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0일 오전 6시, 습관처럼 눈이 떠졌다. 정신은 깼으나 몸은 여전히 자고 있는 묘한 상태. 목부터 허리까지 이어진 피로는 몸을 무겁게 만들며 침대를 짓누른다. 이대로 있다간 다시 잠에 들 것만 같아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망설일 틈 없이 곧장 밖으로 나간다. 밖으로 나오니 제일 처음으로 보인 것은 잿빛 하늘이다. 아직은 해가 뜨지 않았나 보다. 뺨을 스치는 바람에 새벽의 서늘함이 남아있다. 2주 전에 자목련이, 지난주에는 개나리가 졌다. 묘한 황량함이 주변을 맴돈다. 시선을 화단 쪽으로 돌렸다. 서너 개의 민들레가 피어 있다. 그중 머리가 하얗게 센 꽃들은 건물 사이로 불어온 바람에 몸을 흔든다. 홀씨는 바람을 타고 흩어진다. 나는 발 밑에 떨어진 홀씨를 조심스레 들어 화단으로 옮긴다. 멀리 가지 못한다면 차라리 부모 곁에라도 있는 게 좋지 않겠나.
오늘은 근무도, 잡일도 없는 자유로운 날이다. 입대한 지 열 달이 넘었지만 이런 날은 처음이다. 갑작스레 생긴 여유에 무얼 해야 할지 당황스럽다. px에 들러 간식을 산다. 도서관에서 어제 읽다 만 책을 읽는다. 그럼에도 시간이 많이 남았다. 더 이상 할 일이 없는 와중에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다.
베개맡에서 진동이 느껴져 눈을 떴다. 아침에 본 것과 같은 천장이다. 전화가 왔나 보다. 엄마였다.
엄마는 경사 진 도로 한 켠에서 편의점을 하고 있었다. 휴게소처럼 지나가는 차들이 많이 들렀고 장사도 그럭저럭 잘 됐다. 문제는 우리보다 밑의 도로에 새로운 편의점이 생겼다는 것이다. 그리고 둘 사이에 커다란 비닐하우스가 세워졌다. 올라오는 차 입장에서 새로운 편의점이 먼저 보이고, 우리 편의점은 비닐하우스에 가려 전혀 보이질 않게 되었다. 차는 당연히 새로 생긴 편의점으로 향했고, 매출은 이전의 1/4로 줄었다. 알바를 안 써도 적자인 상황이었다.
이런 사태를 전혀 예상 못했는지 어찌할 줄 모르는 CU본사, 내 땅에 비닐하우스 짓는 게 무슨 잘못이냐는 아저씨, 안타깝긴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월세를 올려야겠다는 집주인 할아범까지. 모든 게 마음에 안 든다. 모두가 우리를 망하게 하려는 것처럼 느껴진다.
점주인 엄마는 당연히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이주에 한 번씩 하는 연락은 불만 토로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나 또한 군대에 오기 전엔 엄마와 같은 상태였다. 공황이 터지던 불안정한 정신. 생존 본능처럼 군대로 도망왔다.
"요즘은 좀 어때?"
이젠 화가 좀 식었는지, 아니면 너무 자기만 얘기한 게 무안했는지 내게 물었다. 공황이 터졌던 그날, 퇴근하고 돌아오니 엄마는 불 꺼진 거실에서 tv를 보고 계셨다. 벌써 새벽 한 시인데 왜 안 자고 있냐고 중얼대니 이것만 보고 자러 간단다. 나는 조용히 엄마 옆에 앉았다. 오늘 별일 없었냐고 물으셨다. 항상 하는 형식적인 질문임은 알지만, 오늘따라 그 말이 왜 이리 듣고 싶었는지. 이제는 말하고 싶은 게 왜 이리 많은지 말이다.
오늘 있던 일을 담담히 꺼냈다. 보험금 문제로 집안 분위기가 최악일 때부터 이어진 우울, 억울하게 잘린 직장, 진상 손님들, 그리고 오늘 갑작스레 터진 공황까지. 이제 정말 못 버틸 것 같다며 쏟아냈다. 엄마는 끼어들지 않고 묵묵히 얘기를 들어주신다. 마음은 여전히 벗겨진 피부에 바람이 부는 것 마냥 아리다. 얘기하는 도중 빈번히 울음이 터지고,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를 정도로 웅얼거렸지만 엄마는 내 말이 다 멎을 때까지 기다리셨다.
입대를 하고선 거의 매일 글을 썼다. 주로 옛날이야기, 공황 전 후의 이야기를 수십 번 썼다. 그날의 일을 떠올릴 때마다 눈시울이 뜨거워지지만, 담금질하고 두드리다 보면 단단해지지 않을까하고 말이다. 익숙해져야 한다고, 강해져야 한다고 다짐해왔다. 그렇게 지금이다.
"이젠 좀 괜찮은 거 같아."
완전히는 아니지만, 버티고 살 만하다. 오늘이 되어서야 여유가 생겼다. 하지만 마음은 공백을 허용하지 않는다. 현실에서 도망쳐온 사실은 여전하다. 엄마와 아빠, 동생은 여전히 편의점에서 일하고 힘들어 하고 있다. 이제는 죄책감이 그 빈자리를 채웠다.
"군대에 온 게 맞는 선택이었을까. 나만 편하게 지내는 게 너무 미안해."
대화에 공백이 생겼다. 엄마는 숨을 한번 고르더니,
"네 입으로 말했잖아. 이제 좀 괜찮아진 거 같다고. 나는 아들이 괜찮기만을 바랄 뿐이야."
노을 때 시작된 전화가, 근무를 마친 동기들이 생활관에 돌아오는 깜깜한 밤까지 이어졌다. 민들레 홀씨는 흙에 파묻혔는지, 어둠에 가려진 건지 보이질 않았다. 오늘은 별 일이 없어서 할 말도 별로없다. 별 일 없다면 그걸로 됐다는 엄마. 오늘 밤하늘은 이쁘다며 좋은 꿈 꾸시라고 말했다. 엄마는 피식 웃는다. 그날은 구름 한 점 없던 날, 별 일 없었으나 평온한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