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막의 여행자는 바다를 동경한다.
암막커튼이 쳐진 방은 마치 동굴과도 같다. 그림자마저 가리는 어둠이 집 안을 빈틈없이 채운다. 나는 욕실 불빛에 의지한 채 젖은 옷은 세탁기에, 몸은 샤워부스에 집어넣었다. 바다에 빠지고 왔나 싶은 모습이 거울에 비친다. 짠내가 나는 걸 보면 반은 맞는 얘기 같다.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한다. 그리고 6시간 전에도 그랬듯 침대에 몸을 던진다. 어린 시절에는 참 많은 꿈을 꾸었으나 지금 내 마음은 메말라버렸다. 아이는 그렇게 오랜 시간 겨우 내가 되려고 아팠던 걸까. 모르겠다. 그저 이 순간이 얼른 지나가기만을 바랄 뿐이다.
...
오랜만에 꿈을 꾸었다. 어릴 적 다리 밑 냇가에서 놀던 기억이다. 밖은 1분만 서 있어도 땀이 나는 더위이다. 반면 다리 밑은 그늘이 져있어 꽤 시원하다. 냇물은 바닥이 보일 정도로 깨끗하다. 방금도 피래미 몇 마리가 내 다리 사이를 지나갔다. 친한 형에게 물을 튀기고, 이름도 모르는 누나에게 물고기 잡는 법을 배운다. 십 센티정도 되는 물고기조차 얼마나 커 보이던지, 애기 손톱만 한 비늘을 관찰하다가 펄떡거림에 놀라 놓치고 말았다.
해가 떨어지니 으슬으슬 추워지기 시작한다. 마침 가까운 곳에 친구 집이 있다. 차례로 혹은, 한 번에 샤워실에 들어가 마지막으로 물을 갖고 논다. 모래알 없이 깨끗해진 몸으로 나왔다. 놀 땐 뒤로 했던 피로가 이제야 몰려온다. 마침 친구의 다리가 보여 베개 삼아 누웠다. 아까 뒤로 넘어졌던 친구가 초콜릿 아이스크림을 건네주었다. 여전히 엉덩이를 비비고 있길래 엉덩이가 빨개 보인다고 놀린다. 다 같이 깔깔 웃는다. 베란다 너머로는 잔디 냄새와 풀벌레 소리, 노을빛이 넘어온다. 긴장을 푼 채 물 위에 떠있는 듯한 기분을 느낀다. 그렇게 하나둘 눈꺼풀들이 감긴다.
2주가 지나고 모든 시험과 과제가 끝났다. 종강을 했음에도 명치 부근은 답답했다. 앞서 간 사람들은 여전히 헤매는 중이고, 나는 감정이 메마른 채 마음은 무미건조했다. 다시 회의적인 예전으로 돌아왔다. 이번엔 버텨줄 주위가 건재하지 못하다. 주위의 도움 없이 홀로 무너진 공간을 세우기란 힘든 일임을 잘 알고 있다. 사막에서 뭉쳐지지도 않는 모래로 성을 쌓는 기분이다.
아빠에게 연락이 왔다. 한 학기 동안 수고했다며 이번 기회에 같이 여행이나 다녀오자는 것이다.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은 마음이 맞았던 걸까. 그렇게 아빠와 함께 여행을 떠났다. 아빠가 운전을 하고 나는 조수석에 앉았다. 동생은 뒷좌석에서 자고 있다. 지금 차 안에는 단 둘만 깨어있다. 종강 직후, 아빠에게 '민들레의 꽃말은, '을 읽어달라고 부탁했다. 글을 발행한 지 9개월 만에 보여드린 셈이다. 하지만 이제는 내가 글쓰기를 좋아하고, 하고 싶은 일 중 하나라는 걸 가족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겨우 짜낸 용기의 산물이었다.
"내가 쓴 글 읽어보니까 어땠어?"
운전석에 있던 아빠는 내 쪽을 잠시 보더니 다시 정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호기롭게 물어봤으나 나는 시선도 맞추지 못한 채 손만 꼼지락거렸다. 정적이 흘렸다. 차 안 공기가 답답하게 느껴져 창문을 살짝 열었다. 비난이라도 좋으니 뭐라도 말해주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누군가에게 말을 거는 거 같아서 좋았어."
순간 아빠를 쳐다봤다.
"뭐라고?"
"글이 누군가에게 말을 거는 거 같았다고."
"아니 그 뒤에."
"..."
"그 뒤에 뭐라 했냐고."
"... 좋았다고."
솔직히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 그의 입은 아직 할 말이 남았는지 움찔거리고 있다. 나 또한 기대하는 마음이 커졌다.
"고모들한테도 보여줬어."
이번에는 진짜 잘못 들었나 싶어 아빠를 쳐다봤다. 아직 그들에 대한 미움이 해소되지 않았다. 홀로 아빠를 간병하며 모든 일을 떠안았던 작년. 하루에 2시간씩 자면서 몸과 마음 모두 한계에 다다른 상황 속에서 내가 왜 그들을 달래주기까지 해야 하나란 생각을 했다. 지금이야 머리로 그들 입장을 이해하지만, 미워하는 감정은 여전했다. 아빠는 그런 내 속도 모르고 칭찬을 할 때와 같은 표정을 짓고 있다. 그들에게 왜 보여줬냐며 책망하려던 순간,
"그렇게 힘들었을 줄 몰랐다네. 읽고 펑펑 울더라."
입술이 닫혔다.
자존감에 관해 지인과 나눈 대화가 이어진다.
"네가 말한 그 공간 말이야. 혹시 바다가 아닐까? 아이유 노래 중에 있잖아. 그... 뭐였지?"
그는 머리를 싸매며 가사를 떠올려 보려고 애쓴다. 그러다 기억 저편에 있던 가사가 떠올랐는지 조금씩 음을 넣어가며 부르기 시작했다.
어린 날 내 맘엔 영원히
가물지 않는 바다가 있었지
...
물결을 거슬러 나 돌아가
내 안의 바다가 태어난 곳으로
"공간은 한정되고 부서질 수 있지만, 바다는 무한하고 변함없잖아. 어릴 때야 부모님의 보살핌 받으며 자라니까 메마를 일이 없지만, 어른이 되면 자기가 알아서 채워야 하고. 그 사람에게 안정을 주는 것들로 말이지. 누군가에겐 그게 직장 혹은 가족이 될 수 있는 거고. 차 마시는 거, 반려동물과 함께 하는 거, 좋아하는 것들이겠네. 나? 나도 당연히 있지. 뭐... 커피 마시는 거, 헬스 하는 거, 게임하는 것도 있고. 그리고 네 글도 있어. 네 글을 읽다 보면 나도 꽤 위로를 받거든. "
여행 마지막 날, 점심으로 백반을 먹고 집으로 돌아갔다. 하늘은 아침부터 잿빛이더니, 떠날 때가 되어서야 비를 뿌리기 시작했다. 집에 돌아가면 나가지 말고 쉬어야겠다. 가고 싶은 곳이 있었지만 시내로 나가는 건 내일로 미루자.
...
문을 여는 동시에 청명한 종소리가 울린다. 들어가자마자 제일 먼저 보인 것은 갈색 나무 바닥, 그다음으로 하얀 책상, 너머로는 바닥과 같은 색의 벽이 있다. 경성 컨셉의 이 카페는 휴학했을 당시 자주 글을 쓰러 오던 곳이었다. 오랜만에 왔음에도 사장님이 반갑게 맞아주신다. 주문한 것들을 붉은 티테이블로 받아 널찍한 자리에 앉았다. 사진을 찍고 커피를 한 모금 들이킨다. 고소한 견과류 향이 입안 가득 퍼진다.
정결하고 순결한 생각들이 이곳에 아름답게 결정되기를 바란다.
벽에 적힌 문구였다. 작년에도 저 문구를 읽었고, 브런치 첫 글 '장마가 시작되었다'를 만들었다. 어떤 감정이든 일단 쏟아내고 나면, 처음에는 뜨겁더라도 시간이 흐르며 천천히 식게 된다. 어느 정도 식고 나면 오히려 마음을 진정시키는 따스한 차가 된다. 내겐 브런치 글들이 그랬다. 오랜만에 본 첫 글에는 그런 따스함이 남아있었다.
손은 벌써 다음 글에 닿아있다. 과거 선조들은 고백하고자 하는 마음을 꽃으로 전했다. 나 또한 민들레로 마음을 전했다. 정말 힘든 시기였지만 덕분에 가족의 소중함을 깨닫는 기회가 되었다고. 더 이상 내게 미안해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그 마음을 이제는 그들 앞에서도 말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가족과 함께 있는 삶에 서있다.
하지만 너무 지쳤던 걸까. 회의적인 사람이 되었다. 감정이 무뎌진 사람이 남에게 감정을 전하는 글을 쓸 수나 있을까. 어릴 적부터 품어온 동경에 닿을 수 없으리만치 멀어지는 기분이 든다. 그럴 때마다 꾸준히 응원을 보내는 주변 사람들을 떠올린다. 매 글마다 장문의 감상문을 보내주는 사람, 글이 나올 때마다 즉각 봐주는 사람, 네가 보는 세상을 출력해 달라며 한결같은 용기를 주는 사람. 가족, 친구, 동료 모두 고마울 따름이다.
깊게 숨을 들이쉬고 잠시 멈춘다. 천천히 내쉬며 부정적인 생각을 같이 내보낸다. 조금은 생긴 마음의 여유. 이제는 그간 등한시했던 내면을 들여다본다. 기억의 저편에 갇힌 과거의 내게 지금의 나를 보낸다. 우리는 모든 순간을 의식하며 지낼 수 없다. 의식을 놓친 순간부터는 관성대로 살게 된다. 그러니 각자 그 크기는 다를지언정 과거에 얽매여 살 수밖에 없다. 떠올리지 않는다고, 묻어두는 건 최선의 해결책이 아니다. 마주하는 것이 어렵더라도 진심을 담은 위로를 내게 보낸다.
그렇게 카페에서 꼬박 네 시간 동안 글을 썼다. 메마른 마음을 채우고자 바다로 떠나는 이들을 위함이다. 앞선 글처럼 결국 나를 위로할 테지만, 누군가에게도 닿기를 바란다. 끝없이 펼쳐질 무너지지 않을 바다를 남긴다. 발자국들이 파도에 쓸려 사라지고 돌아갈 길이 잊혀진대도, 이 글만은 여기에 남아있을 것이다. 감정에 휘둘릴 때, 가족의 일로 흔들릴 때, 차가운 사람이 될 때 언젠가 다시 찾아올 것이다.
나의 글이 곧 나의 길임을 이제는 안다.
핀란드 여행의 마지막 날. 헬싱키 남쪽에는 수오멘린나라는 작은 섬이 있다. 같은 학과 친구, 극단에 다니는 친구, 나 이렇게 셋이서 마지막을 기념할 일몰을 보러 갔다. 그날은 핀란드에서 본 하늘 중 제일 맑은 날이었다. 해빙을 가르는 배 위에서 하얀 바다와 노란 하늘을 눈에 담았다. 섬에 도착하고 일몰을 볼 수 있는 전망대로 향했다. 인파를 뚫고 해안바위에 앉아 해가 바다에 삼켜지는 걸 본다. 세 명 모두 아무 말 없이 그 광경을 지켜봤다. 그리고 누군가 말했다.
"해는 시간이 지나면 넘어가게 되잖아. 우리의 삶도 시간이 지나면 넘어가고. 근데 해는 넘어가서도 약간의 붉은 노을이 남기더라고. 물론 이 장면이 그리고 누군가의 존재도 언젠가 잊히겠지만, 내 삶이 만든 무언가가 아주 짧은 시간이라도 괜찮으니 붉은 노을처럼 여운을 남겼으면 좋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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