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봐 정대리. 도대체 일을 어떻게 하는 거야. 이 서류 아니잖아."
아침부터 정대리는 부장에게 불려 가 된통 당하고 있었다. 어제 마무리해 달라던 서류와 타 회사에 보내야 할 서류가 바뀐 모양이다. 어제 몇 번이나 확인했는데 왜 또 바뀐 건지. 차에서 다시 한번 확인하지 않고 그대로 올려 보낸 서류가 아무래도 잘못된 모양이었다.
"죄송합니다."
연신 고개를 꾸벅이는 대산은 빨리 바꿔 오겠다며 부장이 구겨서 흔들고 있는 서류를 받아 들었다. 대산은 빠른 걸음으로 나가 자신의 책상 위를 뒤졌다.
"정대리. 매번 왜 그러냐. 진짜 일머리가 없는 건지."
옆에서 비아냥 거리는 동료의 말 따위는 신경 쓰이지 않았다. 한참을 뒤적이던 대산은 찾았다 하고는 뛰듯이 부장실로 다시 향했다. 대산이 나가자 또라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대산은 5년 전 입사하고 나서 지각을 한 적도, 일을 하다 농땡이를 피운 적도 없었다. 성실이라는 말 빼면 그를 설명할 단어가 없을 만큼. 그런데 매번 허둥대는 성격에 한 두 가지 실수를 하고 만다. 그리고 워낙 착하고 성실하다 보니 자신의 일도 대산에게 부탁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이 일들을 다 처리해주다 보니 실수는 더 잦아졌다.
터덜터덜 사무실로 들어온 대산은 어찌나 뛰었던지 셔츠 등뒤가 땀으로 젖어 있었다.
"그러게 다른 사람들 일까지 뭐 하러 다해주냐? 해줘도 맨날 고맙다 인사도 제대로 안 하는데."
"앞으로는 안 해줄 거야."
"맨날 말만. 착하면 더 이용하는 게 세상사람들이야. 답답아."
성욱은 혀를 끌끌 차며 대산의 등을 두들겼다. 성욱은 회사에 같이 입사한 후 계속 함께 일해온 동기였다. 하지만 대산보다 먼저 승진했다. 남들보다 조금 빠르게 승진한 건 일도 똑 부러지게 잘할뿐더러 중요한 프로젝트에서 큰 성과를 거두었기 때문이었다.
"과장님. 이제 자리로 가주시죠."
"정대리야. 이제 곧 승진 발표 있는 거 알지? 정신 차려. 남 밥그릇 신경 써줄 때가 아니라고."
"알았다고!"
대산은 살짝 짜증이 났다. 성욱에게 짜증이 났다기보다는 답답한 자신에게 더 짜증이 나있었다. 성욱은 '으이그'라고 하며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성욱이 대산을 아끼는 맘에 하는 말인 건 알지만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대산은 신경질적으로 휴지를 뽑아 땀을 닦아내고는 자리에 앉아 미처 마무리하지 못한 서류를 정리했다.
이번 인사고과에서 높은 점수를 받아 대산의 승진이 유력하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워낙 성실했기 때문에 다들 당연하다고 생각했었다. 물론 대산도. 하지만 며칠 뒤, 승진 발표에서 대산은 크게 낙담하고 말았다.
자신보다 2년 늦게 들어온 강대리가 과장으로 승진한 것이다. 당연히 이번에는 자신의 차례라고 생각했던 대산은 충격에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강대리는 일의 처리 속도도 빠르고 잘했다. 남들이 말하는 일머리가 좋았다. 하지만 잦은 지각에 일하는 동안에도 담배다 커피다 하고 자리를 비우는 일이 많았다. 그런데 그런 강대리가 성실한 자신보다 먼저 승진을 하다니 대산의 입장에서는 납득할 수 없었다. 다들 강대리를 축하해 주면서도 대산의 눈치를 보는 상황이었다. 대산은 의자에 걸린 재킷을 거칠게 걷어 입고는 부장실로 향했다. 매번 혼나러 가기만 해서 가기 꺼려했던 부장실로 대산은 당차게 발을 옮겼다.
똑똑
노크 소리에 들어와 라는 소리가 들렸다. 대산은 문을 열고 들어갔다. 부장은 올 줄 알았다는 듯이 태연히 대산에게 앉으라며 의자를 내어주었다.
"이번 인사말인데요."
"자네가 찾아올 줄 알았네. 왜 자신보다 늦게 들어온 후배가 먼저 승진했냐 따져 물으러 온 거지?"
"네."
"자네 인사고과는 좋았지. 그런데 여기는 회사잖아. 회사는 사람의 능력을 보고 평가하는 곳이고."
"제가 강대리보다 능력이 떨어지신다는 말씀이시죠?"
"지난번 화성 프로젝트. 회장님이 거기에 공을 많이 들였는데 그 프로젝트를 강대리가 담당했잖아. 그거 때문에 강대리가 더 점수가 높았던 것 같아."
"그러니까 부장님 말씀은 아무리 성실하게 일을 해도 일머리 좋은 사람이 먼저 승진한다 이 말씀이시죠?"
"뭐 그렇게까지 생각할 필요 있나. 그냥 강대리가 운이 좋았다는... 그리고 인사과장이 결정한 일이기도 하고. 성실이냐 능력이냐를 두고 고민했겠지. “
"아무리 그래도 면전에 대고 너 능력 없다고 말씀하시는 건 좀.. 일단 알겠습니다. 나가보겠습니다."
더 이상 이야기 해봐야 결과가 바뀔 것도 아니고 대산은 포기하는 마음으로 부장실을 나왔다. 다시 사무실로 들어가고 싶었지만 눈치 보는 사람들도 싫었고 초라한 자신의 모습을 보이기도 싫었다. 대산은 그대로 회사 밖을 나가 성욱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디야."
"과장님. 저 오늘 반차 좀 쓰겠습니다."
"아휴. 알았어. 이따 퇴근하고 전화할게 한잔하자."
"응"
대산은 전화를 끊고 집으로 가는 지하철을 탔다. 매일 아침 지옥 같은 이 지하철을 타고 지각하지 않기 위해 부지런히 움직였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성실하게 일하면 차근차근 올라갈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세상은 그런 걸 원하는 게 아니었다는 생각에 자괴감이 들었다.
원룸에 거의 다다랐을 때 대산은 다시 왔던 길을 돌아 집 근처 편의점으로 향했다. 대산은 맥주 네 캔과 오징어 하나를 사서 편의점 앞 테이블에 앉았다. 대낮에 양복 입은 남자가 혼자 앉아 술을 마시고 있으니 지나가는 사람들이 힐끗거리며 쳐다봤다. 대산은 개의치 않고 맥주캔을 따서 그대로 원샷해버렸다. 대산이 내는 캬 소리가 주변을 또 한 번 주목시켰다. 두 번째 캔을 따고 오징어 하나를 물었을 때 양복 입은 낯선 남자가 대산의 맞은편에 앉았다. 40대 정도 되어 보이는 남자는 자신이 가져온 맥주를 따고는 대산에게 건배하자는 제스처를 했다. 대산은 당황스러웠지만 자세를 고쳐 앉고 낯선 남자와 맥주를 부딪혔다.
"회사원 같은데 반차 내셨어요?"
"네. 오늘 영 일진이 별로라. 그럼 그쪽분도?"
"아니요. 저는 오늘 해고됐어요."
"네?"
낯선 남자는 오늘부로 해고 됐다며 지금 집에 들어가기 난처해 집과 두 정거장 떨어진 이곳에서 낮술 중이었다고 했다. 갑작스러운 해고는 아니라고 했다. 어떻게든 버텨보려 했지만 더는 버틸 수 없어 나왔다고.
"그럼 해고가 아니라 그냥 스스로 퇴직하신 거 아니에요?"
"해고나 다름없지. 내 발로 나가게 만들었으니까."
무슨 일이 있었냐 물어보고 싶었지만 대산은 더 묻지 않았다. 자신의 일로도 복잡했으니까. 낯선 남자도 더 이상은 그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아 하는 눈치였다.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하시려고요?"
"경력직으로 다른데 이력서 몇 군데 넣어놨지 벌써. 두 군데서는 전화 와서 내일 면접 보러 가기로 했고."
"벌써요? 그럼 이미 다 계획을 짜두시고 오늘 나오셨나 봐요."
"어차피 나와야 할 곳이었으니까. 첫 직장이기도 했고 나름 애정이 많았던 회사라서 쉽게 마음을 못 접었던 거죠."
"아저씨를 홀대하는 회사에 무슨 애정을."
"그러게 말입니다. 그런데 젊은이는 무슨 일입니까? 물어보면 실례인가."
대산은 잠시 멈칫하더니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머리는 이해가 되지만 마음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고.
"음 그랬군요. 근데 저는 젊은이 마음 이해합니다. 저도 그런 경우가 많았으니까요. 그런데 한 마디 하자면 아무래도 젊은이와 제가 비슷한 성향인 듯해요. 나중에 저와 비슷하게 끝날 거라는 뜻이죠. 성실함을 알아주는 회사를 찾는 게 좋을 것 같아요. 하루라도 젊었을 때. 나도 후회 중이거든. 몇 번 승진 미끄러졌을 때 나를 알아봐 주는 곳으로 이직할걸. 사실 이직이 쉽지 않잖아요. 근데 또 어렵지도 않은 거 같아요. 젊을수록 더 좋고."
대산은 오늘 승진 사건으로 마음이 상하긴 했지만 이직을 생각해보지는 않았다.
"요즘 MZ 세대인가 뭔가 그 사람들은 할 말 다 하고 그란다더만. 뉴스 보니까."
"다 그렇진 않죠. 성향 따라 다르니."
"그렇긴 하죠."
남자와 대산은 또 한 번 맥주 캔을 부딪히고는 시원하게 들이켰다. 대산은 사 왔던 네 개의 캔을 다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자도 집에 가야겠다며 자리를 털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응원하며 각자의 길로 걸어갔다. 낯선 남자와의 만남 이후 대산은 고민에 빠졌다. 자신을 알아주는 곳으로 정말 이직을 해야 하는지, 아니면 입사 후 정성을 쏟았던 이 회사에서 조금 더 버텨야 할지. 이 회사보다 더 나은 조건으로 들어갈지도 미지수였고 덜컥 사표를 내고 나서 혹시나 직장을 못 구하게 된다면 그 또한 낭패였다.
대산은 집으로 들어와 찬물에 샤워를 하고는 침대에 누웠다. 이직이냐, 버티느냐. 찬물샤워도 복잡한 머리를 씻겨주지는 못했다. 핸드폰을 열어 구직 사이트에 들어갔다. 신입 사원 모집 글이 보이면 우선 들어가 보았다. 지금 회사보다 연봉도 괜찮은 곳도 많았다. 그중 한 회사의 인사말에 “성실히 일하실 분”이라는 문구가 쓰여있었다. 보통 서비스직에 쓰이는 문구인데 하며 자세히 보니 우리 회사와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중소기업이었다. 마감 날짜를 보니 열흘정도 남아있었다.
대산은 자세를 고쳐 앉고 노트북을 켰다. 방금 본 회사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기 위해 검색을 시작했다. 생각보다 탄탄한 회사였고 중소에서 중견 기업으로 발돋움하기 직전이었다.
“여기다.”
아까까지만 해도 고민하던 대산은 바로 이력서와 사직서를 작성했다. 이곳에 합격하지 않더라도 지금 회사는 그만두고 싶었다. 고민조차 하지 않았던 퇴사였는데 마음을 먹고 나니 빨리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만 들었다. 사직서가 완성되자 바로 프린트를 하고 흰 봉투를 찾아 넣어두었다.
그날 저녁 대산은 성욱을 만나 자신의 계획을 이야기했다. 성욱은 무모하다고 했지만 이미 결정한 대산의 마음을 돌리지는 못했다.
다음 날, 대산은 사직서를 성욱에게 전했다. 점심시간이 끝난 후 성욱이 부장님 실에 가보라고 했다. 사직서가 벌써 부장에게까지 보고가 된 모양이다. 잠시 후 대산은 부장실의 문을 두드렸다.
"이봐 정대산 씨. 승진 한 번 미끄러졌다고 바로 사직서라니."
"한 번 아니지 않습니까. 다음에 또 좋은 성과를 내는 사람이 있으면 저는 또 밀리겠죠. 제가 다른 사람들의 일을 대신하는 것도 부장님 알고 계셨죠? 여긴 그런 성실함이 아닌 그저 성과만을 바라는 회사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를 인정해 주는 회사로 옮기려고요."
"참 순진한 사람일세. 어디 가도 똑같을 거야."
"네. 그렇다고 해도 여기는 이제 그만 다니고 싶습니다."
"그럼 오늘 바로 자네가 하던 일 모두 강대리에게 인수인계하게. 바로 처리하겠네."
"네."
부장실을 나온 대산은 홀가분한 기분이 들었다. 사무실로 돌아와 강대리에게 모든 업무를 인수인계했다.
"정대리님. 지금까지 이 모든 걸 하셨던 거예요?"
"네 강 과장님. 그럼 모두 끝난 거죠?"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무슨 소리를. 강 과장 때문에 가는 거 아니니 마음 쓰지 마요."
성욱은 퇴사 파티라도 해야 한다며 회식 이야기를 했지만 대산은 1분도 이곳 사람들과 엮이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성욱에게는 미안한 마음을 전하고 대산은 그대로 집으로 돌아왔다.
다음 날 이직할 회사에 이력서를 넣고 며칠 뒤 면접이 있었다. 면접에서 물어본 것은 딱 두 가지였다.
이전 회사에서 지각을 얼마나 했는가, 맡은 업무량은 어느 정도였는가.
처음엔 지각의 횟수를 물어보니 의아했다. 하지만 이내 질문의 의도를 파악했다. 처음 구직 사이트에 올라온 회사에서 필요한 인재를 찾는다는 문구에 "성실히 일하실 분"에 답이 있었다. 이 회사는 능력도 능력이지만 최우선으로 보는 것이 성실이라는 것을 알았다. 다른 누구보다 대산에게 어울리는 말이었다.
그리고 또다시 며칠 뒤 경쟁률이 높았음에도 대산은 합격 통보를 받았다.
새로운 곳에서 회사생활을 시작한 대산. 이곳에서는 자신의 업무를 다른 사람에게 미루는 사람도 없었고 누구 하나 지각하는 사람도 없었다. 어쩌다 한 번 늦는 경우는 오는 길에 접촉사고가 났다는 어느 대리뿐이었다. 성실이 모토인 이 회사 사람들은 자신의 일에 대한 책임감도 자긍심도 높았다.
많은 업무량과 다른 사람의 업무까지 도와줬던 대산은 이곳에서 자신의 일만 할 수 있게 되니 이 전 회사에서 했던 실수는 한 번도 하지 않았다. 허둥댈 필요가 없으니 당연히 실수도 없었다. 일이 즐거워졌다고 해야 할까. 어느 순간부터는 승진에 목을 메지도 않았다. 자신이 한 만큼 회사는 톡톡히 보상을 해주었으니까.
대산은 이제 단순히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닌 회사를 성장시키는 사람이라는 책임감이 생기게 되었다. 능력을 보여야만 하는 곳이 아닌, 자신의 능력을 알아봐 주는 곳에서 대산은 날개를 펴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