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의 일상
노란 햇살이 블라인드 틈을 지나쳐 거실 매트 위로 깊게 들어온다. 아침이다. 나는 노란 라이언 토스터에 식빵을 구우며 계란 전용 프라이팬으로 동그란 프라이를 만든다. 그리고 냉장고에서 시원한 미숫가루 우유를 꺼내 쉑쉑 흔든 후, 귀여운 작은 컵에 나눠 담는다. 이름만큼 맛도 괜찮았음 좋겠다. 좋아하는 귤도 벌써 마트에 나왔다. 아니 요즘은 하우스 귤이라 언제든 먹을 수 있지. 어쨌거나 오늘의 아침 메뉴에 귤로 상큼함을 채우며, 나는 방으로 조심스레 향한다.
아직 세상모르게 자고 있다. 이불에서부터 느껴지는 아이의 냄새. 어젯밤 발라 준 라일락 베이비 로션과 잠옷에 묻은 자스민 유연제 냄새가, 보드라운 아이의 체취와 섞여 이불속에 담겼다. 조용하고 따뜻한 아침. 팔과 다리는 제멋대로 튀어나왔고 머리도 삐쭉삐쭉 산발이지만, 이 순간 눈을 감은 아이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며 나는 사랑을 듬뿍 느낀다. 나를 닮은 작고 소중한 이 아이.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이제 아이를 깨운다.
사랑스러운 아이와의 아침. 행복하고 따스한 이 느낌. 아마도 이것은 내가 어디선가 봤던 바로 그 '육아의 모습'이었다. 유럽의 어느 작가가 그린 것일까? 문틈 너머로 보았던 광경. 명화, 혹은 드라마에서 본 그 포근한 모성의 이미지에 오늘의 나를 잠시 투영시킨다. 하지만 나는 곧 정신을 차렸다. 아이가 일어나는 순간, 평화로웠던 잠깐의 예술은 정신없고 치열한 현실로 변화할 테니.
아이를 깨우고 오늘의 육아와 살림이 시작된다. 엄밀히 말하면 아침 준비의 과정도 돌봄 노동의 시작이겠지만. 아이가 어린이집에 가기 전, 나는 아이를 깨우고 씻기고 밥 먹이고 옷을 다리고 입히고 수저, 기저귀, 손수건을 챙겨 어린이집에 보낸다. 그래도 돌아보면 아침 일과는 꽤 간단한 편이다. 분주한 엄마의 움직임을 한 문장에 담을 수 있기에.
본격 집안 노동은 아이가 어린이집에 간 뒤 시작된다. 아이가 집을 비운 약 5시간의 여유(?) 동안, 나는 우리 집 사람들이 일상적인 매일을 살 수 있게끔 ‘집안을 일정한 보통의 상태로 유지’ 하기 위해 노력한다. 이런 노고는 보통 '하는 것은 티가 안 나나 하지 않으면 바로 티가 나는 일'이다. 쉽게 말하면 빨래, 청소, 설거지. 하지만 세세히 들여 보면 이들도 나름 많은 과정과 손길이 필요하다.
색깔과 재질로 분류된 빨래는 큰 세탁기와 작은 세탁기에 나눠서 돌린다. 그동안 나는 아침 식사 설거지를 한다. 그 후 거실, 방, 주방을 청소하는데 거실엔 아이의 많은 장난감과 책이 나뒹굴어 이들을 제 자리에 놓는 게 우선이다. 이제 청소기로 온 집안의 머리카락을 치우고 바닥은 물걸레로, 테이블은 물티슈로 가볍게 닦는다. 그 후엔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러 다녀오고, 아이가 사는 집 수준에서 나름의 말끔하고 깨끗해진 집을 보며 잠시 뿌듯해한다.
이내 나는 가족의 끼니를 위한 신선한 식재료 및 샴푸, 로션, 세제 등 생활필수품의 적절한 교체 및 수급을 위해 마트로 간다. 물론 장을 보기 위해 매일 대형마트로 가는 것은 아니다. 집 앞 상가의 마켓을 이용할 때도 굳이 직접 가지 않고 온라인 플랫폼에서 장보기 서비스를 이용할 때도 있다. 하지만 마트든 온라인이든 적당한 예산 안에서 적절한 식재료와 필수품을 구입하기 위해 비교하고 비교하며 고민하는 것은 선택장애인 내게 늘 많은 수고와 시간을 들이게 한다.
마트에 다녀온 뒤엔 장본 것을 정리한다. 포장을 풀어 냉장고로 향할 것은 냉장고로 베란다로 향할 것은 베란다로 가져간다. 싱크대 하부장, 욕실, 냉동실. 마트에서 온 친구들이 저마다의 자리를 잡았을 때 나는 이제 세탁기를 살핀다. 아침에 돌린 빨래가 잘 끝났다. 위, 아래 빨래가 잘 된 친구들을 보며 자연건조가 필요한 것은 분리하여 따로 빼고 나머지는 건조기로 보낸다. 건조기는 빨래의 무게를 재고 타이머를 돌리며, 그동안 나는 조금 늦은 점심을 먹는다.
점심시간엔 밥만 먹을 수 없으니 유튜브나 넷플릭스를 본다. 예전엔 타인의 SNS를 많이 구경했는데 그러다 보면 타고 타느라 시간이 순삭이라, 요즘엔 오히려 정해진 분량의 영상을 몇 편 시청하는 것으로 깔끔하게 끝낸다.
점심을 치우고는 커피를 마신다. 친정 엄마가 손수 내려주셨던 더치커피, 그것이 다 떨어졌으면 며칠 전 마트에서 2L짜리 리필형으로 구입했던 아메리카노를 덜어서 마신다. 그리고 드디어 나의 진짜 자유시간을 마주한다.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낸 후 얻게 된 ‘짧고 소중한 혼자만의 자유시간’.
보통 이때에 나는 책을 읽거나 글을 쓴다. 매일이 똑같은 주부의 일상에서, 독서는 넓은 세상을 배우고 스스로의 부족함을 느껴 정신 차릴 수 있게 하는데 많은 도움이 된다. 책을 통해 때로는 어디서도 받지 못했던 깊은 위로를 얻는다. 이렇게 짬짬이 읽으며, ‘앞으로 더 읽고 싶다, 더 읽어야겠다’는 다짐을 한다. 이처럼 활자에서 얻은 소소한 위로는, 나아가 나를 기록하는 사람으로 만든다. 비록 아직 독자는 아무도 없지만(심지어 남편에게도 보여주지 않았지만). 일상의 메모를 통해 나는 조용히 스스로를 돌아보게 된다. 또한 아직 그 방향과 속도는 모호하되 어딘가로 내딛는 작은 발걸음을 느끼며 성장의 꿈을 꾼다. 기록하지 않으면 잊혀지는 일상과 생각. 그래서 생생한 이 느낌을 잘 관찰하고 남기려 노력한다.
그런데 어쩐지, 아이는 어린이집에 가있고 나는 가사에서 벗어나 이렇게 자유롭게 소비하는 ‘2시간’이 스스로에게 조금 불편하고 어색하다. 그동안 치열하게 사느라 이런 시간을 갖지 못했기 때문인가, 아니면 혼자서 힘들게 가정 경제활동을 하는 남편에게 미안한 이유인가. 어쨌거나 매일의 가사와 육아로 정신없이 바쁜 주부의 하루 중, 이렇게 누리는 잠깐의 여유를 불안과 감사로 함께 보내며, 그렇게 귀한 2시간은 지나간다.
다시 또 본격적인 육아와 살림을 시작한다. 킥보드를 가지고 집을 나서며 하원한 아이와 함께 놀이터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다. 계단 한 발도 오르내리는 게 어려웠던 어린아이는 어느새 훌쩍 자라 미끄럼틀과 킥보드 타기에 제법 능숙하다. 놀이터와 근처 공원, 그리고 아파트 단지를 몇 바퀴씩 돌면서 아이와 나의 체력을 탈탈 소진한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간식을 먹인다. 그때그때 아이가 좋아하는 제철 과일을 먹이며 '너는 참 좋은 시대에 태어났구나' 생각한다.
간식을 먹인 후엔 거실 테이블에 마주 앉아 밀가루 반죽을 가지고 조물조물 놀이를 한다. 그리고는 아이가 만들어주는 장난감 음식을 맛있게 받아먹으며, 토끼 눈과 오물오물 입과 엄지 손가락 따봉을 만들어 아이가 신날 만큼 멋진 리액션을 선보인다. 엄마의 리액션에 뿌듯하고 기분이 좋아지는 3살 꼬마. 기분이 업된 이 어린이는 이제 나와 춤을 출 것이다. 음악의 장르는 매일 바뀌지만 내 춤사위는 거기서 거기다. 그래도 이 시간 막춤을 추면서 나도 애처럼 기분이 좋아진다.
오늘도 남편은 저녁을 먹고 야근이란다. 나는 남편과 함께 먹으려 했던 맵고 짜고 살찌기 좋은 맛있는 찌개류를 포기하고, 아이와 함께 먹을 슴슴한 저녁을 준비한다. 저녁 준비엔 노련한 육아도우미의 도움을 받는다. 그분은 바로 '영상 이모님'. 이분이 없었다면 나는 과연 매일 저녁을 어떻게 준비했을까. 30분 남짓의 시간, 나는 조리를 마치고 상을 차린다. 가끔씩 영상을 보다가도 부엌으로 달려와, 나의 다리를 붙잡고 매달리며 싱크대와 다리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일을 못하게 밀어내는 아이 때문에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지만. 그래도 어쨌든 저녁 식사가 알맞은 시간에 끝나야 다음 스텝으로 갈 수 있으니 나는 일을 재촉한다.
아이에게 저녁을 먹인다. 요즘은 테이블 밑으로 흘리는 음식이 줄어든 데다 숟가락, 젓가락을 능숙하게 사용하며 스스로 밥을 먹으니 아무래도 예전보다 일이 많이 줄었다. 이 녀석이 밥 먹다 말고 괜히 장난감이나 책을 가져와 장난을 거는 통에 매일 제법 시간은 걸리지만. 이제 오늘의 주부 일과는 8부 능선을 넘었다.
다음은 아이와의 배변 훈련. 시도를 해보지만 오늘도 실패했다. 내일은 잘해보자 아이와 약속하고 이제 아이를 씻긴다. 미끄럼 방지 악어를 욕조에 깔고, 아이가 꽥꽥이와 고래 등 다양한 목욕 친구들과 대화를 하는 동안 순식간에 비누거품을 머리와 온몸에 문질렀다가 빠르게 씻어낸다. 머리카락을 헹굴 때 '눈에 물이 들어갔느니 안 들어갔느니' 하면서 소리를 높이다가, 혼자서 이를 닦을 수 있다는 아이에게 칫솔을 가볍게 쥐어준다. ‘우와! 입 안에 있던 벌레가 다 없어졌어! 언제 이렇게 치카치카를 잘하게 되었어?' 하고 폭풍 칭찬을 해주면 작은 꼬마는 또 으쓱해진다. 우쭐한 사이 빠르게 아이의 이를 마저 닦아주고, 아이의 얼굴을 찬찬히 본다. 머리가 홀딱 젖어 동그란 두상을 보이며 눈을 껌뻑이는 귀여운 아이이다. 그 사랑스러움에 미소가 번진다.
수건으로 물기를 닦고 침대에 눕혀 아이에게 라일락 향기의 베이비 로션을 발라준다. 어제보다 길어진 다리를 보고 이 꼬마가 훌쩍 자랐음을 다시 느낀다. 옷을 입은 아이는 침대를 방방 뛰며 장난친다. 그러다 '엄마, 오늘은 무슨 책을 읽을까' 하며 3권 남짓의 책을 고른다. 기특하다. 침대 맡에 앉아 아이가 고른 책을 함께 읽은 후, 드디어 불을 끄고 아이를 재운다.
매일매일이 비슷하다. 비슷하게 분주한 하루인데, 그렇다고 이들이 분 단위로 쪼개져 기계적으로 관리되는 건 아니다. 바쁨은 바쁨인데 조금 다른 개념이랄까? 살림은 사실 내 선에서 관리할 수 있다 쳐도, 육아는 그저 매 순간 불쑥불쑥 생각지 못했던 것들이 튀어나오고 무수하고 세세한 엄마의 눈길과 손길이 필요한 일인 듯하다. 문장력이 부족한 나는 다만 여기까지 담을 뿐.
아이가 잠들면 나는 조용히 거실로 나와, 노트북을 켜서 아이를 위한 육아용품 및 교육 물품들을 서칭 한다. 그리고 조만간 처리해야 할 각종 세금이나 공과금 등을 확인하고 집안의 다양한 행사와 경조사들을 생각하며 준비할 것을 찾아본다. 조금 피곤해지면 이제는 핸드폰으로 바꿔 들고 SNS를 살핀다. 육아와 살림의 세계 입성 전부터 친구였던 지인의 반가운 소식들. 이들의 하루에 멀리서 심심한 공감과 안부를 건넨다. 쓱쓱 훑어 가다 보니, 어쩌다 오늘도 생면부지 사람의 SNS를 한참 보고 있다. 이제 잘 시간이 되었나 보다.
드디어 남편도 집으로 돌아왔다. 오늘도 힘들었을 그 이의 야근. 저녁 없는 삶을 보내는 남편이 안쓰럽고 딱하여 짧은 위로를 건넨다. 하지만 육퇴 후에는 나도 온전치 않은 에너지를 지녔다. 하루 종일 기다린 이 시간은 소소한 꿀맛이지만, 차마 나눠 줄 에너지가 없는 나는 남편에게 그다지 힘이 되지 못한다. 그렇게 조용히, 평범한 평일의 밤이 지나간다.
그리고, 내일도 반복될 것이다. 나름은 매일 바쁘고 정신없지만 집에서 노는(?) 주부의 하루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