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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플레이아데스 Jan 03. 2024

삶의 카덴차(cadenza)와 그루브(groove)

신기했다. 뽕나무가 우리 집에서 자라다니. 몇 년 전 슬그머니 와서 잽싸게 눌러앉고서 빠른 속도로 자랐다. 얼마 안 가 내 키를 훌쩍 넘기며 가지와 잎이 무성해졌다. ‘텃밭 한가운데 있으면 안 되는데 어쩌나?’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오디가 욕심났다. 일단 두고 보자는 게 그때의 결론이었다. 하지만 이 나무를 없애기로 한 결정적인 이유는 ‘뽕나무이’라는 해충 때문이었다. 하얀 실 같은 것이 나무 여기저기를 덮고 있는 것은 물론이고 시간이 지나면서 수국과 채소밭까지 퍼졌다. 어느 날, 흰색으로 덮인 뽕잎을 자세히 살펴보다가 기겁했다. 움직이는 그 벌레들을 눈으로 확인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해충들이 각인되고 나니 뽕나무가 싫었다. 나무에는 미안하지만 내년에 베어 없애기로 결심했다.


가을이 가고 겨울이 왔다. 소나무, 남천을 제외한 마당의 나무들이 계절에 맞춰 잎을 떨구었다. 뽕나무 역시 단 한 장의 잎도 남기지 않고 앙상한 겨울나무가 되었다. 고춧대를 뽑고 텃밭을 정리하던 중 우연히 뽕나무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 모습이 너무 단아한 게 아닌가. 쭉쭉 뻗은 가지가 다른 나무들과는 느낌이 사뭇 달랐다. 애물단지같이 여겨지던 그 여름의 나무가 아니었다. 오히려 당당해 보이기까지 했다.


문득 농사짓는 친구가 선물로 준 뽕잎 가루가 생각났다. 냉장고에 오랫동안 내버려 두었던 터였다. 순간 머릿속에 뽕나무에 관한 세계가 펼쳐지기 시작했다. 인터넷을 검색하니 뽕나무의 좋은 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단지 해충 때문에 나무를 베어버릴 생각을 한다니. 여름에 해충들로부터 힘들었을 뽕나무의 입장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오히려 아낌없이 주는 나무 같았다. 해충들에게까지 자기 잎을 다 내어주고도 꿋꿋이 이 겨울을 견디고 있는 뽕나무가 성자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봄이 되면 베어버리겠다는 생각에 제동이 걸렸다.


고개를 돌려 마당의 나무들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나무마다 느낌이 달랐다. 사시사철 푸른 소나무는 개성이 없어 보였다. 미국 여행의 좋은 추억으로 심은 자작나무에 대한 생각도 달라졌다. 봄여름 가을 그렇게 아름답던 나무가 겨울에는 잔가지에 걱정 근심을 잔뜩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또한, 몇몇 마른 잎을 달고 있는 모습은 오히려 측은해 보이기까지 했다.


나무에 대한 생각이 달라지자 갑자기 머리가 혼란스러워졌다. 왜 내가 잣대를 가지고 나무를 평가하고 있지? 뽕나무처럼 소나무나 자작나무도 그저 자신의 위치에서 온 힘을 다하며 살아가고 있을 뿐인데. 내 생각을 기준으로 대상을 판단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새삼 놀랐다. 심호흡하고 둘러보니 장미, 라일락은 그들대로, 대나무는 대나무대로 각각의 모습으로 묵묵히 생명을 유지하며 이 겨울을 나름대로 보내고 있었다.


아무 쓸모없다며 잘라버린 뒤뜰의 가죽나무도 생각났다. 한때는 산티아고 순례길의 ‘철 십자가’ 같다며 매일 바라보고 좋아했는데 사람의 마음이 참 간사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물론 전원생활을 하면서 어디선가 날아오는 수많은 생명을 모두 받아들일 수 없음을 잘 안다. 하지만 인간 위주로 ‘쓸모 있음’과 ‘쓸모없음’으로 선 그으며 살아온 내가 아닌가. 

남을 평가하지 않고, 남과 비교하지 않고 오로지 자기 삶에 충실하며 살아가라고 겨울나무가 무심하게 가르쳐준다. 


협주곡에서의 카덴차처럼, 재즈에서의 그루브처럼, 나무 각자의 자유롭고 특별한 음악이 마당을 가득 메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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