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화당과 집경당 ~ 향원정 ~ 건천궁 ~ 집옥재 ~ 태원전 ~ 경회루
관문각 - 러시아 건축가 세레친 사바틴과 친군영이 공사를 맡아 2층(일부 3층)의 서양식 건물로 개축되었다. 최초의 양관으로 불리기도 한 이 건물은 국왕의 서재 겸 집무실인 집옥재와 대조를 이뤘다. 집옥재와 관문각 사이에는 서양식 기계추 시계탑도 세워졌다. 사바틴은 관문각에 기거하다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목격하여 고발 기록을 남기기도 하였다. 헐린 시기는 1901년 이후로 보인다.
1876년 경복궁에 큰 불이 나자 고종은 창덕궁으로 옮겼다가 1888년에 다시 경복궁으로 돌아와 주로 건청궁에 기거했다. 이미 창덕궁에 지어졌던 집옥재, 협길당 등을 1891년에 건청궁 서편으로 옮겨와 자신의 서재와 외국 사신 접견소로 사용했다. 집옥재는 양 옆벽을 벽돌로 쌓고 내부를 중2층으로 만들었으며, 팔우정은 팔각형의 2층 정자이다. 이 건물들은 중국풍의 요소들이 많이 섞여 궐내에서 이국적인 지역을 형성하며, 복도를 통해 하나의 내부로 연결된다.
태원전은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초상화를 모시던 건물로, 나중에는 빈전이나 혼전으로도 쓰였다. 빈전(殯殿)이나 혼전(魂殿), 영전(靈殿) 같은 제사와 관련된 전각들이 자리 잡고 있다. 빈전은 왕실에 돌아가신 분이 있을 때 관을 모셔두는 곳이고 혼전은 종묘에 모실 때까지 만 2년 동안 위패를 모시는 곳이며, 영전은 돌아가신 분의 초상화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고종은 태원전 재실인 공묵재(恭默齋 - 恭默 : 공손히 침묵한다)에 머물면서 신하들을 만나보는 일이 많았다. 태원전 건물은 20세기 초에 철거되었다가 지금 옛 모습대로 건물이 복원되었다. 건물은 제사 지내는 집답게 단정하고 엄숙한 외관을 갖추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