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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주얼 Dec 21. 2020

남자 보는 눈이 낮아서

한 겹 더 들춰보는 연애 이야기 (1)

나에겐 아직도 연애가 중요한 화두이다. 내 나이쯤 되면 - 싱글일 경우 - 연애는 시들해지고 남자 사귀는 것도 다 귀찮아졌다는 친구들도 꽤 있지만, 나는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내가 포기하지 않은 건 '좋은' 이성 관계다. 이성끼리 '사람친구'라는 거 말고, 음기와 양기가 오고 가는 이성관계 말이다.

남자 같은 건 필요 없다고 쿨하게 말하지 않겠다. 나는 남자가 필요하다. 생존이나 생활을 위해서 필요한 게 아니다. 성욕 때문도 아니다.    

나의 여성과 조화를 이루고 균형을 맞춰줄 남성을 만나는 일이 여전히 즐겁기 때문이다. 음과 양의 상생과 상극을 통해 나의 존재가 확장되는 경험은 늘 신선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렇게 좋은 순간들이 지속되기가 참 어렵다는 것이다. 정말이지 여자와 남자 사이는 어떤 인간 관계보다도 난해하다.

 

나는 결혼 전에도 남자들을 꽤 많이 만나봤고, 이혼한 뒤에도 꾸준히 연애를 했다. 수많은 후회와 다짐, 반성과 결심을 거듭했다. 한 때는 이렇게 생각했다.

'내가 좋은 남자를 만나지 못하는 이유는 누군가를 만날 때 감정에만 의존하기 때문이야. 감정적으로 끌리는 사람을 만나지 말고, 이성적으로 판단해서 건실하고 안정적인 사람을 만나자!'

그 결심은 당연히 실현되지 못했다. 매뉴얼과 지침대로 연애가 이루어진다면 세상에 안 될 연애가 어디 있겠는가? 또 이렇게 마음 먹은 적도 있다.

"모든 커플이 다 처음부터 잘 맞아서 잘 살고 있겠어? 서로 참는 거겠지. 나도 이제부턴 상대에게 문제를 느끼더라도 한번 참아보자. 끝까지 참아보자. 정말 인내라는 걸 해보자! 그래, 그런 게 참된 사랑이지!"

참는 건 꽤 할 수 있었는데, 그렇다고 좋은 관계가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결국 나의 주된 문제는 '남자 보는 눈'이 없는 것이라 생각했다. 주변에서 모두 그렇게 말했다. 남자 보는 눈이 없고 눈이 너무 '낮다'고.  

"넌 참... 만나도 왜 그런 사람을 만나니?"

남자친구와 생긴 갈등을 고민하는 나에게 한 언니가 걱정스럽게 던진 말은 참 아프게 와 닿았었다. 정말이지 나는 이 모양일까 싶어 부끄러웠다.  

허물없이 지내는 친구들은 나의 전남친들을 거론하며, 그 사람은 진짜 별로였다, 네가 너무나 아까웠다, 그런 남자와 만나고 있는 꼴이 보기 싫어서 너를 멀리한 적도 있다, 등등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기본적으로는 나를 아끼고 또 나라는 사람을 좋게 봐주기 때문에 그런 이야기들이 나온다는 걸  알기에 나는 그들의 관심과 염려를 고맙게 생각한다.


하지만 고마우면서도 어딘가 불편했다. 내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지고 쏟아부은 노력과 지나간 시간이 아까워서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뭔가 근거를 알 수 없는 어떤 기준, 내가 완전히 이해해서 동의하지 않은 어떤 기준에 나도 모르게 휘둘리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불과 얼마 전에 깨달았다.

과연 '남자 보는 눈'이란 무엇이며, 눈이 높고 낮음은 또 무엇인지, 그리고 어째서 남자를 볼 때는 눈이 높아야 하는지에 대해서 이제껏 아무런 의문을 가지지 않았음을.  


우리는 보통 사귀는 사람이 남자가 아니라 여자, 그러니까 동성일 때는 그 '눈'을 사용하지 않는다.

가령 여자인 내가 어떤 여자와 가까워져서 친구가 되었는데, 그 친구가 좀 가난하고 직업이 불안정하고 혹은 키가 작거나 좀 못생겼다 해도, 거기에 더해 성격마저 그닥 훌륭하지 않다 해도, 사람들은 그와 나 사이에 '눈'이라는 개념을 적용하지 않는다. 수직적 우열을 따지지 않는다.

"너는 왜 이렇게 친구 보는 눈이 없니?"

"그런 친구와 사귀기엔 네가 아깝다."

이런 말은 거의 하지 않는다. 그 친구가 나에게 사기를 치거나 나를 이용하지 않는 한은, 그 친구의 처지가 좀 불운하고 사회적으로 성공하지 못해다고 해서 그런 친구를 왜 사귀냐는 식의 평가는 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람을 조건으로 따지지 않고 사귀는 나의 관대함을 칭찬해줄 수는 있을지언정.  

  

물론 여자와 남자가 다르다는 걸 몰라서 하는 소리는 아니다. 우선 동성의 친구는 다수를 사귈 수 있어서 이런 친구가 있는가 하면 저런 친구도 있을 수 있지만, 이성을 사귄다는 건 단 한 사람하고만 일정 기간 지속적으로 관계를 맺는 것이어서 그 영향력이 다르다. 게다가 대부분의 여자는 남자를 사귈 때 '결혼'을 염두에 둔다. 그러니 두루두루 사귀는 동성친구와는 다르게 더 신중하고 까다롭게 골라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글쎄... 결혼이라는 주제로 들어간다면 나는 여기서 이 얘기를 포기해야 한다. 결혼은 역사의 산물이고, 특정 이데올로기와 종교, 그리고 자본주의와 너무도 깊고 단단히 결합되어 있다. 결혼은 순수한 '사귐'의 차원에서 이야기할 수 없다.

아무리 대부분의 연애에 결혼이라는 그림자가 따라붙는다 해도, 여기서는 잠시 연애에만 집중해보았으면 한다. 여자와 남자의 '사귐' 말이다.       


'사귐'이란 과연 무엇이냐는 근본적인 질문에 온갖 아름다운 대답이 나올 수 있겠지만, 한 가지 분명한 건 누군가를 만나고 사귄다는 건 어떤 이익을 취하기 위함이 아니다. 경제적인 이유, 물리적 안전의 이유, 욕구 충족을 위한 이유로 누군가를 사귄다면 그것은 '사귐'이 아니다. '이용'이다. 좋게 말해도 '활용'이다.


진정한 '사귐'을 나는 이렇게 정의하고 싶다.


"필요하지 않은 만남."


격조했던 지인이 어느날 전화를 해서 반가운 마음에 만났는데 보험가입을 권유했을 때, 우리는 그 만남을 '사귐'이라 여기지 않는다. 아무 필요가 없는데도 만나고 싶고 만나게 되는 관계가 '사귐'이다.  


그런데 왜 남자를 사귈 때는 높은 눈이 필요하단 말인가? 물건을 살 때는 반드시 높은 안목이 있어야 한다.

필요해서 사는 것이고 나를 위해 특정한 용도로 쓰여야 하기 때문에 꼼꼼하게 따지고 평가해야 한다.

남자는 물건이 아니고 사람이다. 경제활동을 해서 돈을 벌어 오거나 끝내주는 섹스를 해줄 머신도 아니고 멋진 외모로 옆에서 나를 빛나게 해줄 장식품도 아니다.  


인간 쓰레기 같은 아무 놈하고나 사귀어도 좋다는 얘기는  아니다. 다만 사람이 사람을 대할 때 적어도 물건을 고르듯이 '보는 눈'이라는 표현을 쓴다거나 누가 누구에게 '아깝다'는 표현을 쓴다는 건 인간을 인간으로 대하는 태도가 아니다. '보는 눈'이라니? 뭘 본단 말인가? 흑인을 노예 삼으려고 이리 저리 살피며 고르던 야만적인 백인도 아니고.

   

사실 우리가 누군가를 고른다고 골라지는 것도 아니란다. 뇌과학과 인간 행동에 대한 최신의 연구들은 하나 같이 말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완벽히 통제할 수 없다고.

여자와 남자가 서로에게 끌리는 가장 강력한 힘은 자기에게 없는 '면역체계'라고 한다. 나에게 없는 면역력을 가진 이성에게 매력을 느낀다는 것이다. 오, 위대한 인류의 유전자여!


유전자에 의해서든 카르마(업)에 의해서든 사귐은 계속될 것이다. 다만 이제부터는 연애를 하면서 생기는 아픔이 다 내가 남자를 '모르고' '눈이 낮은' 탓이라고 자책하며 부끄럽게 여기는 이중의 고통을 스스로에게 부과하는 바보 같은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남자를 인간이 아닌 도구로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던 내 자신을 예뻐해주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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