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모두의 이야기
사랑이란 감정을 아는 이에게, 연애에 관해선 누구나 저마다의 서사가 하나씩은 있을 것이다. 영화 같은 스토리, 노랫말 같은 이야기. 우리 커플도 그러했다. 우리의 이야기는 김동률의 '다시 사랑한다 말할까'였다.
우리는 20대 중반 일본에서 처음 만났다. 한일 양국의 대학생들이 모여 재난에 관해 토론하고 봉사하며 교류할 수 있던 뜻깊은 자리였다. (그는 물론 한국인이다.) 우리는 속한 조가 달랐기에 일정 내내 마주칠 일이 없었다. 그저, 일본 재무성에 방문했을 당시 장관에게 당차게 질문을 하고, 쓰나미 뒤 폐허가 된 바닷가에서 지친 사람들에게 힘을 돋우고 성실히 나무를 나르던 그를 보며, 나는 그를 '조금 괜찮은 사람'이라 생각했을 뿐이었다. 열흘간의 일본 일정을 마치고 한국에 도착한 뒤, 집으로 가는 공항철도 같은 칸에서 우연히 마주하며 우리는 번호를 주고받았다.
하지만 그땐 너무 어렸고 철이 없었다. 그는 나와 잘해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지만 나는 연애할 마음이 없었다. 그가 마음에 안 들어서라기 보다는 나의 자유를 즐기는 데 충실한 타입. 그래서 우리의 인연은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5년 뒤, 우리는 20대 후반의 사회인이 되어 다시 만났다. 그리고 이제 노래가 흘러나온다. ‘마치 어제 만난 것처럼 잘 있었냔 인사가 무색할 만큼~' 우리는 그대로로 보이는 서로에게 반갑게 안부를 물었고, ‘아직 혼자라는 나의 그 말에~’ 그는 다시 용기를 내었다.
첫 번째 데이트 때, 그는 쏘카를 빌렸고 쁘띠프랑스를 도착지로 찍었다. 그리고 도착한 그곳이 당연히 유럽식 레스토랑인 줄 알았던 그는 '여기는 입장료를 왜 받지?' 하던 어수룩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와 광화문에서 처음 손을 잡았다. 그리고 그날을 1일로 2년을 만났다.
만남을 시작한 지 한 달쯤 되었을 무렵, 내 생각엔 아직 서로를 잘 모르는 것 같은데 그는 그때부터 시도 때도 없이 나랑 결혼을 할 거라고 외쳤다. 이상한 사람이었다. 그런 남자와 설렘, 사랑, 우정, 그리고 지지고 볶는 현실 연애를 이어오다가 어느 해 화창한 가을, 남산 자락에서 우리는 결혼했다.
어릴 적 읽었던 수많은 동화에선 ‘왕자와 공주는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았어요.’로 이야기가 끝난다. 하지만 결혼한 사람들은 모두 알 것이다. 그때부터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된다는 것을…
우리의 '사랑의 결실'인 '결혼' 또한 그러했다. 고난과 역경을 겪었던 주인공이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드디어 ‘아무 걱정 없이 행복하게 산다는 이야기의 마무리’가 아니라, 지금부터 나와 전혀 다른 삶을 살아온 타인과 함께, 크고 작은 선택에서 전혀 다른 가치관끼리 충돌하고 화해하고, 그렇게 조금씩 비워가고 맞춰가며 희로애락을 함께하는 ‘눈물 콧물 쏙 빼는 리얼 스펙타클한 새 삶의 시작’이었다!
결혼하고 1년 남짓, 신혼 생활은 달콤했다. 물론 가끔 의견 차이가 있어 ‘도대체 내가 이 사람이랑 왜 결혼을 했을까. 아이고 내 팔자야~’ 하는 때도 있었으나. 대부분은 소소한 우리의 공간에서 잔재미를 찾고 만들어가는 깨소금의 시간이었다. 아담한 집을 꾸미려 소품을 샀고 서로를 위해 요리를 했다. 가끔 회사 앞으로 찾아가 현지 맛집을 소개해주던 삶. 용산 CGV 아이맥스관에서 새벽 1시 심야 영화를 보던 삶. 주말 데이트 후에도 더 이상 아쉬운 마음을 안고 헤어질 필요 없이, 집으로 들어와 또다시 야식과 맥주를 즐기며 드라마를 몰아보던 삶. 그리고 언제든 둘이서 훌쩍 여기저기 여행을 다닐 수 있던 삶.
그런 삶 속에 아이가 찾아왔다. 사랑의 결실, 새 생명이 찾아온 것이다!
임신은 우리와 우리 원가족 모두에게 큰 기쁨이고 행복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결혼한 지 2년 차인 신혼부부에게 결혼이라는 숙제를 마무리한 후 성취해야 할(?) 너무나도 당연한 다음 스텝이었다. 나는 앞으로 변화될 우리의 미래를 예상하고 그에 대비해 나름의 준비를 했다. 커다랗고 두껍고, 이름과 생김새부터 강렬한 존재감을 뿜는 '임신 출산 육아 대백과'를 읽었다. 그리고 심신의 안정과 태교를 위해 꽃꽂이를 하고 그림을 그렸다. 아기 손싸개와 흑백 모빌도 만들었다. 설레고 행복했다. 지금은 비록 무거운 몸에 잠도 설치고 피곤하지만 이 힘겨움은 언젠가 끝날 테였다. 그리고 조금은 낯설고 어렵겠지만 사랑스런 아이와 함께 하는 뿌듯하고 행복한 새 삶이 곧 펼쳐질 예정이었다.
3월의 갓난아이는 따뜻한 봄볕 아래서 낮잠을 자고, 나는 그 아이를 봄볕보다 더욱더 따스하고 포근한 시선으로 바라보리라. 가끔 바람이 살랑살랑 커튼을 흔들면, 나는 아이가 추울세라 작은 담요를 덮어주겠다.
세상 속 푸르름이 짙어지는 첫 번째 어린이날엔, 통통하고 귀여운 아이를 유모차에 태워 공원을 산책하리라. 때때로 아빠는 아이를 안고 엄마는 그 둘을 흐뭇하게 바라보겠지. 아기를 동반한 사랑스런 가족의 모습, 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마치 모네의 그림에서 볼 법한 따스한 빛깔과 선선한 바람의 상상. 하지만 그것은, 99.9%의 육아현실과는 정확히 반대편에 있는 단단한 착각의 허상이었다. 단지 나의 B.U.(Before Umma)의 시절 꿈이었다.
출산은, 살기 위한 짐승의 처절한 몸부림 같았다. 미칠 듯이 고통스럽고 찌를 듯이 강렬했다. 그리고 그 뒤에 이어진 육아 또한 그러했다.
아이를 낳고 키우기 전에는 상상조차 못 했던, 정말이지 완전히 낯설고 새로운 세계로 나는 순간이동했다. 밤낮은 뒤바뀌고 잠은 모두 빼앗기고. 등 센서 장착기의 아이는 온종일 내 품에 안겨있으려 했고, 하루 종일 비위를 맞춰주랴 고군분투하는 내 맘은 모른 채 아이는 자꾸 울었다. 절대 이유도 알려주지 않았다.
아이에게 젖을 물린 채 앉은 건지 선 건지도 애매한 자세로 미역국에 밥을 말아 후루룩 마셨다. 굴욕이었다. 훌렁훌렁 벗어서 언제든 오픈할 수 있는, 고도로 설계된 수유복도 우스웠지만, 그 수유복이 찰떡같이 잘 어울리는 내 몸뚱아리가 더 우스웠다. 평범한 사람들이 선망하는 아름다운 배우나 모델의 모습과 아마도 190도쯤 반대에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무거운 몸뚱아리로 최대한 가볍고 부드러운 리듬을 타가며 옅은 노란빛 등과 뜬눈으로 지새운 수많은 밤이 있었다. 그렇게 아이와 마주했다. 낯설고 너덜너덜하고 처연한 현실을. 그리고 그 속에서 아이의 울음과 함께 나도 속으로 수도 없이 울었다.
고립, 그리고 외로움. 육아는 그야말로 ‘나의 온 신경을 끊임없이 붙잡는 돌봄이 필요한 존재와 단둘이 함께하는 퇴근 없는 일상’이었다. 이러한 일상은 하루의 흐름과 계절의 변화조차 다른 세상의 일로 만들었다.
그래서 그렇게들 부르나 보다. 창살 없는 감옥. 그래. 아무리 내가 낳은 나의 아이가 예쁘고 사랑스럽더라도, 그래서 혼자 육아하는 상황에서 '독박 육아'란 말을 하며 이 말이 가진 어감에 약간의 죄책감을 느끼긴 해도, 힘든 건 힘든 거였다. 아이가 어릴 때는 아이가 어리므로, 아이가 조금 자라서는 코로나 대유행으로 외출은 언제나 어려웠다. 가끔 갔던 문센과 카페는 그냥 집 밖을 나간 것이라는 자체로 행복이었다. 마치 직장인들이 점심시간에 밖에 나오면 그냥 밖에 있다는 것 자체로 웃음이 나는 그런 상황이랄까? 그래서 외출은 좋았지만 자주 즐길 수 없었다. 우선 엄마 혼자서 아이와 함께 하는 외출은 거의 전투 준비와 같았기에. 그래서 보통의 날들은, 집에서 보냈다. 말도 안 통하는 아이에게 식사와 간식을 챙겨주고 기저귀를 갈아주고 씻겨주고 재워주고 그 외의 온갖 궂은 뒤치다꺼리를 다 해드리며. 그러는 동안 거실 창 깊숙이 들어왔던 아침 햇살은 중천에 올랐다 산을 넘어 다른 쪽 하늘로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하지만 다행이었다. 우리 아이는 비교적 순한 편이었고 나와 기질이 잘 맞았다. 무엇보다 나는 이 아이가 단 10분 만에 우주의 모든 엔트로피를 거실로 끌고 오더라도, 밥과 반찬을 입이 아닌 옷과 바지로 먹더라도, 자기도 한 목소리 하는 인간이라며 존재감을 뿜어내어 소리를 지르더라도, 덮어줘도 덮어줘도 이불을 발로 차고 끊임없이 내 귀를 만지며 물을 찾느라 매일 밤 나를 잠 못 들게 할 지라도. 배가 뽈록 튀어나오고 손목 발목에 통통한 살이 접히고 웃긴 얼굴로 내 표정을 따라 하고 힘껏 팔을 벌리며 안아달라 매달리는 이 아이가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킁킁킁 너는 정말 정수리 냄새마저 사랑스럽구나.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며 나를 절대적으로 믿고 의지하는 나의 아이. 오늘도 세상을 한 뼘 흡수하고 그만큼 또 한 발짝 나아가는 연두색 새싹 같은 존재에 나는 정말이지 흠뻑 빠질 수밖에 없었다.
이 친구는 정돈된 나의 세계를 시시각각 헤집어 놓았다. 아니 꾸준히 뒤바꿔 버렸다. 하지만 나는 아이와 함께 하는 일상에 꽤 행복을 느꼈고, 게다가 가끔은 '나 또한 이제 겨우 엄마 나이 3살'이라는 마음에, '부족한 게 당연하지. 어수룩한 게 당연하지. 앞으로 잘하면 되지.'라는 생각이 들어 긍정적인 마음으로 나를 충분히 위로하였다. 앞으로 10년이 더 지나도 나는 겨우 엄마 나이 13살일 뿐. 40대 중반의 여유롭지만 조금은 세상을 많이 알아버린 중년 여성의 나라는 느낌보다, 여전히 사랑스러울 사춘기 소녀와 매일매일 지지고 볶는 최전선 부대의 대장일 거란 생각에, 내 얼굴엔 유쾌한 미소가 피었다. 전쟁 같은 육아의 세계. 정말이지 B.U. 시절과는 완전히 다른 삶이었지만, 나는 나름 아이를 키우는 일에 보람과 가치를 느끼며 만족하고 있었다. 아이는 건강했고 하루하루 자라났으며 소소하고 별 탈 없는 괜찮은 일상이었다.
출산과 육아로 변화한 지평에서 가끔 멘붕을 겪었지만, 나는 늘 정신을 붙잡았다. 아이는 쬐끔씩 성장했고 어느 순간, 뒤집고 앉고 기고 걸었다. 말을 하기 시작했고 나와 인간 대 인간으로 상호작용 하기 시작했다. 아이와의 생존 기술이 많이 발전했음을 느꼈다.
이제 왕초보 엄마는 탈출한 것 같다. 약간의 마음의 여유가 생겼고, 드디어 아이와 함께 시작한 '새로운 내 삶'을 진심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애초에 엄마라는 타이틀은 '죽지 않으면 끝나지 않는 정체성'이었다! 보통 사람인 내가 그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나는 곧 그 삶을 좋아하게 되었다.
그런데, 때때로 허전함이 들었다. 나의 이름.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나는 지금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나는 아이의 이름을 시도 때도 없이 불러주며 사람을 만들고 있는데, 지금의 나는 아무도 내 이름을 불러주지 않았다. 나는 단지 **이의 엄마일 뿐이었다.
물론 아이를 낳고 내가 새로 소속된 곳은, 애초에 모두 아이가 있고 아이가 있음을 전제로 만나는 관계였기 때문에 나는 **이 엄마가 맞았다. 어린이집이든, 보건소 엄마모임이든, 맘카페든, sns든, 나는 **이 엄마였다. 그런데 나는 '나를 너무나 좋아하는 사람'이 아닌가? 오죽하면 나와 나의 자유를 사랑하느라 남편과 인연이 스칠 뻔하지도 않았나?
사회에서 불리던 이름이 그리워졌다. '아이는 자라는데 나는 왜 정체되었나? 나는 지금 어디에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하는 일, 소속된 조직, 혹은 오롯한 나의 이름'으로 불렸던 때가 얼마나 까마득한 과거의 시절인가 생각해 보았다.
그런데 놀라운 건 그 과거가 생각보다 그렇게 까마득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저 B.U. (Before Umma)와 A.U. (After Umma) 시절의 차이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