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봄 Aug 29. 2022

민들레의 꽃말은,

바람에 실어 보내는 편지



 길고 긴 여름이 끝나간다. 그간 비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던 하늘도 푸르고 드높게 솟아있다. 나무 틈 사이로 햇빛이 통과한다.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고 그 끝에는 가을이 있다. 곧 민들레도 잔뜩 피겠다. 가을만 되면 장소를 가리지 않고 이곳저곳 피어나니 말이다. 고등학생 때도 그랬다. 집에 돌아가는 금요일이면 아버지를 기다리는 동안 학교 주변을 돌며 민들레를 구경했다. 노랗던 꽃이 며칠 후 하얀 홀씨로 바뀌는 건 몇 번을 봐도 신기했다. 그렇게 자주 보다 보니 애정이 생기고 나만의 꽃말을 붙였다. 노란 꽃은 '아버지'이고, 하얀 홀씨는 '나'이다. 문득 떠오른 비유치곤 괜찮다고 생각했다. 꽃말을 통해 상대에게 마음을 전한다. 돌이켜보면 또한 민들레를 통해 전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을지 모른다.


 민들레는 노란 꽃을 피우며 젊음을 발산한다. 꽃의 수분은 꽃에 이끌린 나비나 벌이 돕는다. 수분이 된 꽃은 고개를 숙여 수분되지 못한 꽃에게 자리를 양보한다. 민들레 밭의 풍경에 기여하지 못하지만 그동안 씨앗을 만드는 데 전념한다. 그리고 며칠 뒤 하얀 홀씨는 부모에게 착 붙은 채 세상에 나온다. 홀씨는 가을바람을 타고 떠나고, 민들레는 초라한 줄기만 남은 채 겨울을 맞는다.



 아버지는 20대 후반에 결혼했다. 그리고 나와 동생을 낳았다. 아버지의 인생은 그렇게 ‘아버지의 인생’으로 바뀌었다.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회사생활부터 편의점까지 가리지 않고 일했다. 어릴 적 아버지를 본 기억이 별로 없을 정도로 말이다. 많은 대화를 나누지 못했지만 어린 나라도 열심히 사셨다는 게 느껴졌다. 고등학생이 되자 변화가 생겼다. 집에서 먼 기숙학교를 다녔던 터라 매주 주말마다 차로 1시간 거리를 등하교해야 했다. 금요일마다 아버지는 퇴근하고 바로 나를 데리러 1시간 거리를 운전해 오셨다. 피곤할 텐데도 아버지의 표정은 웃음 밖에 없었다. 


 차에 단둘만 있다 보니 얼굴을 마주하는 시간도 늘었다. 덕분에 소소한 일상부터 깊은 속이야기까지 많은 대화가 오갔다. 때론 묵묵하게 들어만 주시고, 적극적으로 해결책을 제시하기도 하셨다. 아버지와 함께한 시간이 있었기에 기나긴 기숙학교 시절을 버틸 수 있었다. 포기하지 않고 버틸 수 있게 한 원동력이었다. 이때가 바로 아버지께 의지하며 착 붙어있는 시절이다.




 시간이 흘러 무사히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성인이 되었다. 돈을 벌 수 있는 나이가 된 만큼  사회생활도 시작했다. 당연히 전보다 바빠지니 집에 가는 빈도가 줄어들었다. 일주일에 한 번이 이제는 반년에 한 번으로 바

뀌었다. 매주 볼 땐 몰랐던 사실이 반년만에 집에 오니 선명하게 보였다. 노화란 항시 진행된다는 것 말이다. 아버지는 할아버지처럼 쭈글쭈글해지고 작아졌다. 늙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그리고 그 끝은 정해져 있지만 막상 닥쳐오니 부정하고픈 게 사람 마음이었다. 이제야 돈을 벌어 효도할 수 있는 시기에 아버지의 머리는 하얗게 셌다.


 전역 후 만난 아버지의 안색은 전보다 더 안 좋아 보였다. 간호사인 이모는 아버지께 평소 불편한 게 없었는지 물었다. “피부가 누렇게 뜨고 몸에 힘이 없다. 코피가 나도 멈추지 않고 멍이 잘 없어지지 않는다.”라고 답했다. 대답을 들은 이모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버렸다. 얼른 병원에 가서 정밀검사를 받으라고 권했다. 아버지는 과로 때문이니 영양제 좀 맞고 쉬면 괜찮아질 거라 우리를 안심시켰다. 나 또한 떠오르는 병이 있었지만 부정하고 싶었다. 병원에 모인 친인척 중 의사의 말에 끄덕인 사람이 아무도 없었듯 말이다. 아버지는 ‘급성 골수성 백혈병’을 진단받았다. 때는 11월, 민들레에 겨울이 닥친 시기였다.



 아버지의 삶은 민들레와 같았다. 아니 오히려 민들레처럼 살길 바라는 마음을 빗댄 것뿐이다. 민들레는 겨울이 와도 죽지 않는다. 줄기를 버리고 동면 상태로 변하여 겨울을 견딘다. 그러다 날이 따뜻해지면 새로이 꽃을 피우는 식물이다. 간병인으로써 아버지 곁을 지키는 동안 아버지가 이번 겨울을 버티길, 다시 꽃 피우길 간절히 바랐다.


 그렇게 반년 간 항암치료를 받았다. 몸 안에 있는 암세포를 죽이기 위해 항암제를 투여받았다. 다만 암세포를 죽이는 과정에서 면역력을 담당하는 백혈구도 죽는다. 그나마 남은 정상 백혈구마저 줄어버리니 면역력은 급격히 약해졌다. 각종 병에도 취약해진다. 센터에는 치료를 받다가 눈이 먼 사람, 폐에 물이 차서 응급실로 실려 간 사람이 많았다. 아버지 또한 치료를 받는 과정이 너무 괴로워 몇 번이고 삶을 포기하고 싶어 했다. 강인했던 아버지가 그런 말을 한다는 게 내겐 너무나 충격이었다. 그는 우울한 시절을 버틸 수 있던 이유였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버지께 받은 위로와 다정함, 용기를 그대로 돌려 드리는 것뿐이었다.


 작년 11월부터 2번의 항암치료와 조혈모세포 이식이 이뤄졌다. 첫 번째 항암치료에선 몸이 적응 못해 의식을 잃고 중환자실에 실려갔다. 두 번째 항암치료에선 좁은 병실에 온종일 있게 되니 극심한 우울감에 빠지셨다. 마지막 조혈모세포 이식에선 100% 일치하는 형제자매마저 없어 그나마 젊은 나의 조혈모세포를 받으셨다. 이때는 외부 접촉이 완벽하게 통제된 채 홀로 병실에서 한 달간 입원해야 했다. 아버지는 그조차 버텨냈다. 그렇게 병원에서 받을 수 있는 치료가 끝나고, 4월 봄에 무사히 퇴원했다. 퇴원 선물로 노란 비니를 씌워드렸다. 정말 잘 어울리셨다.



 백혈병은 재발이 잦아 완치가 오래 걸리는 병이다. 무려 5년 간 재발이 없어야 완치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지금은 집에서 요양 중이다. 나는 다시 복학을 했다. 달마다 집에 가면 집안일을 하고 있는 아버지를 볼 수 있다. 묘하게 내 눈치를 보시길래 왜 그러냐 물었다. 내게 미안함 마음을 떨칠 수 없댄다. 또래 애들은 학교 다니고 취업하는 동안 가족을 부양하느라 뒤쳐진 것 아닐까 하고 말이다. 나는 그것에 대해선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민들레 홀씨는 그 수만큼 다양한 방식으로 퍼져 나간다. 바람을 타고 다른 나라로 가는 아이가 있다. 원래 살던 곳보다 더 좋은 곳으로 가는 아이도 있다. 마지막으로, 부모 민들레의 근처에 떨어진 아이가 있다.


 마지막 아이는 다음 해에 꽃을 피운다. 그리고 겨울을 견딘 부모도 그 옆에서 꽃을 피운다. 가족 민들레는 하나 둘 모여 노란 꽃밭을 만든다. 내가 바란 인생의 풍경이 그런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의지하고 함께 살아가는 것. 유학을 가고, 좋은 직장을 다니는 것도 좋지만 결국 모든 길에 다 나름의 의미가 있다고 느꼈다. 나는 가족과 함께 사는 생활에 큰 안정을 얻는다. 그러니 전혀 미안할 필요가 없다고 아버지께 말하고 싶었다. 아버지는 노란 꽃, 나는 하얀 홀씨.


 이것은 민들레 홀씨가 가을바람에 실어 보내는 편지, 딱 그 정도이다.


#photo by unsplash






이전 03화 사이 어딘가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