란덴열차
노면열차를 볼 때 일본의 지브리영화가 떠오르는 이유는 국내에서 더 이상 볼 수 없는 교통수단이기 때문이 아닐까. 1968년 이후로 대한민국에서는 노면절차가 운영되지 않았고, 1995년생인 나에게 노면절차는 한국사 교과서의 일제강점기 흑백사진에서나 볼 수 있는 옛날, 또는 타국의 인상이었다. 심지어 우리 가족이 살고 있는 제주도에는 지하철은 고사하고 기차마저 단 한 대뿐인데 , 박정희 대통령이 기차를 볼 수 없는 섬아이들을 위하여 보낸 '미카형 증기기관차 304호'는 아이들의 인기 놀이터인 삼무공원 정상에 가만히 잠들어있다. 제주에서 태어난 우리 집 아이는 지금까지 제자리에 멈춰있는 기차 밖에 보지 못한 것이다.
아이가 '칙폭'이라고 부르는 기차를 보여주고자 아라시야마에서 시내로 돌아올 때 란덴열차를 타기로 했다. 1,000년이라는 세월이 묻어있는 교토의 오래된 정취를 느낄 만큼 열차는 충분히 느렸다. 운전 방향은 물론이고 우리와 반대인 것이 참 많은 나라답게 란덴열차는 내리면서 요금을 정산해야 한다. 교토에서 이용할 수 있는 대부분의 대중교통이 후불제이며 심지어 버스는 뒷문으로 타서 앞문으로 내려야 한다(도쿄는 완전히 반대다). 지역마다 대중교통의 운영주체가 상이하고 구간별로 요금이 다르게 부과되기에 처음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외국인 관광객 입장에서는 이래저래 헷갈릴 수밖에.
교토 시내와 아라시야마를 이어주는 란덴열차는 운행을 시작한 지 벌써 100년이 넘었고 우리 숙소에서 가장 가까웠던 니조역은 자그마치 1897년에 만들어졌다. 도시철도가 잘 발달한 오사카와는 달리 교토는 버스를 이용해야 하는 경우가 반드시 생기는데 땅만파면 문화재가 나오는, 개발업자들이 혀를 내두르는 경주 같은 도시인지라 공사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1900년에 개통되어 지금은 16개 노선, 300개가 넘는 역에서 매년 15억 명이 탑승하는 파리 메트로와는 완전히 다른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지금이라는 한 시점만을 여행하는 관광객의 입장에선 교토 여행에서 느껴지는 상대적인 불편함이 과거의 유산을 보호함으로써 생기는 당연한 결과라 받아들일지도 모르겠다.
일본 문화의 뿌리라 할 수 있는 교토조차 15세기 오닌의 난을 거치면서 완전히 잿더미가 되었다. 이후 쇼군들의 지속적인 관심으로 교토는 다시 천년의 수도로 되살아날 수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수세기의 노력은 적장(敵將)의 마음까지 흔들게 되는데 2차 대전 중 개시된 미국의 일본 본토 포격을 피해 갈 수 있었으며, 교토를 사랑했던 전쟁부 장관 헨리 스팀슨의 반대로 원자폭탄 투하 지역에서 제외되기까지 했다.
전쟁의 화마를 비껴간 교토조차 피할 수 없었던 것은 이미 비대해진 도시가 더욱 내밀해지고자 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성장통, 바로 재개발 붐이었다. 마치야라는 전통가옥이 대규모로 헐리고 지금의 일본 하면 떠오르는 단조롭고 개성 없는 회색의 아파트가 그 빈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했다. 1964년 세워진 교토타워는 높이 하나로 랜드마크가 되었으나 교토의 산세가 이루는 고즈넉한 음조의 외딴 불협화음으로 남고 말았다. 인간과 도시의 인연이 이곳 교토에선 더욱 질기어 보인다.
1000년의 도시, 100년을 버텨온 오래된 선로 위에서 붉게 물들어가는 교토의 하늘을 바라본다. 앞 뒤로 한 명씩 탑승한 기관사는 쉼 없이 열차와 플랫폼을 오가며 호루라기를 불었고 철도 건널목엔 기차가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자전거에서 잠시 내린 직장인과 학생으로 가득했다. 잠잠히 붉어지는 저녁 하늘아래에서 빛바랜 토리이는 생기를 되찾고 기찻길 옆의 오래된 목조 주택의 현관에는 아직 돌아오지 못한 가족을 부르는 전등이 하나씩 켜지고 있었다. 오래된 도시의 고즈넉한 생기는 기찻길과 건널목, 모든 골목에 힘차게 흐르고 있었다.
원 없이 탄 모양인지 더 이상 노면전차가 낯설게 느껴지지 않는다. 앞으로는 가끔, 그리워지긴 하겠다.
* 일본의 몇몇 지하철 입구는 호그와트로 가는 9와 3/4번 승강장 마냥 숨겨져 있기 때문 관광객이 한 번에 찾기가 쉽지 않다. 구글맵에는 엘리베이터가 있는 입구가 따로 나오지 않으니 아이를 동반하는 관광객이라면 일본 현지 앱 사용을 추천. 대부분의 사철이 역 주변에 회사 소유의 백화점을 소유하고 있어 역과 바로 연결되는 엘리베이터가 있는 경우가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