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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맘약 Oct 07. 2021

전업이냐 워킹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빨간 딱지 or 파란 딱지

'나의 이름'을 그리워하는 시간이 길어지며, 자존감이 점점 낮아짐을 느꼈다. 아이는 먹고 자고 놀고 싸며 하루하루 자라났지만, 상전님 프로 수발러는 그제나 어제나 헐렁한 옷을 입고 다크서클이 축 늘어진 채 같은 자리에 서 있을 뿐이었다. 아니, 오히려 도태가 맞았다. 엄마라는 자리는 한참 뒤로 향하고 있었다. 당당한 사회인이었던 순간은 도대체 어드메요? 세상과 동떨어져있으니 사회, 정치, 경제 뉴스는 당연히 몰랐다. 심지어 유일하게 관심 있던 '오늘의 코로나 확진자 수'도 어차피 외출을 안 하니 그닥 중요한 의미는 아니었다.


나의 이름을 찾기 위해 무엇이든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나는 이미 아이가 있으니 할 수 있는 일은 한계가 있었다. 엄마인 사람에겐 '전업맘', 또는 '워킹맘'의 선택지만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는 것은 각자의 선택에서 모두 커다란 무언가를 포기해야 하는 일이었다.




전업맘이 될 것인가?


전업맘의 길을 택하는 것은, 앞으로도 쭉 이렇게 아이를 수발하며 살 것이라는 얘기였다. 물론 아이는 좀 더 자라 어린이집에도 가겠고 학교에도 갈 터였다. 그러면 나는 잠깐의 여유가 생겨서 더 이상 스스로를 창살 없는 감옥에 갇혀있단 생각은 하지 않을 것이며, 가끔 아르바이트를 하거나 취미활동도 할 수 있을 테였다. 하지만 전업맘의 길을 택한다면 그만큼 가정의 경제적인 성과는 포기해야 할 일이었다. 앞으로 전세금은 더 올라갈 텐데 높아지는 대출을 우리는 도대체 언제 감당하며 살까. 한편으론 나처럼 무엇이든 잘할 수 있는 훌륭한 생산 가능 인력이 밖으로 출근하지 않는 삶은 사회적인 낭비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또 한편으론 이렇게 출근하지 않고 전업맘의 길을 택한다는 건, 집에서 내가 살림을 완벽하게 해야 한다는 의미로 느껴졌다.


어릴 적부터 나도 집안일은 저절로 다 되는 줄로만 알았다. 먹이고 치우고 빨래하고 개어 놓고. 제자리에 있어야 할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고, 부족하지 않도록 알맞게 채워지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엄마는 늘 바빴지만 그 모습은 당연하다 생각했고, 언제나 '나의 정체성은 학생'이라는 굳은 의지 하나로 설거지 한 번 스스로 한 적이 없었다. 공부하는 학생답게 어릴 적부터 각종 책에서 우렁각시라는 민담을 수도 없이 읽고 들었다. 그러나 나는 그 우렁각시가 우리 집에도 친구네 집에도 집집마다 한 사람씩 있으며, 정말로 그렇게 남 모르게 고생하고 있다는 걸 알지 못했다.


엄마가 나에게 굳이 시키지 않았다는 핑계로 이렇듯 집안일이라곤 하나도 모르고 자랐으니, 결혼 5년 차인 지금도 살림은 낯설고 어렵다. 이토록 하나하나 챙길 것이 많은지 몰랐고 이토록 세세하게 품이 드는지도 몰랐으나, 티 안 나고 자랑거리가 안 되는 이 일을 오늘도 겨우 해나갈 뿐이다. 누군가는 이렇게 살림을 가꾸는 것에 많은 재미와 보람을 느낀다지만, 나는 집을 예쁘게 꾸미는 것 말고는 그다지 흥미가 없다. 그러니 오늘도 착한 우리 아이는 엄마의 무(無) 맛인 음식을 맛있게 먹을 따름이다.  


사정이 이러하니 절대로 나는 살림을 완벽하게 하지 못하리란 걸 스스로 알았다. 그러니 전업맘의 길은 위험했다. 따라서 무조건 경제적인 사회활동을 해야겠구나 싶었다. 누구의 엄마로서만이 아니라 자신의 본연의 이름도 찾고 월급도 받으니 이것 참 좋지 않은가?




워킹맘이 될 것인가?


워킹맘의 길을 택하겠다면, 가장 쉽고 평범한 길은 나의 전공을 살리고 이전에 하던 업무와 비슷한 일을 다시 시작하는 것이었다. 다행히 재취직이 비교적 쉬운 분야였다. 경단녀라는 잔혹한 말속에서도, 열심히 손품, 발품을 팔고 인적 네트워크를 조금만 발휘한다면 그때와 비슷한 사회로 복귀하는 것이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나는 다시 나의 이름으로 불릴 테고 이전보다 조금은 적더라도 매달 성실한 땀의 결과가 통장에 찍힐 것이었다. 그리고 그 돈은 우리의 집세를 내고 부모님과 지인들에게 가끔 선물을 하며 아이의 옷이나 책을 살 수 있는 귀한 자원이 될 것이었다. 아마도 내 통장에 돈이 들어온다면, 나는 우리 아파트 상가보다 옆 아파트 상가의 아메리카노가 500원이 더 싸다며 10분을 걸어가지 않을지도 모르고, 2만 원짜리 아기 변기를 살 때 네이버, 쿠팡, 11번가, g마켓, 인터파크를 모두 돌아다니며 어떻게 하면 쿠폰을 써서 최저가로 살 수 있는지 덜 고민할 수도 있을 것이며, 점점 뱃살이 늘어난다 고민을 하는 남편에게 아파트 관리동에 있는 주민 헬스장 3개월 등록증을 플렉스 하게 선물할 수도 있을 터였다.


그러나 워킹맘이 된다면 아마도 잃는 것도 있을 테였다. 이미 워킹맘의 길을 걷는 친구들의 말을 들어보면, 우선 정말 사는 데 정신이 없다고 했다. 아침에 일어나 부리나케 출근 준비와 등원 준비를 하고,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며 출근을 한 후, 하루 종일 열심히 일하고 퇴근하여 녹초가 되어 돌아온 집으로 또 육아 출근을 한다고 했다. 저녁을 먹고 집안일을 하며 아이를 씻겨서 재우기 바쁘기에 아이와 놀아주는 것은 포기하게 된다고. 그러니 그 엄마의 마음에는 죄책감이 자리 잡는다 했다. 가뜩이나 모성신화가 가득한 사회가 아니던가. 아이의 첫 3년은 엄마와 함께 충분히 애착관계를 형성해야 한다는데, 아이가 울거나 떼를 쓸 때면 그 모든 사건의 원인이 '몇 푼 더 벌면서 아이에게서 벗어나 본인의 삶을 찾으려 했다는 욕심'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에 또 죄스럽다고 했다.


그리고 등원은 본인이 할 수 있다 해도 어차피 하원 시간은 맞지 않기에, 결국은 등 하원 도우미 이모님을 고용하거나 친정 혹은 시부모님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도우미 이모님을 쓰는 경우는 월급의 반이 이모님께로 고스란히 간다며 육아를 돈으로 때운다는 자조 섞인 씁쓸하고 웃픈 소리를 했고, 부모님들께 손을 벌리는 경우는 나이 드신 부모님께 짐이 된다는 죄송함에 또 죄책감이 자리 잡는다 했다.


그저 열심히 살아야 하니까, 예전처럼 돈도 벌고 예쁜 아이도 잘 키우고 싶었을 뿐인데, 힘들고 지치고 죄인이 되는 삶이었다. 그러니 이 이야기를 듣고 나는 예전의 삶으로는 갈 수 없겠다 생각했다. (그 어려운 걸 해내시는 모든 분을 존경합니다.)


워킹데이 9 to 6 삶으로 다시 간다면 매일 아침은 전쟁터일 것이고, 아이는 제시간에 하원 하지 못해 외로울 것이고, 우리 엄마는 여전히 직장 다니는 워킹 그램마이며 시어머니는 청주에 사시니 그렇다면  하원 도우미 이모님을 고용할 수밖에 없고, 따라서 체감 월급은 줄어들 것이고 일의 만족도도 떨어질 것이고... 가뜩이나 이전에 하던 일에 단조로움과 답답함을 느꼈던 차였다. 그래서 나는 다른 방법을 찾기로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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