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여행 이전의 세계
지금껏 인생의 질문은 5지선다 중 정답을 골라 답할 수 있었던 질문들의 모음이었다. ‘이 중 틀린 것을 고르시오, 이 중 옳은 것을 고르시오’로 맺음되던 회색 갱지 위 수많은 질문들. 그 모든 질문에는 한 가지의 정답이 있었다. 질문에 답하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정답이 곳곳에 들어있는 교재 한 권을 꼼꼼하게 읽으면 20여개의 질문에 답할 수 있었으니. 그러나 인생의 질문이란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백 권의 책을 읽어도 쉽게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며, 그래야만 하는 질문이다. 대답하기 위해 온 마음을 다해 주어진 생을 대해야만 하는 질문이다. 그것은 나만이 스스로에게 던질 수 있는 질문이다.
대학 입학 후 강렬했던 삶의 목적은 꿈결처럼 사라졌고, 그것이 사라져 비어버린 공간은 조금씩 내부를 차지해나갔다. 그것은 나의 생각과 행동에 변화를 일으켰다. 호기심을 잃고 무기력해졌고, 무엇보다도 나를 스스로 움직이게 하는 동력이 사라져버린 듯 했다. 무엇을 해야하나? 웃음은 줄지 않았으나, 대개 나를 비웃고 세상을 향해 냉소했기 때문이다. 목적은 생의 동력과 같았다. 삶의 진정한 목적을 찾고 싶었다. 그러나 떠올리려 노력할수록 공허했다. 애초에 평생에 걸쳐 온 마음을 다하여 희구할만한 삶의 목적이라는 것이 존재하기는 할까? 쉽게 답할 수 없었다.
들이닥친 차가운 공허에 아늑한 나만의 공간을 만들어야 했다. 다행히도 멈추는 법을 몰랐던 고등학교 3년 동안 기계적으로 나아가는 어떤 습관이 생겨있었다. 동력을 잃은 순간에도 나는 완전히 멈추지 않았다. 멈추면 견딜 수 없이 슬플 것 같았다. 책을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그것은 질문에 대답하기 위한 나만의 언어를 구축해나가는 일이었다. 신생아가 처음으로 모국어를 배우듯이, 스스로 말하기 위해 배웠다. 수많은 작가들이 자신의 언어로 말하는 것을 듣고 읽었다. 매일 아침 8시 반에 일어났다. 세수를 하고 인스턴트 커피를 타서 책상 앞에 앉으면 대개 9시 정도가 되었다. 규칙적으로 생활해야만 읽기 싫은 날에도 책에 손을 댈 수 있었다.
작가들의 언어는 살아있었다. 어떤 대상을 끌고 와 어떻게 비유하는지에 따라 생각의 결이 완전히 달라지기도 했다. 그들의 사유와 사유하는 방식을 온전히 받아들이며 이리저리 휩쓸렸다. 스스로의 언어를 구축하는 일은 스스로의 세계를 만들어나가는 일이었다. 이때, 나의 세계는 형성되는 듯 했다가, 깨졌다가, 다시 붙었다가, 파괴되었다. 읽었던 것들이 텁텁하게 쌓여 생각할 겨를 없이 잠에 들기도 했다. 소설을 더 자주 읽기 시작했다. 등장인물들이 지난하게 헤쳐나가는 진정한 삶을, 내 삶의 가능성으로 바꾸어나갔다. 더 몰입해야 했다. 나는 ‘자기만의 방’이 필요해졌다.
4남매가 사는 집엔 자기만의 방이 없다. 네 명의 옷을 한 곳에 모아둔 옷 방, 네 명이 함께 자는 안방, 그리고 거실이 나의 생활 공간이었다. 친구 집에 놀러가 자기만의 방을 당연하게 누리는 친구들을 부러워했지만, 남매들과의 시끄러운 재미를 떠올리며 질투를 가라앉히곤 했다. 그러나 지금은 절실했다. 집 끄트머리의 작은 창고가 뇌리에 스쳤다. 곧장 창고로 향했다. 창고로 향하는 그 짧은 시간 동안 머릿속에서는 나만의 방을 구상하느라 바빴다. 먼지가 내려앉은 물건들을 버려나갔다. 두 평 남짓한 작은 공간이었지만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어 깨끗이 쓸고 닦는 데에만 이틀이 걸렸다. 쇠창살이 달린 작은 창문 아래 책상과 책장을 배치했다. 그동안 집 이곳저곳 흩어져 있던 책들을 책장에 옮겼다. 곰팡이가 핀 벽지에 서점에서 책을 사고 받은 카뮈의 글이 써진 종이가방을 오려 붙이니 한결 나았다. 보일러가 들어오지 않아 냉기 가득했지만 집의 그 어떤 공간보다도 아늑했다.
그 방에서 나는 점점 더 솔직해졌다. 그곳은 내가 속을 터놓을 수 있는 유일한 곳이었다. 스스로의 언어를 얻는 일은 솔직해지지 않고서는 어려웠다. 입 밖으로 내기 어려운 생각들도 그 곳에서는 한걸음 더 생각해볼 수 있었다. 솔직해질수록 나는 나만의 언어를 얻어갔다. 가장 좁은 동시에 가장 넓은 어떤 곳. 스무 살의 여름부터 스물 한 살의 여름까지, 나의 세계는 2평 남짓한 창고 방, 매일 새로운 하늘을 보여주던 서너 뼘 남짓한 창문, 생각의 지도를 그리며 읽어나간 책들, 그리고 일기장 한 권이었다. 이 세계를 끈질기게 영위해 나가기에 코로나 상황은 제격이었다.
그때 방황하던 나의 시간들은 이 작은 방에서 흩어졌다. 여름이 또 한 번 찾아왔다. 카뮈의 『시지프 신화』와 씨름하던 날이었다. 깨질 듯 푸르던 하늘은 방범용 쇠창살과 그 너머의 100년도 더 된 커다란 이팝나무의 가지들로 조각나고 있었다. 그 조각들에 계속해서 시선이 갔다. 하늘을 바라보는 동안 이 자그마한 방과 작별을 고할 하나의 문장은 고요히, 그러나 강렬하게 떠오르고 있었다.
나는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이 아닌 ’이해해야 하는 것‘으로 대하고 있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