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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니나 Nov 20. 2024

천천히 산책하듯이

나의 불안은 어디에서 왔을까

불안은 늘 갑작스럽다. 찰랑이듯 배꼽 언저리가 불편해지다가 입매까지, 눈까지, 머리끝까지 차올라 어느새 폭풍같이 내 몸을 휩쓸어버리곤 한다. 지난 일요일도 그랬다. 여유롭고 조용한 주말을 만끽하며 켄과 함께 소파에 편안히 널브러져 영화를 보고 있었다. 그러나 저 밑에서부터 천천히 다가오는 불안을 내쫓지 못하고 잠식당해 버렸다. 결국 참지 못하고 머리를 흔들고 몸을 흔들고 소리를 질렀다.


놀란 얼굴로 괜찮냐고 물어보는 켄에게 간신히 “그냥... 잠깐 불안해졌어”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괜찮지 않다고 다시 정정하고 산책을 가자고 말했다. 이미 어두컴컴한 데다 축축하게 비까지 부슬부슬 내렸지만 우리는 서둘러 옷을 껴입고 밖으로 나왔다. 차가운 바람이 얼굴을 더듬고 가자 어지럽던 마음이 한풀 꺾인 듯했다. 목적지도 없으면서 나는 발걸음을 재촉해 집으로부터 멀리 떨어지려고 애썼다. 켄도 부지런히 발을 움직였다. 어느 정도 호흡이 진정되자 켄은 “왜 그런 거야?“라고 물었고, 나는 사실대로 그저 모른다고 답할 뿐이었다. 정말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도대체 왜, 또? 이렇게나 편안하고 행복한 주말인데. 우리는 더 이상 새롭지 않을 만큼 수없이 걸어다닌 길을 그날도 팔짱을 끼고 손을 잡고 어깨를 토닥이며 열심히 걸었다.




한참 열심히 걷고 있다가 나의 불안이 아이러니하게도 지난밤의 행복감 때문에 찾아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토요일은 정말로 오랜만에 만족스러운 하루였다. 어학원에서 만난 언니가 집으로 우리 둘을 초대해 주었고, 정성스레 준비한 한국 음식을 함께 먹으며 따뜻한 시간을 보냈다. 언제나처럼 다정한 언니의 환대에 와인잔이 몇 차례나 비워졌고, 7시간 가까이 수다를 떨었다. 언니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에 조바심이 들 때마다 손을 살짝 꼬집거나 심호흡을 했다. 머릿속이 웅웅거리기 시작할까 무서워, 언니와 남편분에게 살짝 “사실 지금도 조금 불안해요”라고 솔직하게 나의 약점을 말하는 것까지 성공한 날이었다. 그 고백마저 두 분은 자연스럽게 받아주었고, 이윽고 긴장이 풀려 집에 돌아와서도 약도 없이 편안한 마음으로 숙면을 취했다.


그러나 그 행복한 마음이 너무 컸던 것일까. 일요일 아침이 되자 수많은 질문이 꼬리를 물고 쏟아졌다. “혹시 실수한 건 없었나? 말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건 또 괜히 말했지… 아! 그 표현은 언니가 오해했을 수도 있었을 것 같은데 정정해야 하나. 무례하게 보였으면 어쩌지!” 마치 오랜 습관처럼 또 전날의 대화들을 곱씹었다. 조각난 기억 속을 뒤져가며 7시간 내내 잘못한 것이 없는지 작은 몸짓부터 표정까지도 검증하고 있었다.


반년 동안의 심리 치료 덕에 이제는 가까운 사람들과 편안하게 시간을 보내는 방법을 제법 터득했다. 그러나 더 가까워지고 싶은 이와 함께 있을 때는 잘해내고 싶은 욕심 탓에, 무엇인지도 제대로 모르는 나의 어두운 면들이 들킬까 봐 서투르게 애쓰며 스스로를 옥죄고 있었던 것이다.




다행히 월요일에는 상담이 있었다. 나는 선생님께 서둘러 토요일에 느꼈던 행복과 일요일에 느꼈던 불안을 털어놓았다. 선생님은 우리가 함께 정한 열다섯 가지 지침을 떠올려 보라고 했다. “언제나처럼 이 지침들을 꾸준히 지켜 나가다 보면, 자신감도 생기고 불안감도 점차 줄어들 거예요. 너무 서두르지 마세요. 정말 잘하고 있어요.” 선생님의 말씀에 ‘그렇구나, 다행히 방향이 틀린 게 아니야. 그냥 내가 여전히 조급할 뿐이야’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다.


상담이 끝나고 집으로 오는 길에 하늘을 보았다. 세상이 곧 멸망하기라도 할 듯 축축하고 어두운 회색 하늘이었다. 그러네, 하늘마저 색이 늘 푸르지 않잖아. 아무리 어두컴컴해도 하늘은 하늘이다. 강한 겨울바람에 메마른 가지들이 흔들렸고 내 마음도 그렇게 자꾸만 흔들렸다. 그래도, 이 정도 바람에는 흔들리기만 할 뿐 뿌리째 뽑히지 않는다. 어떤 날에는 하늘도 다시 화창할 것이고, 기분 좋은 살랑이는 바람만 부는 날도 있을 것이다.


여전히 계속 욕심이 나고, 흔들리고, 무섭고, 숨고 싶고, 불안하며, 아프고, 괴롭다. 때로는 사라지고 싶고 울고 싶고, 소리를 지르고 싶다. 그러나 또 조용하게 편안하기도 하고 점차 단단해지기도 한다. 성장이라는 말이 지겨워서 다 때려 부수고 싶게 반항심이 들다가도, 그마저 반갑고 만족스러울 때도 있다. 지금은 내가 어디로 나아가고 있는지 도무지 잘 보이지 않는다. 방향이 맞다고 하니, 잘 해내고 있다고 하니 그런 말들을 믿고 그저 힘내서 걸어가고 있을 뿐이다. 아주 천천히, 산책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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