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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잉오렌지 Apr 02. 2024

나는 내 의지로 다시 가면을 썼다

코로나 블루, 나는 그걸 원했다

갑작스럽게 우리 세상에 찾아온 코로나 바이러스, 그 누구도 만나지 못하게 되고 모든 활동을 집 안에서 해야 했던 시간들. 많은 사람들이 외부와 접촉하지 못하고 우울증에 걸려 코로나 블루라고도 불렀던 그때.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그때야말로 나 자신을 정돈할 크나큰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감춰두었던 나의 푸른빛을 다시 꺼낼 때가 왔다. 






첫만남 때, 내가 oo동에 산다고 얘기하자 부동산 정보부터 검색하더니 '너네 집 평수 몇이야?'라고 묻던 친구.


그냥 내 의견을 얘기할 뿐인데 화내지 말라며 내 말은 안 듣고 갑자기 굽신거리기 시작하는 친구.


MT날 일어나서 내가 화장을 하고 있을 때 다가와서 내 민낯을 뚫어져라 관찰하던 친구.


내가 입는 옷과 몸짓, 화장 하나하나를 세세하게 기억하며 아침인사 대신 품평을 해오던 친구들.


내 손을 보더니 '일 한번도 안해본 이쁜 손이네~ 곱게 자랐나봐'라고 비웃던 선배.




모든 사람들이 무의식적으로 자신이 보는 대상에 대한 평가를 속으로 반복하며, 나는 그들의 이러한 무의식적인 평가를 캐치할 수 있을 정도로 조금 예민한 사람이었다.



두 번의 대학 시절에 걸쳐.. 나는 가면과 나 자신을 합치는 법을 배웠다.


수많은 시선들이 나를 주목하고, 나를 괴롭히고, 나를 가면을 쓰게 만든다. 나는 그 시선들에 적응하기 위해서 강하고, 시원시원하고, 이타적이면서도 재치있는 아이라는 화사한 빛깔의 가면을 썼다.


아이러니하게도 가면을 쓰자마자, 가면은 내 얼굴에 눅진하게 눌러붙어 나는 정말로 그 가면에 걸맞는 화사한 사람이 되어간다. 그래서 난 그 시선들을 견디고, 흘려보내고, 오히려 즐기게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즐기고 흘려보낼 수 있는 건 그 때뿐이다.


나는 가끔 집에서 혼자 생각에 빠져있으면서, 내가 들었던 그 '평가'들을 떠올리고 되새기고 되새기고 되새기며 갑자기 분노가 치밀어오르곤 한다. 심지어 몇년 전에 들었던 평가들도 바로 어제일처럼 새록새록 떠오르곤 한다. 


그런 평가들은 절대 잊히지 않는다. 완벽한 망각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아주 조금의 트리거라도 있으면 곧바로 떠올라 내 머릿속을 차지해 30분, 1시간씩 잡념에 빠지게 만든다.


내 의식을 차지하고 있는 주황색 가면이 받은 평가를, 내 무의식에 숨어있던 푸른색 가면이 느끼고 화를 내는 상황에 오게 된 것이다.



그런 모순을, 이제는 정리해야 할 때가 왔다.



완벽한 망각이란 없다. 하지만, 떠올려도 아무렇지 않게 될 수는 있다. 그게 내 목표였다.


나는 내가 가리고 있었던 나의 푸른빛을 다시 꺼낼 때가 왔다고 확신했다.


나는 상황에 맞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푸른색이 어울리는 상황에서는 푸른색을, 주황색이 어울리는 상황에서는 주황색을 자유자재로 꺼낼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둘은 함께 있어야 서로를 보완해줄 수 있으니까.


나는 진지해져야 할 상황에서도 농담따먹기나 하는 분위기 파악 못하는 사람이 되는 건 싫었다. 내가 사랑했던 사람에게 해야 할 감정 표현은 안하고 계산질만 반복했던 것처럼. 어머니와 함께 있을 때 의도적으로 깊은 얘기는 흘려보내고 의미 없는 얘기나 하며 필요한 갈등조차 피해왔던 것처럼. 



그래서 나는 글쓰기를 시작했다. 


그 누구도 만날 일이 없는 고독한 이 시대에서만 할 수 있는 일을 했다. 그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을 수 있는 이 2년을 나는 적극적으로 사용했다. 그 시간동안 나는 오로지 나 자신만을 위한, 나 자신만을 탐구하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글을 쓰는 목적은 단 하나였다. 숨겨두었던 푸른색 가면 또한 의식으로 올려보내는 것. 



그렇게 함으로써 나는 나 자신을 좀 더 이해하고, 어째서 내가 이런 행동을 하는지, 어째서 이런 감정을 느끼는지를 샅샅이 파헤칠 수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나는 어린 시절,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어 괴로워하던 말없는 아이를 살리고 싶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나에게만 초점이 맞춰진 이기적인 선택이었지만.. 


그 이기주의 덕분에 나는 오히려 이타적이라는 평가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그 평가에 익숙해지게 된다.. 이기적인 나는 이타적인 사람이 된다. 그 역할에 몰입한다.




본성이야말로 환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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