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라색 도넛 방석을 손에 꼭 잡았다. 고속열차에서도 비행기에서도 혹시나 의료 방석을 놓칠까 봐 제일 먼저 챙겼다. 10시간 혼자서 비행기 좌석에 앉아있는 동안 울음이 나오려 했다. 바로 옆 좌석 조용히 앉은 70대 유럽인 백발 노부부가 아니었으면 참지 못했을 거다. 기내 복도를 돌고 화장실 앞에 서기를 여러 번. 다큐멘터리 세 편, 재미있는 영화를 보면서도 잠들지 못해 고통스러웠다.
‘여행을 시작한 게 잘한 선택일까?’ 반복되는 고민은 딱 시드니 공항에 도착할 때까지였다.
두 발에 신은 하얀 운동화를 내려다보고 있자니 사고 현장 아웃렛 운동화 매장이 생각났다.
"꽈당"
"하코야, 끙~, 억!, 어~, 사장님 걷기 힘든데요.~"
숨을 들이마시고 뱉는 일이 힘들었다. 짧은 호흡을 이어갔다.눈물이 찔끔 났다.
새 운동화를 신어보려 앉은 철제 장의자가 무너졌다. 헐거웠던 나사가 풀린 모양이다.
똑바로 눕기 힘들어 조심히 숨을 참으며 응급실 침대에 옆으로 누웠다.
"엑스레이 찍으러 가시죠"
"미추 골절입니다. 미세하게 금이 갔지만 한 달은 지켜봐야 합니다. “
출국 2주 앞둔 주말이었다. 미추는 척추 중 가장 아랫부분에 자리 잡고 있는 일명 꼬리뼈다. 앉고 일어설 때, 경사를 오를 때 극심한 고통이 느껴졌다.
대형 정형외과에 들러도 특별한 치료책은 없었다.
진통제와 절대적인 휴식! 금 간 뼈가 붙기까지 조심하며 시간을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일주일간 꼼짝 하지 않고 침대에 누웠다. 뜨끈한 온수매트 위에 종일 누워 몇 번이고 생각했다.
‘20일간의 모든 일정을 취소해? 아니 조심하면서 강행할까?’
‘이 나이에 고생해도 되는 건가, 아픈 몸을 끌고 모험을 떠난다면 미친 거 아냐?’
‘우선 일주일간 가만히 누워 최대한 치료하자. 그다음 상황을 보자. 이런 기회는 또다시 없을 거야’
집안일은 모두 멈추고 최대한 치료에 집중했다. 우선 두툼한 의료용 도넛 방석을 구입했다. 그리고 여행용 보라색 도넛 모양 방석도 배송받았다. 출국 3일 전부터는 캐리어를 채우기 시작했다. 앉고 일어서는 동안 나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입으로는 자연스럽게 ‘으-으-헛’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래도 여행을 앞두고 정신만은 어느 때보다 맑았다. 간절함 때문인지 잘 치료되고 있다는 착각이 들었다. 남편에게는 아픔을 숨기느라 속으로 신음을 삼켰다.
기차에서도 비행기에서도 보라색 도넛 방석이 제일 먼저 자리를 차지했다. 그 위에 꼬리뼈가 자극되지 않도록 조심히 앉았다. 아들의 졸업식 축하자리에도 동그란 방석이 먼저 앉았다.
일요일 호주 교회에 참석했다가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관심을 받은 일이 있다. 둥그런 테이블에 다섯여섯 명씩 앉아 간단한 음식을 나눴다. 음료를 가지러 간 동안 은발 멋쟁이 할머니가 내 방석 위에 앉아있었다. 내가 얘기 나누던 노부부와 합석한 모양이다. 방석이 아주맘에 든다며 장난스럽게 웃는 은발 할머니를 보고 웃음이 터졌다.
노부부와 멋쟁이 할머니는 ‘어디서 샀는지, 어떻게 살 수 있는지’ 도넛 방석에 관해 묻는다.
육중한 몸의 할아버지가 의자에 앉기 힘들어 구하고 싶다는 것이다. 내 몸이 괜찮으면 당장 선물로 건넸겠지만 양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인터넷 정보만 알려주었다. 노인을 위한 상품으로 제법 판매하기 좋은 상품이겠는데!
‘호주에서 도넛 방석 장사나 할까 보다. 하하’
여행하며 날짜가 지날수록 꼬리뼈는 조금씩 좋아졌다. 행사 없는 시간에는 전기담요 위에 무조건 누워 쉬었다. 스스로 환자임을 계속 되새겼다. 내 몸은 내가 제일 잘 느끼고 판단할 수 있기에 스스로 아껴야 한다. 아들에게도 사고 상황을 전달하고, 무리한 일정은 배려받으며 여행을 진행했다.
만약 처음부터 모든 계획을 포기했다면 어땠을까. 오래오래 후회했을 것만 같다.보라색 방석 사진을 볼 때마다 여행과 회복 과정이 생각난다. 작은 방석 하나에 온몸을 의지하고 호주를 누릴 수 있었다. 뉴질랜드로 넘어가기 전, 버스에 놓고 내렸지만 말이다.
그 작은 물건에 많은 시간 의지했다. 큰 도움이었다. 누군가에게는 하찮은 것이지만 필요한 이에게는 귀한 것이 되는 작은 것의 소중함! 작은 순간을 귀히 여기고, 작은 관계를 소중히 여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