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님 숙소 침대에 마음 편히 누워 쉬는 중이었다. 몸을 일으켜 곧바로 앉았다. 두 눈과 심장이 바짝 조여지면서 가슴 안 쪽이 쿵쾅거렸다. 핸드폰을 충전기에 얼른 연결하고, 시드니 시내 갈 곳들을 검색했다. 지하철 시간표도 급히 찾아서 저장했다.
숙소에서 역사까지는 걸어서 20분. 지하철 운행 시간은 드문드문 정해져 있다. 문제는 시드니 시티 투어 하루 일정을 아들에게 모두 맡겨 아무런 준비가 없다는 것이다. 이왕 맡기려면 간섭하지 않도록 모르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준비성과 책임감을 훈련하려는 속셈도 있었는데. 먼저는 배터리가 걱정되었다. 급한 대로 간단 일정을 노트에 메모했다. 아들에게는 걱정을 들키고 싶지 않다. 연약하고 불쌍한 엄마가 아닌 멋지게 무엇이든 해내는 모습을 보여주고싶은 마음.
리버스톤에서 열세 개 역을 지나 센트럴역 그리고 환승해서세 개 역을 거치면 목적지인 써큘러 키. 오는 길은 시간에 따라 역사가 조금씩 달라진다. 하루 안에 혼자서 들러 볼 곳은 오페라하우스, 루나파크, 밀슨파크, 보타닉가든이다.
‘혼자서도 잘 다녀올 수 있어. 오늘은 분명 즐거울 거야.’
빠른 걸음으로 도로변을 걸으면서 아들이 말한다.
“여기는 시골이라 인종 차별하는 사람들이 가끔 있어요. 특히나 여성들은 위험해요. 어두워지기 전에 꼭 돌아오세요.”
차도를 따라 길게 뻗은 인도를 걸었다. 자전거를 탄 중년 백인이 멀리서부터 무례한 표정으로 길을 비키라 말한다. 인도 옆 잔디로 비켜나며 나도 모르게 “아임 쏘리!” 내뱉었다.
“어머니, 미안하다 말 안 해도 돼요. 자전거 도로 아니고 사람이 걷는 길이예요.”
아들이 시원하게 한국말로 욕을 내뱉는다.
인종차별이 이런 느낌이구나. 잘못한 것 없이 자연스럽게 약자가 되는 상황. 자꾸만 작아지는 마음. 길을 걷는 중에 자동차 창문을 열고 욕하는 아이들을 그대로 보고 있는 백인 부모 이야기를 들었다. 물총을 쏘아대는 아이들을 겪었다는 아들의 지인 이야기도. 오후 다섯 시가 되기 전에 숙소로 돌아와야 하겠다. 신데렐라의 시간처럼.
아들이 역사에서 충전해 준 교통카드를 주머니에 챙겼다. 오팔 카드 충전 방법을 눈여겨보았다. 보라색 도넛 방석을 넣은 가방을 꼭 잡고 지하철 창 너머로 아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목적지까지는 한 시간 반, 갈아타야 할 지하철역을 놓치지 않기.
서울에 살고 있다면 지하철 갈아타는 일이 좀 더 쉬웠을 텐데. 부산에서도 자동차만 운전하느라 지하철 사용이 서툴다. 입이 바짝 마르고 심장이 두근거렸다. 자꾸만 핸드폰을 열어 지도와 위치를 확인했다. 핸드폰 충전기를 챙겼으니 다행이다.
지하철은 2층으로 되어 좌석은 충분하다. 공간이 넓은 2층으로 올라갔다. 의자는 등받이를 쉽게 들어서 앞뒤로 옮길 수 있어 좌석 방향을 마음대로 조절한다. 새로운 것들이 보이면 조국에 가져가고파 자꾸만 눈여겨본다. 슈퍼마켓에서도 거리에서도 앞서가는 제품과 시스템을 만나면 내 나라가 생각났다. 좋은 것을 보면 가족이 생각나는 것처럼.
조심히 둘러보니 열차 한 칸 안에 지구마을 가족으로 인종이 다양하다. 맞은편 멀리 보이는 이는 머리카락을 멋지게 꼬았다. 과자를 부지런히 먹더니 아무렇지 않게 부스러기 가득한 옷을 털어 낸다. 말하는 언어는 스페인어인 듯하다. 옆에서는 잠시 배워보았던 중국어가 들린다.
“이~꺼. 피아오량, 쑤어 더~러.”
뒤에서는 호주식 영어다. 한국인 나는 혼자 조용히 창밖으로 눈을 돌렸다.
갑작스럽지만 혼자만의 멋진 기회를 망칠 수 없지. 어깨에 멘 가방 안을 다시 확인했다. 도넛 방석, 오팔 교통카드, 비자카드, 물 한 병, 노트와 볼펜, 핸드폰과 충전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