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어서도 내편, 우리 아빠
학창 시절 영어 수업에는 어김없이 'Who is your hero?'라는 주제로 에세이를 쓰곤 했다. 옆 친구들이 대통령, 경찰, 소방관 등 식상한 주제를 선택할 때 나의 히어로는 '아버지'였다. 내가 태어났을 때 무척이나 기쁘지 않았냐고 물을 때 우리 아빠는 항상 아들 둘을 낳고 싶었다고 했다. 아빠의 아버지, 나의 친할아버지가 빨리 돌아가신 탓에, 우리 아빠는 아들 둘과 함께 목욕탕에서 때 미는 상상을 많이 하셨다고 한다. 비록 고구마처럼 태어난 내가 아들은 아니었지만, 우리 아빠는 그 누구보다도 '딸 바보'로 살아오셨고, 아빠가 나에게 전해 준 그 사랑을 생각하면 언제나 눈에 눈물이 고인다.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라고 묻는 짓궂은 어른들의 질문에도 나는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아빠요'라고 대답했었다. 언제나 나에게는 'YES MAN'이었던 우리 아빠, 그래서 우리 오빠는 어릴 적 그런 아빠와 나의 관계를 많이 이용하곤 했다. 초등학교 5학년이 넘어갈 즘 '비만' 판정을 받게 된 우리 오빠는 1주일에 한 번씩 치킨을 사달라고 얘기하라며 나를 시켰고, 그럴 때마다 언제나 아빠는 YES MAN이었다. 아빠 쟁이었던 나에게도 아빠의 마음을 아프게 했던 날도 있긴 하다. 남자친구가 생겨 온통 관심은 그에게만 있었던 나의 고교 시절, 한국 치킨이 먹고 싶던 그날 나는 퇴근 전 아빠에게 전화했다 '아빠! 회사 옆에 ㅇㅇ 치킨 있는데, 그거 먹고 싶어!' 사실 내 기억은 거기서 끝이었다. 아빠가 퇴근하고 치킨을 사고 돌아왔을 때 나는 정말 오랜만에, 아빠의 기억에 남을 만큼 아주 오랜만에 현관문에 가서 아빠를 맞이했다고 한다. 몇 년이 지나서야 들은 얘기이지만, 아빠는 마음이 많이 아팠다고 했다. 출, 퇴근길에 눈길 한번 주지 않던 딸이 치킨을 사 왔더니 그제야 나를 보러 나왔다며, 아빠는 그 순간을 그렇게 기억하고 있었다. 남들보다 기억력이 좋지 못한 나는 많은 이야기를 잊고 사는데, 나에게 충격적인 이야기는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있다. 그리고 아빠가 그날 웃으며 전해준 아빠의 마음 아픈 이야기도 생생하게 남아있다. 수많은 후회를 해도 아빠에게도 나에게도 잊히지 않은 그날. 아빠가 이 글을 보게 될 때라도 꼭 사과를 하고 싶었다. 아빠 미안 그땐 내가 너무 어렸나 봐.
나의 20대의 시작과 끝, 그 10년의 기간은 엄마 아빠가 없는 곳에서 혼자 지냈었다. '부모'라는 두 글자를 더 깊게 가슴에 새기며 살게 된 소중한 기간이기도 하다. 많이 봐야 1년에 1-2번 보며 살아온 나의 20대, 1년에 한 번밖에 볼 수 없는 상황이 올 때면 엄마 아빠의 늙어버린 모습을 발견하고 마음이 무너졌다. 염색 없이는 흰머리 감당이 안되고, 좋아하던 팥빵도 이젠 소화가 잘 안 된다며 멀리하는 엄마아빠를 볼 때면 가슴이 철렁한다. 나의 속도보다 더 빠르게 늙어가는 엄마 아빠를 발견할 때 이 세상을 원망한다. 100세 시대가 아니라 딱 100살만 더 얹어 200세까지 살게 해 주지 그랬어... 어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수없이 고민해 왔던 나의 20대인데, 늘 보호받았던 내가, 이제는 내가 엄마 아빠를 보호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비로소 큰 슬픔을 느끼는 동시에 나도 어른이 되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쉽지 않다. 우리 엄마 아빠 같은 어른이 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에서 나는 항상 멈추곤 한다. 현재 내 나이 33, 32세에 결혼해 이제는 엄마아빠가 할머니, 할아버지가 될 수 있게 준비를 시작하는 중이다. 이 과정에서의 나의 가장 큰 걱정은 내가 좋은 엄마가 될 수 있을까, 그 아이에게 좋은 환경을 만들어 줄 수 있을까 보다 그 아이를 키워 낸 후 나의 엄마 아빠가 지금과 같을 수 있을까, 더 나이가 들었을 때 그때 우리가 무언가를 하기엔 너무 늦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나를 지배하고, 공포로 빠뜨린다. 그 세월이 야속하지만 조금은 늦게 가기를, 남들보다 뒤처지기를 바라본다.
어릴 적 유학의 꿈을 크게 꾸셨던 엄마 덕분에 나는 초등학교 졸업식도 가보지 못하고 그렇게 오빠와 단 둘이 인도로 향했다. 만 11세의 나이로 떠나는 그 길이 아직도 생생하다. 공항에서의 끝없이 쏟아져 나왔던 눈물, 인도에 도착해 수화기 너머로 엄마 아빠와 통화를 1초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꺼이꺼이 넘어가는 나 자신을 안아줬던 우리 오빠. 기숙사 생활로 매일 했던 새벽 조깅 시간에도 그 학교에서 가장 무섭다던 체육 선생님을 붙잡고 "I want to go back to Korea, I miss my mom & dad" 잘하지도 못하는 영어로 엉엉 울며 1달 넘지 얘기했었다. 내가 힘들었던 것보다 우리 아빠는 두 배, 세배로 힘들었다고 한다. 그렇게 작은 애를 왜 보냈냐며 엄마와 싸우는 날도 있었고, 내가 껴안고 자던 인형들을 보기만 해도 쏟아져 나오는 눈물 때문에 나의 방의 문은 몇 달 동안 닫아져 있었고, 나의 사진들 또한 다 엎어놓고 살았다고 한다. 그렇게 나밖에 모르고 나를 끔찍이도 아꼈던 우리 아빠는 나의 결혼식날 1년 전부터 울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했다고 한다. 아빠의 그 기도가 이뤄졌는지는 나도 알 수가 없다. 나 역시도 엄마 아빠와 눈 마주치지 않으려고 딴 곳만 보고 있었다. 내 결혼식이 끝나고 신혼여행에서 돌아왔을 때 아빠는 이제 나에게 아빠로서의 신분을 다 했다는 듯이 얘기했었다. 그 말이 내가 이제껏 아빠에게 들었던 그 어떤 말보다 슬프게 들렸다. 나를 보호하고 나를 먹여 살려야 하는 인생의 목표에 도달한 것처럼 얘기했던 그 말이 더 이상 나는 아빠에게 기댈 수 없고 아빠의 보호를 받을 수 없는 것처럼 들렸다. 딸을 시집보낸다는 것이 아빠의 삶에서도 쉽지는 않았나 보다. 부모로부터 독립할 수 있도록 경제적 지원을 해주는 것보다, 이제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보호받을 수 있도록 그 손을 넘겨줘야 하는 아빠의 마음이 어느 것보다 힘들었겠다 싶다.
나를 키우는 32년 동안 우리 아빠는 그 어떤 마블 시리즈에 나오는 그 히어로들보다 정의롭고 희생정신이 뛰어난 나의 슈퍼 히어로다. 비록 내가 결혼을 했어도 아빠와 나의 관계는 변함이 없다. 죽을 때까지 아니 죽어서도 내 편일 우리 아빠, 우리 부녀의 관계는 어떤 사람보다 특별하다. 우리들의 특별한 이야기를 모두 담아낼 수는 없지만, 남들의 슬픈 이야기를 전해 들을 때, 올림픽, 월드컵 같은 감동의 물결이 흐를 때 우리 두 사람은 눈물이 흐르고 있고, 정의롭지 못한 사람들을 볼 때면 앞장서서 열불을 내주기도 하는 데칼코마니 부녀다. 엄마는 항상 못된 것만 닮았다며 우리에게 눈을 흘기지만, 어쩔 수 없다. 어릴 때부터 아빠를 닮았다는 것은 나에게는 큰 칭찬이었고, 그런 얘기를 듣는 것이 세상적으로 인정받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를 위해 살았던 아빠의 인생은 내려놓고, 이제는 엄마를 지키며 남은 삶을 보다 행복하고 알차게 살아가는 것이 나의 기도제목이다. 그리고 이제는 내가 엄마 아빠를 지켜야 하는 인생의 목표에 한걸음 한걸음 나가기 위해 주어진 것들에 최선을 다하며 사는 것, 비로소 우리 모든 가족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 나의 소망이다.
아빠가 물려주고 있는(현재 진행형) 김 씨 가문을 나는 멋지게 이어나가 볼게요.
사랑합니다 나의 슈퍼 히어로, 나의 아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