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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봄 Apr 02. 2023

기억의 저편에 갇힌 네게 보낸다

문 앞에서 서성이다


'게 무슨 말을 건네야 할까.'


 별이 가득한 하늘은 누군가 광량 조절 스위치를 최대로 돌린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환하다. 별이 보이니 당연히 밤일 거라 머리론 알지만, 눈앞의 풍경은 낮처럼 환해 묘한 꺼림칙함을 일으킨다. 한 아이가 초원에 웅크리고 앉아있다. 그녀를 보고 있자니 의자를 쥐고 있던 손에 무심코 힘이 들어갔다. 이제 나에게는 필요 없는 물건이다. 나보다 그녀에게 훨씬 필요할 것이다. 노란 의자를 전하며, 지금껏 받아온 위로에 내 마음을 더한 진심을, 끝없이 이어질 필연 속에서 이번엔 덜 불행하고 더 행복하길 바라는 소망을 한가득 담는다.


"나는, 스즈메의 내일이야."


아이의 까만 눈동자에 별빛이 담긴다. 유성은 다시 보게 될 날을 약속이라도 하듯 하늘에 그리움을 남겼다.





 어둠과 빛을 가르던 문이 열리고, 상영관을 빠져나왔다. 흥분된 마음은 전혀 가라앉질 않아 친구와 "대단해!"라는 말만 수없이 주고받았다. 참으로 어휘력이 대단한 대화이다. 영화를 본 후에도 여전히 마음속에는 묘한 동요가 남았다. 설렘이나 아쉬움은 아닌 것 같고, 신발에 들어간 모래알 같이 불편한 것이었다. 옆에 있던 친구는 내게 휴대폰 화면을 들이밀었다. 현재 절찬리 판매 중인 '스즈메의 문단속' 소설이었다. 소설을 읽으며 내 속도에 맞게 이야기를 따라간다면 작품의 대부분을 이해하리란 생각이 스쳤다. 그럼 동요의 원인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잔고는 얼마 없지만 책을 주문했다. 텅 빈 통장은 식비를 줄이면 된다는 자신감으로 채운다. 곧이어 이틀 뒤에 도착 예정이란 메시지가 왔다. 묘한 들뜸이 느껴졌다. 친구는 대학원 회의가 있어 먼저 자리를 떴다. 친구에겐 오늘 재밌었다는 메시지를 보내고 책이 오기 전까지 영화 관련 영상을 서칭했다.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인터뷰 영상이 눈에 들었다.


"동일본 대지진이 일어난 지도 벌써 12년이 지났습니다. 어떤 정치인은 재해 피해로부터 완전히 회복되었다고 말하지만,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에겐 그날 일이 상처로 남아있기 때문이죠. 새로운 문을 열고 나아가는 건 물론 중요합니다. 하지만 지금 일본에게 필요한 건, 열어온 문을 확인하고 단단히 잠그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진정으로 다음을 향해 나아갈 수 있으니 말이죠. 제목을 '문단속'이라 붙인 이유도 그러합니다."



"어떻게 하면 자존감을 높일 수 있을까요?"


 과외를 하던 중 학생이 물었다. 그는 중학생인데도 나보다 15센티는 더 컸고, 잘생긴 편이었다. 초등학생 때 미국에서 학교를 다니다 왔고, 운동을 해서 몸도 좋았다. 그런 그가 자신감이 없어하는 게 묘하게 우스웠다. "네가 못난 점이 뭐 있니. 너는 스스로 대견하게 여겨도 될 정도로 가진 것이 많은 사람이야." 나를 쳐다보던 그의 눈이 땡그래졌다. 이런 말은 처음 듣는다고 한다. (... 왜?) 그는 한참을 머뭇거리더니 "선생님도 지금의 저처럼 자존감 낮은 시절을 보냈다면, 어떻게 이겨냈나요?"라고 물었다. 그는 시선을 떨구며 양손을 어찌할 줄 몰라 만지작거리고 있다. 물론 나 또한 자존감 바닥이던 시절을 보냈다. 떠올리고 싶은 시절은 아니지만, 학생은 진지한 답변을 바라는 듯했다. 안타까운 동시에 기특하기도 해서 잠시 수업을 멈추고 무슨 조언이 적절할까 고민했다. 그러기 위해선 제일로 우울했던 2020년의 나를 떠올려야 한다.


......신기하게 단 한 장면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런데 어떤 문장은 회상도 전에 입 안에 도달해 있었다. 삼킬 수도 없는 노릇이라 말 그대로, 내뱉었다."나도 이겨냈으니 너도 이겨낼 거야." 처음엔 그의 질문에 이렇게 답하는 게 맞나 싶었다. 하지만 곱씹을수록 이게 최선이란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수업을 재개했고, 고난도 문제 2번을 풀었다. 학생이 어떻게 푸는지 전혀 모르는 눈치였기에 거의 내가 푼 셈이었지만, 답만은 학생이 적도록 두었다.



 과외 학생의 집 문열고 밖을 나왔다. 하늘을 상가 불빛 때문에 별 하나 없는 어둠뿐이었다. 집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던 중, 왜 예전 시절을 떠올리지 못했는지 문득 궁금해졌다. 회상을 하는데 도화선이 될만한 글이 없을까. 고민하던 중 3년 전에는 열심히 가사를 쓰던 시절임을 알아차렸다. 지금 쓰는 휴대폰에도 남아있을 것이다. 카카오톡 나와의 채팅에 들어가 수차례 스크롤을 위로 올렸다. 3년 전에 도달하니 화면에는 거대한 노란 말풍선이 수십 개가 있었다. 그렇게 하나하나 읽으며 추억에 잠기던 도중 멈칫하게 만든 가사가 보였다.


밤에 간 바다처럼 푸른 것도 어둡게만 다가와
 겨우 잡힌 나의 다짐은 다
전부 잊혀 밀려온 파도들에 싹
모래 위에 적힌 글씨는 다 지워져
상처 난 피부 위 유서만 남아



 가사를 곱씹을수록 그 안에 담긴 감정이 느껴졌다. 세상을 회의적으로만 보던 내 모습이 읽힌다. 묘한 동요는 점점 커지더니 노이즈 캔슬링이 된 듯이 주위의 소음을 잠식시켰다. 약간의 몰입은 시야가 평소보다 높아진 기분을, 접사 사진처럼 휴대폰 화면 이외 주위를 흐려지게 만든다. 시간은 쭈욱 늘어지더니 결국 3년 전에 맞닿는다. 예전의 내가 웅크리고 앉아 있다.



 인스턴트커피와 차 시트 냄새가 뒤섞여 있다. 원래라면 걸어갔을 테지만 엄마의 불평을 들어주는 대신에 차를 타고 편하게 출근하는 중이다. 가게 건물주인 할아버지가 엄마에게 모욕적인 말을 했단다. 아무렇지 않은 일인 마냥 태연하게 말하는 엄마를 보았다. 공허한 눈빛에는 무언가 체념한 듯한 느낌이 읽혔다. 편의점 앞에 나를 내려주고, 오늘도 내 가게 잘 부탁한다며 손을 흔드셨다. 직원석에 앉아 텅 빈 매장을 지키고 있었다. 왜 나는 우리 엄마를 욕한 사람 건물에서 일하고 있지란 생각이 피어났다. 무언가가 뚝 끊어지는 불안한 소리가 들렸다.  


 단 한 방울로 바다가 넘치고, 파도는 재방을 무너뜨렸다.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쏟아지는 감정들. 대부분이 그간 참아왔던 것들이다. 하나하나는 버틸 만해도 한 번에 들이닥치면 감당할 수 없다. 뇌는 두개골마저 부술 기세로 팽창하고 있다. 침, 눈물, 땀으로 온몸은 젖었고 이대로 죽는 거 아닌가 하는 공포가 밀려왔다. 엄마도, 아빠도, 심지어 제일로 의지했던 지인에게 마저 전화가 닿지 않았다. 물에 잠긴 채 이리저리 휩쓸리며 발버둥을 쳤다. 어두운 창고에 웅크려 지금의 재난이 얼른 지나가기만을 바랄 뿐이다. 창고 안은 평소보다 서늘한 느낌이다.



 찌른내와 썩은 피부, 약품, 락스가 뒤섞인 이 냄새는 세 달을 맡아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아버지의 전신은 뱀처럼 갈라졌고, 스무 개의 손발톱 중 절반 이상이 빠져 있다. 나는 떨어진 피부 조각을 돌돌이로 청소하고 소변 주머니를 익숙하게 비운다. 아빠는 공허하게 나를 바라보며 미안하다고 말했다. 아빠가 걸리고 싶어서 걸린 게 아니잖아라고 답해도, 결국 대화는 응급실에서 내가 그냥 죽었어야 했는데로 결론이 난다.


 익숙한 대화 패턴이지만 왜 오늘따라 참을 수 없을 만큼 화가 날까. 목소리는 어느새 간호사실에서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커졌다. 내가 아빠한테 발목 잡혀 원망하고 있다면, 여기에 있을 것 같냐고 소리쳤다. 천장이 묘하게 울리고 있다. 나는 아빠를 살리고 싶어서 힘들어도 버티고 있는데, 죽고 싶다면 나는 뭐 때문에 여기 있는 거냐고. 내가 버티고 있는 이유를 맘대로 뺐어가지 말라고 한바탕 쏟아냈다. 더 이상 아빠 얼굴을 못 보겠어서 병실을 나왔다. 문 앞에서 기다리던, 혹은 우연히 서있던 간호사와 눈이 마주쳤다. 하지만 신경 쓸 틈이 없다. 곧바로 복도 구석에 달려가 웅크리고 앉았다. 아무에게도 안 들렸음 해서 고개를 파묻었다.



 예전의 내가 웅크리고 앉아 있다. 나에게 무슨 말을 건네야 할까. 공황에 빠졌으나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다. 고모와 할머니는 아빠의 쾌유를 위해 기도한다지만 아무도 나를 걱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만은 나를 지켜보고 있다. 적어도 연락 안 되는 지인보다, 대답 없는 하나님보다 내 마음은 내가 제일 잘 알 것이다. 이때로부터 3년 후인 내가 그들을 지켜보고 있다. 절망적인 상황조차 버틸 수 있는 지혜를 터득한, 아직 자살하지 않은 내가 있다.


'나도 이겨냈으니 너도 이겨낼 거야.'


 과거의 나 또한 알고 있다. 정말 신이 있다면 그건 '미래의 나'일 거라고. 언제나 내 곁을 함께 하고, 누구보다 내 마음을 알아주는 존재가 있다는 사실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안정을 주니까 말이다. 미래의 내가 있다는 건 지금의 상황도 반드시 이겨내리란 확신을 준다. 내일의 나는 더욱 강인한 사람이 되리란 희망을 준다. 눈물이 약간 옅어진 틈에 허공을 바라보았다. 


'그도 이겨냈으니 나도 이겨낼 거야.'


 시간이 지나 파도는 썰물처럼 뒷걸음질 친다. 눈은 좀 부었지만 수건으로 물기만 닦아내면 원래와 크게 다를 바 없다. 아직은 피부가 벗겨진 속살처럼 마음이 예민하지만 묘하게 후련한 기분이다. 바지 주머니에 진동이 울린다. 확인하니 전화가 왔고, 친구였다. 내 이름으로 뜬 수십 통의 부재중 전화에 급히 연락했다고 한다. 숨 찬 그의 목소리는 나의 마음이 조금씩 열게 만들었다. 그에겐 아픔을 털어놓은 적이 없어 조심스러웠지만, 끼어들지 않고 묵묵히 들어주는 그의 태도에 감정이 쏟아졌다. 다시 만조가 되었는지 눈물이 멈추지 않는다.


"ㅇㅇㅇ환자 보호자시죠?"

 웅크린 채 고개만 들었다. 문 앞에서 봤던 그 간호사다. 시선은 나와 같은 높이인데 왜 그런가 보니 무릎을 굽히고 있다. 잠시 옆에 앉아도 되냐고 물었다. 동그란 안경 너머로 보이는 눈매가 부드러워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먼지 쌓인 바닥을 아랑곳 않고 앉았다. 내가 이 병동에 있는 보호자들 중 제일 나이가 어리길래 눈길이 갔단다. 아버지를 위해 열심히 견디는 건 대견하지만, 혼자 짊어지지 않아도 된다 말했다. 안경을 벗지 않았는데도 눈앞이 뿌예졌다. 아버지의 혈액 수치가 계속 좋아지고 있는 것. 담당 교수님이 엄청 대단한 분이라는 것. 자신은 아직 연차가 적지만 여기 병동에 있는 간호사쌤들은 다 대단하다는 등. 듣다 보니 자기 직장 자랑 같으나, 마지막엔 아버님은 분명 완치될 거라고 응원을 전했다. 흐릿한 시야 너머로 그녀의 맑은 미소가 담겼다.


 그들의 눈동자에 작은 빛이 돌아왔다. 그걸 확인한 것만으로 충분하다. 그리고 스크롤은 작년에 썼던 가사까지 내려왔다.


노랗던 꽃잎이 어느새 하얗게 변해

첫눈이 와

눈가에 고여 눈꽃이 함께 폈네

한 때 곁에 있던 존재는

멀어져도 바람에 편지를 실어 보낸데


...


모든 순간은 곧 지나가

천천히 같이 갈까

손을 놓고 싶지 않은 순간들이

어째 내 인생엔 가득할까



 밤 9시 반, 집 앞에 택배가 도착해 있다. 소설책이다. 약간은 마음이 들뜨는 게 느껴졌다. 뜨거운 물로 무거운 생각들과 피로를 씻어내고 새로운 몸가짐으로 나왔다. 책 표지는 파란 바다와 노란 노을이 가로무늬로 번갈아 빛나고, 그 위에 하얀 문이 떠있는 그림이었다. 어두운 방 안에 앉아 탁상등만을 켜두었다. 빛은 반대편 구석까지 어둠을 슬그머니 몰아넣었다. 잔잔한 노란빛을 두고 책을 읽었다.


"아침이 오고 또 밤이 오고 그것을 수없이 반복하며 너는 빛 속에서 어른이 될 거야. 틀림없이 그렇게 돼. 그렇게 되도록 다 정해져 있어. "


 우린 각자 그 크기는 다를지언정 과거에 얽매여 살고 있다. 영화를 보고 나서 든 동요는 내가 과거를 대하던 방식을 잠시 잊고 있었기에 일어난 듯하다. 떠올리고 싶지 않다고, 묻어두는 건 최선의 해결책이 아니란 걸 이제는 안다. 지금껏 가사를 쓰고, 에세이를 온 것은 과거의 문을 하나씩 닫는 행위였다. 정면으로 마주하고, 상처를 보듬고, 열리지 않게 단단히 잠근다. 기억의 저편에 갇힌 나에게, 위로를 건넬 지금의 나를 보낸다. 종종 힘든 때면 모든 걸 이겨냈을 미래의 나를 떠올린다. 미래의 나는 지금의 내게 희망을 준다. 지금의 나는 과거의 내게 위로를 준다. 우리 셋은 결국 끝없이 이어질 필연 속에서 살고 있는 셈이다. 오직 자신만이 근본적이고, 온전한 치유를 건넬 수 다.


#photo by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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