에 회사는 자금난에 시달렸고, 나는 거래처에도 동료들에게도 면목이 없어졌다. 새로운 사업에 투자한다며 내가 맡은 기존 사업을 등한시한 회사의 결정에 화가 치밀었다. 여기저기 회사 대신 사과를 하러 다니는 동안 죄책감이 들었다. 사실상 내 탓은 아니었지만, 관리직에 올라 책임이 커진 만큼 회사의 문제도 내 책임처럼 느껴졌다.


이쯤 되자, 살아남기 위한 끔찍한 영역 다툼이 끊이지 않고 발생했다. 자주 감정싸움으로 번졌고, 목소리가 높아진 곳에서 나는 종종 바구니에 담겨 살기 위해 파닥이는 미꾸라지들의 안타까운 모습을 떠올리곤 했다. 그럴 때마다 공황이 찾아오기도 했다.


회사는 계속해서 어려워졌고, 동료들과 거래처에는 비밀로 하라는 식의 업무가 갈수록 쌓여갔다. 적당한 시기에서 멈추지 못한 과한 투자로 인해 이제는 아무도 책임질 수 없었고, 아무도 해결할 수 없는 일들이 계속 발생했다. 그리고 곧 나의 팀원 중 두 명을 해고하라는 통보를 받았다.


그즈음 퇴사를 여러 번 생각했다. 특별한 계획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실업급여 정도를 기대했고, 실업급여를 받으면 어학원을 공짜로 다닐 수 있다는 말에, 그동안 시간을 내지 못했던 독일어를 실컷 공부할 수 있겠다고 막연히 생각했다. 그러나 팀원 두 명을 해고하라는 말은 내게 너무도 잔인하게 들렸다. 나는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언제라도 다른 곳으로 이직할 수 있는 경쟁력 있는 직원 한 명과 나를 선택했다. 다른 팀원들은 초반엔 우리 둘이 빠지면서 업무가 어려워지겠지만, 몇 달간은 회사에 남아 다음을 준비할 수 있을 것이었다. 팀원들과 어느 정도 터놓고 이야기했기에 잘 내린 결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나는 ‘해고’라는 이름을 단 퇴사를 하게 되었다.




해고 후 서너 달은 침대에 누워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만신창이가 된 나의 마음과 몸을 추스르는 시간이었다. 지난 5년간 무엇을 했는지 떠올려보기도 했고, 때로는 정말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그저 누워만 있었다. 가장 허리가 아플 때였고, 걷기도 어려워서 구부정하게 다니기 일쑤였기에 누워 있는 것이 가장 편했다. 퇴사 1~2년 전 진단받은 갑상선 저하증과 원인 모를 두통, 복통도 여전했다. 주기적으로 받던 잇몸 치료에도 차도가 없었다.


다시 계절이 바뀔 즈음, 나는 독일어 공부에 몰두했고, 그와 함께 공황 증상도 심해졌다. 마치 일하던 습관처럼 공부에도 열과 성의를 다했고, 성적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결국 상담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제 그 춥고 서러웠던 쌀쌀한 봄과 언제 지나갔는지도 모를 여름을 보내고, 겨울이 다가온 11월이다. 뛰어다니고 운동해도 괜찮을 정도로 허리가 좋아졌고, 원인 모를 두통과 복통도 사라졌다. 갑상선 저하증 수치도 모두 정상으로 돌아왔다. 스트레스 때문에 갑상선 기능이 저하되었던 건지, 아니면 반대로 기능 저하가 무력감과 우울감을 불러왔던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물론 무엇이 원인이든, 지금 건강해졌다는 사실이 더 중요하다. 심지어 이번에 다녀온 치과에서도 3개월 전, 6개월 전과 비교해 눈에 띄게 잇몸이 건강해졌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치아는 오히려 회사 다닐 때 더 신경 쓰고 치료받았는데, 이제 와 보니 이것마저도 스트레스의 영향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몇 달 전, 나와 함께 회사를 다니던 사람들이 이미 대부분 그 직장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제는 그때 문제를 만들거나 해결하지 못했던 사람들이 거의 다 뿔뿔이 흩어진 것이다.




나는 현재 1인 법인 회사의 대표가 되었다. 해고 전, 나에게 새로운 회사를 차릴 건지, 어떤 회사로 이직할 건지를 집요하게 묻던 사람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들은 내가 아직 선택하지도 않았던 길을 나보다 더 잘 알고 있었던 것일까? 나는 그들이 나를 과대평가한다고 생각했지만, 실은 내가 줄곧 나를 과소평가해 온 것은 아니었을까.


연극배우에서 직장인으로 스스로를 인식하기까지 3년이 걸렸고, 지금은 사업가로서 반년을 보내고 있다. 이제 막 시작했지만, 천천히 아주 조금씩 단단하게 자리 잡아갈 생각이다. 직원 채용 계획도 없고, 혼자 일하니 사무실도, 과도한 사업 투자 계획도 없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언제나 그랬듯, 나는 돈보다 더 큰 가치를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싶다.


돈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을 자주 하곤 했지만, 그렇다고 돈을 벌기 싫다는 뜻은 아니다. 나도 부자가 되고 싶다. 다만 그 말에는 내 정신 건강과 행복을 지키겠다는 결심이 담겨 있다. 직장에 다닐 때보다 적은 돈을 벌지만, 노력한 만큼 스스로에게 보상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보람을 느낀다. 거짓 없이, 누구에게 상처를 주거나 평가당하지 않으면서도 돈을 벌 수 있다는 사실이 가장 만족스럽다.


행복한 직장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나는 그 경험을 해 보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지금, 이 작은 회사와 함께 단단하게 나만의 길을 가고 있다. 혼자이지만, 이곳에서의 일은 진정으로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 준다. 내가 걷고 있는 이 길이 가장 소중하고, 나를 더 건강하고 온전히 지킬 수 있는 길이라는 걸 이제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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