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을러서가 아니라 두려워서

명상 모임에서 배운 한 가지

by 마인풀 라이프

처음 본 사람들인데 어색하지 않았다.

오히려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듯, 각자의 이야기들이 조심스럽게도 술술 풀렸다. 30분 명상을 함께 하고, 우리는 요즘의 마음을 나눴다. 무엇이 힘든지, 무엇을 붙잡고 사는지. 모인 이들은 대부분 인생의 굽이굽이를 몇 번은 돌아본 50대 전후였다. 자기 안을 들여다보려는 사람들이었고, 답을 외면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이었다.


내 차례가 되었을 때, 나는 말했다.
“저는 날마다 명상을 하려고 하지만, 날마다가 어렵습니다. 아마 게을러서겠죠.”


그러자 한 분이 물었다.
“정말 ‘게을러서’일까요?”


나는 대답했다.
“명상을 하는 것보다 쉬운 일이 너무 많거든요. 결국 그 쉬운 것을 택하게 됩니다.”


그분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저도 같은 답을 오래 했어요. 그런데 얼마 전, 제 진짜 답을 들었죠. 저는 게을러서가 아니라 ‘나를 회피’하기 위해 명상을 미뤘더라고요. 내 안을 들여다보는 게 두려웠어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내 안에서 작은 소리가 났다.
혹시 나도 두려웠던 걸까.

내 마음의 무게가 스스로 감당하기엔 무겁게 느껴져서, 나는 자꾸만 가벼운 것들—뉴스 한 줄, 짧은 영상 하나, 아무 생각 없이 넘길 수 있는 화면들—로 눈길을 돌렸던 것은 아닐까.


우리는 하루에도 수십 번 선택한다.
의미와 편안함, 질문과 망각 사이에서.

그리고 순간순간, ‘쉬운 것’은 손이 먼저 간다. 손끝에 닿는 화면, 귀를 간지르는 소식들. 그러다 문득, 이런 질문이 고개를 든다.


우리는 잘 살고 있는 걸까.


내게 인생의 의미는 결국 ‘관계’와 ‘나 자신’으로 돌고 돌아 온다.

가족, 친구, 함께 일하는 사람들. 그 관계 속에서 나는 어떤 역할을 하는가. 도움이 되는 사람인가, 무심한 통과자에 불과한가, 때로는 누군가의 발목을 잡는 존재인가. 그리고 나는 이 삶에서 무엇을 남기는가.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근원적인 질문들은 늘 ‘나중에’로 미뤄진다.
생각보다 시간이 없어서가 아니다. 용기가 조금 모자라서다. 질문 앞에 앉을 용기, 대답을 모르더라도 잠시 머무를 용기. 그래서 나는 명상을 한다. 대답을 ‘찾기 위해서’라기보다, 질문을 ‘잊지 않기 위해서’.


명상은 웅장한 결심이 필요하지 않다.
오히려 작은, 아주 작은 기울임이면 충분하다.
눈을 감고, 등을 곧게 세우고, 숨 열 개만 세는 일.
흐트러지면 다시 하나로 돌아오는 일.
그 사이에 마음은 수십 번 딴 곳으로 달아나지만, 돌아오는 그 한 번의 동작이 나를 살린다. ‘도망’과 ‘돌아옴’ 사이를 왕복하며, 나는 아주 조금씩 나에게 붙는다.


그날 모임 이후, 나는 나와 약속을 하나 했다.
완벽한 하루가 아니어도 좋다.
오로지 ‘앉는 일’만은 가볍게 해보자.
커피 물을 올리고, 주전자가 끓는 동안 3분만.
잠자리에 들기 전에, 침대 옆에서 2분만.
시간이 아니라 ‘앉음’이 목표가 되면, 명상은 단단해진다.


그리고 관계에도 작은 실험을 붙였다.
하루에 한 사람. 30초짜리 감사 메시지 하나.
“오늘 너 덕분에 웃었다.”
“그때 도와줘서 고마워.”
거창한 변화는 오지 않았다. 대신 아주 희미한, 그러나 확실한 온도가 생겼다. 말 한마디 건넬 용기가 나에게도, 상대에게도 작은 숨구멍이 된다는 걸 알았다.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본다.
우리는 잘 살고 있는 걸까.


나는 이제 이렇게 답한다.
잘 살고 있는가의 여부는 ‘큰 대답’에 달려 있지 않다.
오늘 한 번 나에게 돌아왔는가,
오늘 한 번 누군가에게 다정했는가.
그 두 가지의 합이 우리 삶의 방향을 가리킨다.


명상은 그 방향을 잊지 않게 하는 북극성이다.
잠깐의 앉음, 몇 번의 숨, 소박한 고백들.
그것이면 충분하다.
아니, 그것부터면 충분하다.


오늘도 나는 나에게로 돌아오기 위해,
다시 조용히 앉는다.


도망치고 싶을수록, 더 다정하게.


“괜찮아. 3분만 앉아서 숨쉬기에 집중해보자.”
이 한마디와 함께.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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