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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경험주의자 Jun 15. 2021

퇴근길, 인터넷과 편의점이
당연하게 느껴진다면

한국을 떠나고 싶다면 ⑤ 쿠바의 아바나


쿠바의 수도 아바나를 ‘시간이 멈춘 도시’라고 했다. 중미의 섬나라인 쿠바는 1960년대 미국의 경제 봉쇄 이후 2015년 미국과의 국교 정상화 전까지 세상과 제한적으로 단절되었기 때문이다. 개발도상국을 여행할 때 좋은 점 중 하나는 아직 때 묻지 않은 그 모습이 내가 유년 시절을 보낸 90년대의 풍경과 닮아 왠지 모를 향수를 불러일으킨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쿠바에는 그보다 좀 더 거슬러 올라가 근현대사 책에서나 접할 법한 몇십 년 전의 모습이 고스란히 남아있다고 했다. 삶이 힘들 때 옛 추억을 되새기며 마음의 위로를 얻듯, 아바나의 복고적 풍경이 어느덧 어른이 되어 차가워진 내 마음을 따뜻하게 보듬어주길 바랐다.



기대했던 대로 쿠바의 이국적인 풍경은 여행자의 로망을 흠뻑 충족시켜 주었다. 왜 더 이상 저런 디자인으로 차를 생산하지 않을까 싶게 스타일리시한 '60-70년 대의 올드카들이 도로를 아무렇지 않게 달리고 있었고, 한 번도 보수한 적 없는 듯한 낡은 빌딩은 일부러 제작한 영화 세트장의 설치물 같았다. 그 아래에서 강렬한 원색 옷을 입은 탄탄한 몸매의 캐리비안 흑인들은 무심하게 서 있는 평범한 일상의 모습 조차 한 편의 화보로 만들었다. 첫날부터 나를 완전히 매혹시킨 이 도시의 라이브 카페에 가서 ‘쿠바 리브레’를 홀짝였고, ‘찬찬’과 ‘관타나메라’를 흥얼거리며 마침내 진짜 쿠바에 왔다고 감격했다. 



하지만 하루하루 지날수록 불편한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말레꼰의 뜨거운 석양, 올드카와 모히또의 낭만은 달콤했지만 현실 세계는 다소 씁쓸했다. 우선 쿠바에서는 인터넷 카드를 구매 한 뒤에도 특정 호텔과 공원 등 정해진 공공장소에서만 인터넷 사용이 가능했다. 사람들의 알 권리가 간접적으로 제한된 것 같았다. 둘째, 공산품을 구하기 쉽지 않았다. 1.5 리터 물 한 병의 재고가 없어 슈퍼 이 곳 저곳을 돌아다녀야 했고, 선반 위 다른 물품의 재고도 한정적이었다. 물 찾아 헤매다가 많이 지쳤을 무렵, 오후 6시가 되자 칼 같이 셔터를 내리는 상점을 본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기본적인 니즈도 충족되기 어려운 곳에서 무슨 재미를 찾지’ 복고가 아름다운 것은 시간이 흘러 과거의 불편함까지 미화되었기 때문이라는 시니컬한 생각마저 들었다. 



마지막으로 대부분의 쿠바 사람들은 관광객인 나를 돈으로 대했다. 숙소 주인의 행동은 돈을 지불하기 전과 후가 달랐고, 그녀의 거짓말로 인해 편안한 승용차 대신 빽빽한 버스 안에 갇혀 한나절을 이동해야 했다. 중남미의 다른 국가들을 여행할 때도 종종 느꼈던 것처럼 사람 간의 약속을 쉽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의 모습에 이들과는 장기적으로 중요한 관계를 맺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들에게 문제는 바로 ‘경제적 여유’인 것 같았다. 내 배를 채워 줄 곳간이 넉넉지 않으니 이방인에 베풀 인심이 남아있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과연 순전히 ‘쿠바’ 때문이었을까? 당시 나는 멕시코 여행 후반부터 시작된 장염으로 제대로 먹지 못해 골골대고 있었고, 몸이 아프니까 한국도 그립고 가족이 보고 싶어 날씨 좋은 한낮에 침대에 누워 엉엉 운 적도 있었다. (그 장염은 이후 미국 뉴욕을 여행할 때까지 무려 한 달이나 지속됐다) 그런데 이런 아픈 나와 쿠바 여행을 함께 해 준 말레이시아 친구 ‘웨이’ 덕분에 그래도 웃을 수 있는 시간이 많았다. 파나마의 한 호스텔에서 만났던 우리, ‘자신으로 인해 다른 사람이 행복해할 때 가장 큰 행복을 느낀다는’ 착한 그와 함께 살사도 추고 해변에도 놀러 가며 쿠바에서도 나름 즐거운 추억을 쌓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와 ‘뜨리니나드’에서 헤어진 날부터 쿠바가 더욱 낯설고 밉게 느껴져 빨리 떠나고만 싶어 졌다. 여행은 ‘나의 컨디션’과 ‘누구와 함께 했느냐’가 어디로 갔느냐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을 절실히 느낀 시간이었다. 만약 다음에 다시 쿠바를 방문할 기회가 있다면… 그때는 정말 건강한 몸과 마음으로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여행하며 쿠바에 더욱 열린 마음으로 다가갈 수 있길, 그래서 이번에는 진짜 쿠바의 매력에 빠질 수 있기를 바라본다


☆ 2018년 6월에 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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