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혹은 할아버지의 공적을 물어오는 후손들이 있다. 이들은 자신의 선조들도 독립운동사에 기여한 바가 있다고 주장한다. 몇 장의 사진, 혹은 몇 마디의 이야기, 또는 남겨진 기록들을 가지고 와서 당신들의 가족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지 않다. 보훈처나 광복회 혹은 그 외의 많은 단체들은 답을 할 수가 없다.
대한민국에서 독립운동가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일제강점기 때 피체된 수사기록이나 해당 의거에 대한 수사기록과 공판기록, 언론에 남아 있는 자료, 또는 해당 부대의 참전기록등'이 있어야 하는데, 이런 것들이 남아 있기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3.1 운동 당시 태극기를 만들던 어린 학생들과 인력거 뒤에 태극기를 싣고 다니면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던 수많은 무명씨들은 과연 그 흔적을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목포 박물관에 묘사된 만세운동 모형에서나 그 흔적을 찾을 수 있을까. 이름을 바라고, 혹은 훈장을 바라고 목숨을 걸면서 싸운 이는 없을 테지만 아쉽게도 우리의 기록은 충분하지 않다.
== 3.1 운동 그리고 역사의 씨줄과 날줄
1919년 일어난 3.1 운동은 우리 민족의 독립정신을 고취시키고 우리의 근대 민족주의 운동의 시발점이 되었다. 이를 계기로 일본 제국주의는 무단통치를 끝내고 그보다 훨씬 교묘한 방식으로 문화통치를 실시한다. 무력과 강압만으로는 우리 민족을 효과적으로 지배하기 힘들다는 전략적인 판단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3.1 운동을 전후로 독립운동의 전개 양상을 다각도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3.1 운동의 역사적 의미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3.1 운동을 전후하여 일어난 독립운동의 흐름을 연계해서 판단해야만 역사적 실체에 접근할 수 있기 때문이다.
3.1 운동은 과연 전국적인 운동이었는가? 아우내 장터에서 펼쳐진 대한독립 만세의 물결은 전국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일어났는가? 3.1 운동은 사전에 전국적 조직을 통해 모의가 이루어졌는가?
3.1 운동 당시에는 전국적인 주도세력이 없었다. 3.1 운동의 유관순 열사가 전국적인 조직을 구성해서 동시 다발적으로 진행을 했다는 이야기는 설득력이 없다. 그러면 우리가 배워온 다른 역사적 사실은 어떠한가. 태화관에서 민족대표 33인이 낭독한 3.1 독립선언서가 3.1 운동의 핵심 동력이었는지도 역시 미지수다. 물론 독립선언서는 역사적으로 의미가 크다. 그러나 3.1 운동 이후 식민 치하의 조선인들의 투쟁방향, 동력이 이곳으로부터 촉발되었다고 단정할 수 없다. 당시 3.1 운동이 일어날 즈음 비슷한 시기에 선언서를 통해 독립운동을 전개한 단체의 상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19년 2월 1일 '무오독립선언서'라고 불리는 대한독립선언서가 중국 동북구 길림성에서 민주와 러시아지역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 지도자들에 의해 발표된다. 조소앙이 기초하고, 박은식, 김규식, 김동삼, 김약연, 김좌진, 김학만, 정재관, 조용은, 여준 등 39인의 민족운동가 명의로 작성 베포된 '무오독립선언서'는 '2.8 독립선언(일본 유학생들의 명의로 발표)이나 위에 언급한 33인의 독립선언서보다 앞선다. 발표 당시 송부받은 것으로 추정되는 선언서에 따르면 , 표기된 연기가 '단기 4252년(1919년) 2월..."로 되어 있다. 이 선언서는 날짜에 맞추어 활동가들이 한자리에 모여서 선언을 하고 만세운동을 외친 형태가 아니라 독립운동가들을 널리 아우르는 연대의 의지와 앞으로의 활동을 상기시키는 연판과 계획서의 의미가 더 크다.
해외의 활동가들 역시 각각의 의지와 방향성을 일치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김규식이 대표로 파리강화회의에 참여한 것과는 별도로 이들 역시 대표단을 꾸려서 파리로 보내기도 했다. 물론 가는 길이 순탄치만은 않아서 이들(윤해, 고창일)이 파리로 도착했을 때는 이미 모든 것이 끝난 후였다. 김규식도 만나지 못했다. 그러나 각각의 단체들이 목표하는 바, 또는 결행하는 모습들은 대동소이한 모습으로 이어진다. 이는 국내에서도 마찬가지다. 3.1 만세운동에 대한 이야기를 접하거나 현장에서 그 만세를 본 이들 중 뜻이 있는 자들이 각자의 고향으로 내려가 뜻을 모아서 만세운동을 다시금 일으켰다는 것이 정설이다. 3.1 운동은 한날에 전국적으로 일어난 운동이라기보다는 당시 팽배해 있던 반일의 공기에 동시다발적으로 불이 붙었다고 보는 것이 맞다.
1919년 3월, 북간도 용정, 간도내의 활동가들은 일제의 폭압과 체포에 맞서 싸움을 준비하는 광복단을 혈서로 맺고 결의했다. 또한 이미 이전부터 간도 내의 각 학교(명동학교, 국자가중학교, 정동중학교, 광성학교) 학생대표들은 회합과 실행에 대한 협의를 하고 각자 학교 학생들과 연설회 개최를 준비했다. 3월 7일이었다. 그리고 조국에서 3.1 만세운동이 벌어졌다는 소식이 북간도에 전해졌다. 간도에 결의를 준비하는 사람들 모두에게 힘이 되는 소식이었다. 드디어 3월 13일, 북간도 용정 시내의 한인들은 거리에서 뭉쳤다. 학생들은 악단을 앞세우고 사람들은 손에 손에 태극기를 들고 있었다. 그리고 '간도 거류 조선민족일동'이라는 명의로 '독립선언문'이 낭독되었다.
"조선민족은 민족의 독립을 선언하노라. 민족의 자유를 선언하노라. 민족의 정의를 선언하노라..."
- <한국독립운동사>(한국일보사 발간)에서 재인용
그렇게 만세운동은 그 시대 그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다. 3.1 운동의 소식은 강을 넘고 산을 넘어 만주에 중국에 연해주에 , 그리고 잃어버린 조국을 그리워하던 모든 조선인들에게 전해졌고 조선인들은 살고 있는 그 자리에서 만세 함성을 통해 화답했다. 그렇게 3.1 운동은 쉬지 않고 이어졌다.
====== 반민족 행위자 문제
그러나 의문은 여전하다. 왜 몇몇의 사람들은 3.1 운동 또는 알려지지 않은 독립운동가에 대한 이야기로 확대하는 것을 꺼려할까. 독립운동은 사진 한 장으로 증명되는 2차원적인 구조가 아니다. 민족의 역사를 바로잡기 위한 많은 이들의 유기적이고 복합적인 노력, 그리고 그 안에서 결합되고 분해되기를 반복하는 많은 단체들이 함께 움직이던 운동이다. 그러다 보니 더 많은 역사적 사건들을 꺼내어 결합과 해체를 반복하다 보면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독립운동사가 더욱더 방대해지고 다양한 사유를 요구하게 된다.
이런 과정을 거치다 보면 일제 강점기에 반동적인 행위를 한 반민족 행위자들이 더욱더 많이 발굴된다. 독립운동사에서 가장 중요한 '반민족 행위자'에 대한 연구가 행해졌을 때 판단과 평가를 맡았던 집단(교수 및 전문가)에서는 묘한 기류가 일어났다. 더 이상 조사를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뉘앙스의 이야기들이 흘러나왔다.
아마도 사료를 놓고 찾아보니 당사자들의 선친들 혹은 가까운 이들의 역사가 친일의 민낯을 드러냈기 때문이리라.
이뿐이겠는가. 그동안 정부가 주도하여 독립운동가들의 서훈을 추서 하는 상훈심의위 같은 곳에 친일파 혹은 그의 후손들이 포진해서 자기들의 역사를 지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왜곡과 방해를 일삼았는지 문서로도 남아 있고 언론에서도 자주 보도되었다. 뉴라이트 계열의 역사학자들이 그렇게 사활을 걸고 지키려는 식민사관론도 마찬가지다. 식민사관이 깨지면 자기들의 역사가 부정되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역사학자로서의 자긍심과 책임감이 있겠는가. 모두 자기들을 위한 역사를 남기려 할 뿐이다. 그들은 역사학자로서의 자격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