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땡이 슈퍼맘
특정한 이름, 특정한 자리가 있다면, 보통은 거기에 가장 어울리고 알맞은 준비된 사람이 그 이름을 얻는다. 가장 쉽게 떠올릴 수 있는 건 학창 시절의 반장선거, 회사의 승진 및 발령 정도랄까? 어느 이름을 얻어 그 자리에 오른다는 건 그만큼 많은 타인이 그 이의 역량을 믿고 기대한다는 뜻일 테다. 그렇게 이름을 얻은 자들은 본인의 결정과 퍼포먼스에 책임을 진다.
한편 우리말에는 이런 격언도 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 역량이 부족한 사람이 어쩌다 특정 자리에 오르게 되었는데, 스스로 그 자리에 알맞은 사람이 되려 부단히 노력하다 보니 정말 ‘그 자리에 어울리는 괜찮은 사람이 되었다’는 뜻이다. 그러고 보면 이 이야기는 세상의 모든 엄마를 위한 것이 아닐까 싶다.
엄마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리고 그 새로운 이름에 걸맞은 책임과 의무가 따랐다. 고민하고 따져봐야 할 생각의 반경이 넓어졌다. 아니, 넓어진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바뀌었다. 이전까지 내 삶의 중심은 나였는데 엄마라가 되니 그 중심축이 변했다. 아이, 그리고 가정으로. 사실 이것만 잘하기도, 이것만 생각하기도 매우 어렵고 버거운 일이었는데, 생각이 많은 이 사람은 그 발을 여러 군데 걸쳐 놓았다.
새로 얻은 의무인 육아와 가사를 잘하는 것은 물론, 결혼 전의 일상처럼 사회생활도 잘하며 돈도 벌고 싶었다. 따라서 모두를 다 해낸다는 다짐으로 일반적인 워킹맘과 전업맘의 길을 택하지 않았다. 참 호기로웠다. 사실 엄마들의 선택에 이렇게 일반적인 두 가지 길이 있다는 것은, 사회의 환경이 이들에게 두 가지 길 중 하나를 선택하게 만든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엄마들이 걷고 있는 두 가지 길은,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의 성실이고 노력이었다.
하지만 청춘의 시절, 도전과 인내의 힘으로 시도하는 것을 으레 잘 이루어왔던 나는, 엄마가 되고 나서도 그 모든 게 가능할 것이라 믿었다. 모두를 얻겠다 욕심부려도 되고 어렵지 않게 다 이룰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그래서 꾼 꿈이 '집에서 아이를 돌보며 재택근무를 하는 프리랜서의 삶'이었다. 심지어 아이를 낳고 새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한 나는, 기존의 일로 돌아가지 않고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아 돈을 벌겠다'라고 다짐했다.
그러나, 상황은 여의치 않았고 거듭되는 실패에 자존감은 낮아졌다. 좋아하는 일, 잘할 수 있는 일을 찾으려는 노력이 점점 부끄럽고 힘겨워졌다. '자아를 찾기 위한 쓸모 있던 방황'은 이제 '방황을 위한 방황'으로 변하고 있었다. 엄마의 이름은 무엇인가. 나의 이름은 무엇인가. 결국 태초의 모든 질문은 잊혔다. 어느새 '빠른 시간에 큰돈을 벌 수 있다는 무언가'를 찾으려, 새빨간 두 눈만 캄캄한 심야를 헤맸다.
사춘기였다.
왜 나는 혼란스러운 상황에 놓인 것일까?
이전의 나는 '30대 중반, 그리고 아내와 엄마라는 이름'이 안정을 뜻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현재의 나는 그 이름을 갖고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고 있었다. 도대체 이 상황은 어떻게 설명할 것이며 해결책은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그리고 책을 만났다. 이런저런 흔들림 속의 그 해 1월.
아이를 어린이집에 등원시킨 후 샌드위치를 사러 가던 길이었다. 그 길에서 단층짜리 작고 귀여운 도서관을 발견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통창엔 햇살이 충분히 들었고 곳곳에 화분이 많았다. 편안하고 따뜻했다. 나무 책상과 의자가 안락하게 자리 잡아 마치 작은 카페 같았다. 이렇게 좋은 도서관이 집 앞에 있었다니? 동네로 이사 온 지 1년이 넘었는데 이제야 발견했다. 사실 서가는 늘 그 자리에 있었는데 다만 내가 의식하지 못했을 뿐이었다.
자연스레 육아서가로 향했다가 좋은 책을 만났고, 그날부터 도서관의 세상에 푹 빠지게 되었다. 마침 엄마로서의 나에게 딱 필요한 책을 만난 덕분인지, 아니면 오랜만에 만난 책의 질감과 호흡이 알맞았던지. 그렇게 아날로그의 속삭임에 매료되어 매일을 도서관으로 향했다.
안 그래도 태생이 복잡한 머리였지만, 도서관에서 많은 책을 만나며 더 깊고 다양한 생각을 시작했다. 사실 그전까지는 혼자만의 상념에 사로잡혀 그 속에서 정처 없이 헤매고 있었다. 조급하고 답답하고 회의적인 마음이 컸다. 그런데 책을 읽으니 내가 쓴 삶의 안경이 달라진 기분이었다. 다양한 삶을 엿보고 귀한 지혜를 들으며 위로와 조언을 얻을 수 있었고, 그런 지식을 스스로 융합하고 발전시켜 좀 더 생산적이고 의미 있는 생각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고차원의 상념이랄까? 단지 한 손에 잡히는 이 작고 네모난 종이뭉치를 읽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저자의 이토록 깊은 경험과 성찰을 얻을 수 있다니. 한 권 한 권 읽어가며 다양한 삶을 함께 살아가는 기분이었다.
둥둥 떠다니던 생각들이 조금씩 정리가 되었다. 그리고 가장 먼저 '엄마로서의 자리'를 돌아보게 되었다. 육아서, 에세이, 소설, 교양서, 자기 계발서 등 분야는 다양했지만 저마다의 책을 통해 '아이를 향한 생각과 자세'를 새롭게 단디 잡았다.
이전의 나를 떠올려봤다. 아이와 함께 하는 공간에서 생각은 다른 곳을 향하고, 휴대폰과 아이를 번갈아 보면서 일과 육아를 모두 해내고 생각했던 시간들이 있었다. 욕심이었다. 우선 지금은 눈앞에 있는 이 사랑스러운 아이에게 한 번 더 눈을 맞추고 꼭 안아주고 뽀뽀를 해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의 기질과 발달 과정을 이해하고 아이를 기다려줘야지. 아이에게 너무 집착하지 말고 내 욕심을 투영하지 말아야지. 아이를 있는 그대로, 그저 '내 옆에 있다는 자체가 소중하고 감사하다'는 마음으로 바라봐야지. 오롯이 격려하고 지지하고 존중하며 마음을 다해 사랑해야지.
'아이를 키운다'는 말의 의미와 무게가 점차 실감 났다. 단지 먹여주고 씻겨주고 재워주던 기존의 양육을 뛰어넘어 좀 더 진실된 엄마가 되는 기분이었다. 좋은 엄마가 되는 기분이었다.
점점 나은 엄마가 됨을 느꼈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의문이 있었다. 좋은 엄마가 되기 위한 방법은 알겠어. 그런데 왜 아직도 갈증이 나는 거지? 내 이름은 어떻게 찾는 거지? 왜 여전히 혼란스러운 거지?
해결 못한 많은 질문의 꼬리에서, 꼬리에 꼬리를 무슨 탐독이 이어졌다. 어떤 책을 봐야겠다는 특별한 계획은 없었고 그저 손에 잡히는 대로 눈에 밟히는 대로 읽어나갔다. 그러던 중 엄마들이 기록한 에세이를 많이 접했다. 찐한 공감을 했고, 또 그들의 귀한 지혜와 선명한 통찰력 덕분에 페미니즘 혹은 자본주의의 관점에서 나의 혼란스러움이 설명될 수 있음을 깨달았다.
그런데 여기에 또 문제가 있었다. 책에서 말하는 내용이 나의 상황과 100% 합치되지는 않았던 것이다. 엄마의 노고를 다룬 많은 책들은 보통 이러한 이야기를 전했다.
엄마들은 육아와 집안일을 비롯한 돌봄 노동을 매우 열심히 하지만, 그 노동이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다.
사회는 엄마에게 전통적인 여성의 역할을 강조하고 집안에만 머물러 있으라고 이야기한다. 엄마들은 사회에 나가 전처럼 일을 하고 싶어 하지만 그러지 못하는 상황 때문에 힘겨워한다.
그런데 나의 상황은 조금 달랐다.
우선 나는 육아와 함께 나름대로 집안일을 한다고는 하나, 위에서 얘기하는 것처럼 최선을 다하는 것도 잘하는 것도 아니었다. 딱 집안이 돌아갈 만큼의 수준일 뿐이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신랑의 아침밥을 마련하는 것도 신랑의 의복을 준비하는 것도 아니었다. 신랑의 출근길엔 침대에 누워서 잠결에 인사하는 불량 아내였다. 저녁 식사 또한 하나하나 식재료를 손질하여 정성껏 요리하기보다는 잘 마련된 밀키트로 맛있게 조리하기 일쑤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늘 힘들었다.
단순 비교해봤을 때 작가님들에 비해 나는, 완전히 농땡이를 피우는 불량주부였다. 밥은 밥솥이, 빨래는 세탁기, 건조는 건조기가 하는데 모든 것을 힘들어했다. 불량주부이면서도 늘, 아내인 내가 '우리 가정을 유지하기 위한 모든 돌봄 노동의 책임'을 지나치게 많이 부여받고 있다 생각했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그 누구도 나에게 직장에 나가지 말고 애만 보라고 한 적이 없었다. 오히려 남편은 나에게 은근히 맞벌이를 기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발적으로 집에 머문 것은 나였다. 기존의 일터로 돌아가면 취직은 어렵지 않았을 테지만. 쉽게 사회로 발을 내딛지 못했다. 집에서 할 수 있는 다른 일을 끊임없이 생각하고 고민했다. 이것은 모두 나의 선택이었다.
그래서 더 헤맸다. 도대체 왜 이럴까. 주부로서 완벽하지도 않고 누구도 나를 사회로 나가지 못하게 막은 것도 아닌데 나는 정말 왜 이럴까. 스스로를 이해할 수 없었다. 이러한 고민 속에서 탐독을 또 이어갔다. 그리고 어김없이 책을 읽던 어느 날, 나는 문득 뭔가를 알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