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는다는 것은 축복이다

일기장을 보며 울었다

by Jina가다


“망각은 고상한 것이다. 상처를 기억하지 않는 것 말이다.”

-찰스 시몬즈-


이사를 마친 책장을 정리하면서 중2 때 쓴 오래된 일기장을 발견했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여러 사건들과 인물들이 그 안에 있었다. 중2 때 친하게 지냈던 ´은하´는 누구일까?, 편지를 주고받았던 펜팔 친구 ´경숙´은 누구일까? 일기장을 펼친 지 오래여서 그들이 누구인지 기억할 기회가 없었다. 중간중간 새겨진 낙서들을 보니, 누군가가 펼쳐본 것도 같다. 아이들일까? 아니면 동생이었을까?


동생과 싸운 얘기들이 가끔 등장했다. 민감한 6학년과 예민한 중2가 부딪쳤나 보다. 우리 둘의 갈등으로 인해 가족들이 끼어들고, 눈물을 쏟는 일이 있었다. 점잖은 아빠에게 욕을 듣고 놀라서 눈물의 일기를 쓴 사춘기 소녀가 눈에 그려졌다. 아빠의 오해를 받은 것이 서러워 울면서 쓴 글에, 어른이 된 나는 눈물을 다시 흘렸다.


책장을 정리하며 허리에 둘렀던 앞치마 끝으로 눈물을 닦아냈다.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는 그 분위기와 감정이 차올라서 소파에 풀썩 앉아 잠시 오열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월급날마다 치킨과 빵을 가득 들고 오던 멋진 아빠를 남편에게 자랑했었는데 말이다. 남편은 그런 내 아버지 이야기를 듣고서, 출장마다 선물을 사들고 오는 연습을 한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7년 동안, 아빠의 따뜻한 모습들만 기억에 남기고 있었다. 일기장은 생각지도 못했던 기억을 떠올려 슬프게 했다. 수년간 작디작은 상처를 잊고 살았음이 감사하다. 그리고 내면이 성장한 가운데 과거를 만날 수 있어 감사하다. 신께서 망각이라는 선물을 주심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말이다.




이제는 사춘기의 고비를 넘기고 멋져진 아들이지만 한때는 나를 매일 서러워 울게 하던 아들이었다. 아들은 심한 사춘기로 마음의 병을 깊게 앓았다. 겉으로는 따뜻한 엄마였지만, 일기장에 아들의 만행을 모두 기록한 적이 있다. 아들 흉을 글로 쓰면서 마음을 순화시키고 위로를 얻었다.


아들이 대학생이 되고 정상적으로 회복되었던 때 우연히 그 일기장을 펼치게 되었다. 아들의 말과 거친 행동으로 아파한 상황을 글로 보니, 그때의 슬픔들이 다시 몰려왔다. 아들을 미워하는 마음이 고스란히 올라와서 한참 동안 속상했던 날들이 기억났다. 현재 좋아진 상황을 다행이라 여겼지만, 당시의 슬픔까지 소환시킨 것이다.


자녀들을 키우면서 가슴 아프고 미웠던 일들이 고스란히 남아 생생하게 기억난다면 얼마나 힘들까? 아이들을 다시 안아주고 다시 사랑할 수 있음은 아픔을 잊었기 때문인 것 같다. 특히나 기억력이 미약한 나에게는 아픔을 툭 털고 금세 웃을 수 있어 다행이다. 시댁의 섭섭한 일과 남편의 속상케 한 말들에도 망각의 마술이 마구마구 적용되면 좋겠다.




기록으로 남긴 글이 파도처럼 슬픔을 다시 불러오지만 이 기록들은 계속해야겠다. 시간이 지나고 나니 그때는 어려웠어도 현재는 안도와 감사만 남는다. 혹시 영원히 잊고 싶은 일이라면 기록도 함께 폐기시켜야겠다.


시간이 흘러 잊을 수 있음은 오히려 축복이다. 부끄러웠던 일과 서글펐던 일들, 섭섭했던 사람과 미웠던 사람들 그리고 부족했던 나 자신조차도 지울 수 있음이 감사하다.


“기억해 내는 힘이 아닌 잊는 힘이야말로 우리들이 살아가는데 더 필요한 것이다”

-쇼렘아쉬-








#망각의힘 #일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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