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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주얼 Jan 02. 2021

이 사람은 내 남자가 아니다

한 겹 더 들춰보는 연애 이야기 (3)

내가 가장 젊고 예뻤을 때, 나보다 키가 작거나 대머리에 늙어 보이거나 미적 감각이라곤 전혀 없는 촌스러운 남자를 사귀기도 했는데, 그럴 땐 어떤 야릇한 뿌듯함을 느끼곤 했다. 나와 그 사람이 팔짱을 끼고 다정하게 걷는 모습을 보면 사람들은 속으로 궁금해할 거라고 나 혼자 상상했다.


"도대체 저 남자에겐 어떤 매력이 숨어있기에, 저 여자가 저렇게 볼품없는 남자와 사귀는 거지?"


밖으로 드러나지 않는 내 남자의 보석 같은 면은 나만이 알고 있으며 나는 그것을 볼 줄 아는 여자라는 우쭐함을 즐겼었다.

사실 생각해보면 그 우쭐함은 나의 어깨를 감싸 안은 남자가 대단히 눈부시고 멋지다는 사실을 인식할 때 느끼는 우쭐함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냥 변태적인 우쭐함이었을 뿐이다.


누군가를 만나 가까워지고 사귀는 일은 행복하다. 이 행복감 속에는 두 사람이 좋은 것을 함께 나누고 다른 것을 주고받으며 서로 변화시키고 변화되어가는 즐거움 외에, 상대방의 존재 자체에서 오는 만족감이 있다.

상대의 외모가 출중하다거나, 직업적 능력이 뛰어나다거나, 사회적 지위가 높다면 그 자체만으로 왠지 모르게 나에게도 자부심이 생겨난다. 이유가 뭘까?

나와 가장 가까운 관계일지라도, 서로 뜨거운 마음을 확인하고 영원한 사랑을 맹세한 사이일지라도, 그는 어디까지나 내가 아니고 엄연한 타인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장점, 혹은 그가 가졌거나 이룬 것 때문에 나의 자존감이 높아지는 느낌의 발생지는 어디일까?

   

존재가 마음 몸으로 화합하여 피아의 경계가 없어진 걸까? 상대를 너무 사랑하기에 그의 훌륭한 자질과 성취를 그저 기뻐해 주는 순수한 마음일까?

아... 물론, 정말로 이런 경지에 이른 게 아닐까 싶은 사람들이 있다. 팬덤이다.


스타를 향한 팬덤의 열정은 나에게는 정말로 신기하게 보인다. 그야말로 별처럼 멀리 있는 사람에게 어떻게 온 마음을 바칠 수가 있을까? 어떤 배우의 연기나 스타일을 좋아한다거나, 어떤 가수의 노래나 외모를 좋아하는 차원과는 완전히 다른, '사랑'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열정이다.

만날 수도 없고 대화할 수도 없고 나의 존재를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전폭적으로 지지하며 그의 모든 활동을 깊은 관심으로 지켜보고 나와 아무 상관없는 그의 성취를 기뻐할 수 있다니!

유동인구가 많은 전철역마다 도배하듯 붙어있는 스타의 생일 축하 광고판들을 보면서 나에겐 의문이 생긴다. 생일 축하 메시지를 당사자에게 보내지 않고 광고판에 띄우는 이유는 내가 좋아하는 스타를 홍보하기 위함인데, 홍보라는 건 더 많은 사람들이 그를 좋아하게 되기를 바란다는 뜻이 아닌가?

사적인 관계에서는 내가 좋아하는 남자를 다른 여자가 좋아하면 절대 반갑지 않은 게 인지상정인데, 팬덤이 스타를 향한 애정에서는 독점욕이라곤 찾아볼 수 없다. 이토록 관대한 사랑이라니!


나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팬덤을 하위문화로 간주했었다. 나의 욕망을 타인에게 투사하면서 자아와 타자의 경계가 사라지는 병적인 현상으로 보았다. 마치 어떤 부모들이 자녀의 성취와 인생을 자신의 성취와 인생으로 착각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다.

헌신적인 부모들은 자녀를 위해 모든 쏟아붓고 언젠가는 보상을 바라지만, 팬덤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스타와 팬덤은 애초부터 어떤 관계보다도 피드백을 받기 힘든 구조에 놓여있다. (물론 가끔씩 팬미팅이 열리기는 하지만 그것도 일대 다수의 만남이니...) 팬덤이 스타를 완전한 타자로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다면 어쩌면 그들의 사랑은 가장 순수한 방식일 수도 있다.   


연애관계에서도 이러한 방식의 사랑이 가능할까? 내 남자 친구의 빛나는 성취를, 내 여자 친구의 아름다운 외모를 나와 어떠한 관련도 짓지 않고 그 자체로 기뻐할 수 있을까? 아마도 그렇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멋진 남자가 바로 내 남자야!"

"이렇게 눈부신 여자가 바로 내 여자야!"


'내 사람' 즉, '나의 것'이라는 소유 개념이 생긴다는 사실을 부정하기 힘들다. 내가 잘난 게 아니고 그 사람이 잘났을 뿐인데, 그 사람이 바로 내 남자이고 내 여자라는 인식 때문에 흐뭇하고 우쭐하고 만족스럽다. 우월하고 귀한 존재가 내 것이 되었다는 성취감을 느끼기도 한다.


하지만 연애를 해본 사람은 알 것이다. 어느 누구도 소유할 수 없고, 소유될 수 없다는 것을. 도파민의 효과가 최고조에 달했을 때는 생일이나 기념일 카드 말미에 'From Yours'라고 서슴없이 적기도 하지만, 그것은 오히려 내가 나 자신을 잃지 않을 자신이 있을 때 쓰는 반어적 표현일 뿐이고, 정말로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소유한다는 건 가능하지 않다.


그렇지만 어렵다. 사람이 사람을 소유할 수 없다는 것을 철학적 명제로서 알고는 있지만, 마치 소유한 것 같은 느낌은 너무 매혹적이다. '나의 모든 것이 다 너의 것'이라는 사랑의 고백은 갑자기 나의 삶을 아찔하게 업그레이드시키고, 너는 나의 것이고 나는 너의 것이라는 맹세는 한없이 포근하고 따뜻한 안정감을 선사한다.


알지만... 그래도 아니다. 아닌 건 아닌 거다. 서로 내 것이 된 느낌 없이도 행복한 연애가 가능할지 궁금하다면 자꾸 시도해보면 된다. 내 것이 아닌 하늘과 숲, 내 것이 아닌 나무와 꽃들에게서는 행복을 느낄 수 있는데, 사람이라고 왜 안 되겠는가?  너무 이상적이라고? 이상은 꿈꾸어야 마땅한 것이고, 꿈꾸는 만큼 이상을 향해 한 걸음이라도 가까워질 수 있다.

내가 지금 사랑하는 이 사람이 '내 남자'가 아니어서 더 행복한 순간, 언젠가 올 거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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