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년 동안 살던 집을 떠난다. 작년 8월, 복학을 위해 입주할 당시에는 아무것도 없었는데 지금은 이사용 박스 4개를 가득 채우는 집이 되었다. 처음 들고 온 박스는 두 개뿐이었는데 일 년 새에 두 배가 되었다. 대체 무엇이 더 생긴 건지 모르겠다. 아무튼 많은 걸 얻어왔으리라 좋게 생각하련다.
제일 먼저 들고 갈 것은 60 x 60cm 보석 십자수 그림이다. 색 구슬 한알 집어서 정해진 자리에 붙이는, 수만번의 작업이 필요한 그림이다. 그래서 시간이 날 때면 라디오를 틀어 놓고 작업했다. 복잡한 생각을 정리하는 데에는 좋았다. 손바닥만 한 면적을 채우려면 4시간은 족히 걸리지만, 행동에 대한 결과가 곧바로 보인다는 게 매력적이었다. 두 달에 걸쳐 그림을 완성했다. 언제든 잘 볼 수 있도록 노트북 옆자리에 두었다. 글을 쓰다 지칠 때면 고개를 돌려 그림을 본다. 두 달간의 노력을 보며 뿌듯한 기분을 느끼고 다시 작업할 힘을 얻는다.
그림 속 캐릭터는 "무민"이라 불린다. 핀란드 작가 토베 얀손이 그들의 어머니이다. 작년 10월, 해외 연수로 핀란드에 간다는 걸 공지 받고, 무민 그림을 만들어보자는 아이디어로 시작된 작업이었다.
핀란드 탐페레에는 무민 박물관이 있다. 그곳 직원 분께도 내가 만든 무민 그림을 보여드렸다. 기분 좋아지는 칭찬을 해주신다. 머그컵과 컵받침, 초콜릿을 기념품샵에서 사는 와중에 그림엽서를 하나 더 챙겨주셨다. 무민 세계관처럼 따스한 사람을 많이 만났던 여행이었다.
다음으로 이탈리아로 떠났다. 북부에서 남부로 내려오는 동선을 따라, 밀라노 - 피렌체 - 로마 - 나폴리를 갔다. 여행의 목표는 각 도시에 있는 미술관을 최소 한 개씩 들르는 것. 교과서에서 봤던 작품을 직접 실물로 보는 건 짜릿한 일이었다. 미술관을 나오면 마지막으로 제일 마음에 드는 작품을 꼽고, 그 작품으로 만든 기념품을 산다. 벽면에는 그렇게 모은 엽서와 사진들이 붙어있다. 벽지가 뜯어지지 않도록 조심스레 떼며 지난 여행을 회상한다.
침대 옆에는 작은 원목탁상이 있다. 자기 전에 읽을 책을 둘 용도로 산 것이다. 요네자와 호노부의 고전부 시리즈와 이도우 작가님의 책을 넣었다. 이들의 책을 읽으며 소설 출간이라는 꿈을 키웠다. 파리 여행을 갔을 때 셰익스피어 서점에서 산 '악의 꽃' 시집과 '인간실격'도 있다. 그렇게 탁상에는 읽은 책과 읽어볼 책이 순서대로 쌓여 있다. 이제는 구분 없이 이사박스에 넣는다.
다음에는 녹음용 마이크와 오디오 인터페이스를 넣는다. 앞선 그림과 녹음 장비는 충격에 예민하다. 사이 사이에 끼워 넣은 옷이 완충제 역할을 해주길 바란다. 이 장비들로 방학 동안 음악 앨범을 만들었다. 23학번 프로듀서 후배와 만든 합작 앨범이다. 대학 생활의 마지막 음악 활동일 테니 열심히도 했다. 한 달간 하루도 빠짐없이 장비를 꺼내 썼으니 말이다. 밤낮 구분 없이 가사를 썼다. 암막커튼을 치고 낮에는 밤처럼, 밤에는 모든 조명을 켜고 낮처럼 지냈다. 그 결과 9곡이 담긴 앨범이 만들어졌다.
https://youtube.com/playlist?list=PLrcgYLu5ao5xKP0juOe5RSJa3C7QqV23K&si=Uk4t0FKZSfJGXe7-
입주할 당시 있던 기본으로 제공되던 블라인드는 제 역할도 못하는 물건이었다. 역이 근처에 있는 지라 소음도 상당했는데 때문에 입주하고 몇 달 동안은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그래서 원래 있던 블라인드는 떼고 암막커튼을 새로이 달았다. 지난 1년 간, 특히 방학 동안 요긴하게 썼지만 가져가기엔 부담스럽다. 집주인 분께 연락하여 놓고 가도 되냐 물었다. 놓고 간다면 오히려 좋다고 고맙다 하신다. 원목 탁상, 전자레인지, 의자처럼 회사 기숙사에도 있을 것들은 당근마켓에 내놓는다. 다행히도 다 팔린다.
이제는 챙길 것이 아닌 버릴 것을 정한다. 프라이팬, 냄비, 그릇. 싱크대 밑에 쌓인 조미료, 냉장고 안의 음식. 과외할 때 썼던 중고등학교 문제집까지. 돈을 아낀다고 요리해 먹고, 월세를 내기 위해 과외를 했다. 이제는 남이 해주는 밥을 먹고 기숙사에서 지낸다. 더는 식비와 월세 걱정을 안 해도 된다. 여러모로 압박이었던 돈에 대한 걱정도 버릴 수 있을 것 같다.
이사 박스를 현관 앞으로 옮긴다. 가구들은 중고로 팔아 없앴다. 종량제와 음식물은 미련없이 버렸다. 마지막으로 청소만 한면 끝이다. 바닥을 간단히 쓸은 후에 물걸레로 구석구석 훑는다. 화장실은 락스를 뿌린 뒤에 뜨거운 물을 뿌려가며 솔질한다. 집을 입주할 때 당시로 되돌린다. 내가 이곳에 있었다는 흔적조차 남지 않도록 깨끗이 말이다.
한 시간 뒤, 집주인분이 오셨다. 퇴실 전 점검을 위해 방을 둘러보신다. 7평도 안되는 방이라 확인이 금방 끝났다. 내게 깔끔하게 청소해 주셔서 감사하댄다. 나는 덕분에 좋은 곳에서 일 년 간 잘 지냈다고 답했다. 보증금을 돌려받고, 짐을 들고 나온다. 집의 마지막 모습을 눈에 담는다. 통창 너머로 보이는 강과 산과 하늘의 풍경. 수많은 글과 음악이 만들어진 곳. 우울할 때도 있었으나 대부분 평온하게 쉴 수 있던 곳. 이곳에 살던 나를 이제는 정말 떠나보낸다.
여행을 떠났다. 창을 열면 바다가 보이는 호텔에 체크인했다. 친구는 짐을 품과 동시에 침대에 몸을 던진다. 사람의 흔적 하나 없던 침대 시트는 순식간에 구겨졌다. 나는 베개를 침대의 끝으로 옮긴 뒤에 누웠다. 그래야 누워서도 바다를 볼 수 있다. 해변가에 앉아 바다를 보는 사람들을 본다. 비가 오려나 구름이 잔뜩 껴있다. 지평선을 경계로 하늘과 바다가 이어진다. 두 개의 음울한 푸른빛이 방으로 들어왔다.
한참 바다를 보다가 눈을 감았다. 지난 1년 중에 이리 평온하게 지낸 적이 있었나 싶다. 바다의 이미지가 잊힐 때쯤 다시 눈을 뜬다. 눈을 감아도 눈앞에 생생하게 바다를 그려낼 수 있을 때까지 감고 뜨다를 반복한다. 바다 위로 잘게 부서진 햇빛은 파도와 함께 해변으로 밀려온다. 내일이 되면 체크아웃하고 떠날 곳이긴 하다. 하지만 언제나 지금이 중요하지 않겠나. 침대에 몸을 맡기고 눈을 감는다. 어린 시절의 꿈을 꾸길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