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누라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잠자냥의 5분 소설

by 잠자냥

오후 여섯 시를 갓 넘긴 이른 저녁이었다. 아직은 퇴근길 사람들이 몰리지 않아 그리 붐비지 않는 전철, 노약자석에 노인은 아닌, 그렇다고 젊은이라고 할 수도 없는 그런 사내가 깊이 잠들어 있었다. 사내는 3센티미터쯤 자란 스포츠머리를 했는데, 온통 하얗게 세어버렸다. 어린 시절 한약이라도 잘못 먹어서 생각지도 않게 세어버린 그런 머리였다.


잠든 그는 연신 딸꾹질을 해댔다. 어디선가 술 냄새가 희미하게 풍겼는데, 그의 불룩한 배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 많아 봐야 사십 중반을 넘겼을 듯한 나이에 노약자석에 거리낌 없이 앉아 잠든 폼…. 술 냄새의 근원지는 바로 그 사내라는 사실을 누구라도 알 수 있었다.


사내는 그렇게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그러다 깜빡 깨서는 스마트폰을 꺼내 어디론가 통화를 시도했다. 눈은 게슴츠레했고, 끅끅 딸꾹질은 쉼 없이 이어졌다. 전화는 쉽사리 연결되지 않았다. 그는 핸드폰을 손에 쥐더니 곧 다시 잠이 들었다. 손에 쥔 핸드폰 액정 화면에 ‘마누라’라고 뜬 이름이 보였다. 연결 실패였다.


그는 그렇게 마누라, 혹은 ‘최부장님’이라고 저장된 번호로 끊임없이 전화를 걸었으나 모두 연결되지 못하고 또다시 그렇게 잠이 들었다. 그때 사내의 핸드폰이 울리며 액정 화면에 ‘최부장님’이 떴다. 사내는 그 잠결에도 목소리를 가다듬고 옷매무새도 목소리처럼 가다듬더니 애써 정신을 차리고는 전화를 받았다.


“네, 네. 최부장님. 네, 감사합니다. 네, 신경 써주셔서…. 네, 네. 네, 허허. 네, 앞으로 더 잘해야죠. 네, 예, 승진도 했는데, 그럼요. 네네. 네, 덕분에 네.. 하하. 네, 지금 한 잔 하고 들어가는 중입니다. 네, 김 대리하고요. 네, 하하하하. 감사합니다. 네, 들어가십시오.”


사내는 신이 난 듯이 다시 마누라에게 전화를 걸었다. 마누라는 끝내 전화를 받지 않았다. 끅끅 딸꾹질을 하며 사내는 또 눈을 감고 잠이 들었다. 잠든 사내의 목에는 사원증이 걸려 있었다. 그 사원증에는 어느 건설사 이름과 함께 김승환이라는 이름 석자. 그리고 사내의 사진이 박혀 있었다. 사진 속 남자는 머리가 검은 20대 청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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