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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백 원은 쌍쌍바, 5백 원은 뽑기,1천 원은 투자

영혼을 지키는 나만의 주식 라이프 (25)

by 김세인

루이비통 출근 가방 하나 없다고 사치를 하지 않는 건 아니었다. 계절마다 옷을 사러 백화점으로 향했다. 같은 옷을 자주 입는 직장의 여선배를 보며 저렇게까지 아껴야 하나 싶었다. 그 선배가 뿌듯한 표정으로 옷 대신 개인연금통장을 보여줄 때도 나는 별 감흥을 얻지 못했다.


내 통장에 있는 돈은 남의 집 살림 구경하는 듯 그렇게 살았다. 안 그래도 바쁘고 힘든 일상에 굳이 복잡한 경제 세계에 대해 알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매번 주유소에 가면서도 기름값이 얼마나 올랐는지엔 관심이 없었다. 아이폰을 썼지만 애플이 얼마나 돈을 벌어들이는지 몰랐다.


주식을 시작하고 나는 깨달았다. 내가 금융 문맹이라는 사실을.


스스로의 무지를 알라는 소크라테스의 말처럼 나는 어느 날 뼈저리게 깨달았다. 경제용어는 물론이고 한 가정의 살림을 꾸려가야 갈 지식과 계획이 나는 한참 부족했다. 재무설계사가 추천하는 보험과 상품에 사인만 했다. 변액 보험을 가입해놓고 운용수수료가 그렇게 많았는지, 내가 가입한 펀드는 선취수수료인지 후취인지 구분도 못하고 수익률에만 집착했다. 내가 버는 돈의 범위 내에 맞춰서 살았다. 노동과 소비, 돈의 가치에 대해서 나만의 논리를 쌓을 생각은 없었다.


나는 경제보다 인문학에 심취하는 편이었다. 신문을 볼 때도 경제와 정치는 패스하고 사회면이나 칼럼을 주로 읽었다. 주식을 시작한 후로 경제면을 훑어보기 시작했고 한 두면으로는 갈증이 생기는 순간이 왔다. 신문을 아예 경제신문으로 바꾸어 구독했다. 도통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가득한 기사를 봐야 한다는 건 나에게 도전이었다.



무지를 깨닫는다고 한 순간에 모든 것이 달라지는 건 아니었다. 다만 나는 아주 조금씩 변해갔다. 신문을 스크랩하고 증권계좌를 만들고 내 통장에서 빠져나가는 돈을 살폈다. 주변 지인들에게 특히 젊을수록 주식을 권하고 싶어졌다. 아직 어린 나의 자녀들에게도 주식을 사주고 싶었다.


주식을 사지 않았더라면 초등학생인 아이와 ‘투자’에 대해 대화할 일은 없었을 것이다. 나의 부모님이 그랬던 것처럼 용돈 기입장을 열심히 기록하고 아껴 써야 한다는 정도에서 경제에 관련된 대화는 마무리되었을 거다. 경제교육에 철저하기로 유명한 유대인 이야기는 먼 나라 이야기였을 것이다.


학교 앞 문구점에 가기로 아이와 약속한 날이었다. 아이는 뽑기를 하나 하고 나더니 슬러쉬 기계 앞으로 가서 콜라 슬러쉬를 먹을 것인지 콜라와 사이다를 섞은 슬러쉬를 먹을 것인지 고민하는 눈치였다. 불량한 음료를 먹이기 싫어 핀잔을 주며 스타벅스에 데려갔다.


스타벅스에 가서 샌드위치와 한라봉 주스를 고른 아이는 메뉴가 나오는 동안 주변을 천천히 살폈다. 긴 테이블에서 공부하는 사람들, 소파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 빈자리가 많지 않았다. 아이는 자신이 고른 음료는 얼마인지, 엄마는 카드로 결제했는지 생일 때 받은 쿠폰으로 결제했는지도 물었다.


“엄마, 나 모은 돈 18만 원 있잖아. 스타벅스 주식 살까?”


‘스타벅스 주식?’

그 말을 듣고 나는 순간 머리를 한 대 맞은 기분이 되었다. 어디를 가도 스타벅스는 인기가 많은 것 같다고 아이가 말한 적은 있었지만 주식과 연결해서 이야기한 건 처음이었다.


“그러게. 사람들이 이렇게 스타벅스에 많은 거 보니 커피가 많이 팔리겠다.”

“스타벅스 주식 하나에 얼마야? 요즘 삼성전자 주식은 인기가 없다며.”

“하하. 검색 한 번 해볼까?”


우리는 스타벅스 주식을 검색했다. 한 주에 113달러라는 걸 확인하고 아이는 자신이 가진 돈으로 1주 밖에 못 산다고 실망하긴 했지만 우리, 아니 나에게 이 경험은 강렬했다.




아이가 ‘돈’에 눈을 떴다고 느낀 순간들이 있다. 현금이 없어 당황하는 날이면 아이가 옆에서 지갑을 꺼내 현금을 건넸다. 단 오늘 안에 갚아야 한다며 차용증이라도 쓸 기세였다. 부모에게 돈을 빌리면 이자까지 갚게 한다는 유대인 경제교육을 나는 한 적이 없는데 말이다. 아이는 용돈 기입장을 쓰지 않아도 자신이 가진 돈은 정확히 기억했다. 투자해 놓은 세뱃돈에 대해서도 자주 확인했다.


초등학교에 입학한 아이에게 일주일에 2천 원의 용돈을 줬다. 1학기 내내 아이는 학교 문구점에서 파는 잡동사니들과 5백 원짜리 뽑기에 심취해 있었다. 내가 학교 다니던 시절, 1백 원짜리 종이뽑기를 하러 달려가던 즐거움을 떠올리면 마냥 막을 수는 없었다.


“힝. 또 코끼리 피리야.”

“이럴 수가. 집에도 코끼리 피리랑 말랑이 많이 있는데. 뽑기 해서 버린 물건까지 합치면 네가 가지고 싶어 하던 카카오프렌즈 가방도 살 수 있겠다. 말랑이는 5백 원을 쓸 만한 돈일까?”


간간이 경제교육이랍시고 이런 식으로 설명해 주던 나는 도리어 아이에게서 자극을 받고 배워간다. 나의 주식 경험을 물려주려 했지만 그저 아이의 경험을 지켜보고 함께 대화만 해도 금융문맹의 대를 잇는 일을 피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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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부터 아이는 5백 원은 뽑기. 5백 원은 쌍쌍바를 사 먹고, 1천 원은 투자해달라며 나에게 건넨다.


아이가 돈에 눈을 뜬 것은 자신이 가진 돈의 능동성을 느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단지 그 돈으로 마음껏 아이스크림을 사 먹을 수 있다는 사실 때문만은 아니다. 엄마에게 의존하지 않고 내 돈으로 원하는 소비를 결정할 수 있는 주도성, 지갑에 있는 비상금 3만 원은 절대 못 나오게 꽁꽁 싸매며 돈을 모으는 정신, 남은 1천 원은 미래를 위해 투입하는 미래지향적인 태도를 익히는 것 같다.


내 지갑에 있는 돈은 내가 철저히 관리한다는 어린이 자산 관리사가 나타난 느낌이랄까.


자녀에게 주식 거래라는 경험을 물려주고 싶은지 묻는다면 전적으로 그렇다고 대답하고 싶다. 경제에 눈을 뜬다는 것은 꼭 주식, 채권, 환율, 각 국가의 경제적 이해관계에 대해 빠삭한 사람이 된다는 의미만은 아니다. 오를만한 주식 종목을 맞추는 사람도 아니다.


나에게 경제에 눈을 뜬다는 것은 ‘균형’의 중요성을 깨닫는 일이었다.


들어온 돈과 나가는 돈의 균형을 맞추는 일부터 노후를 준비하면서도 현재 누릴 수 있는 일들의 밸런스를 맞추는 일까지. 내가 산 주식으로 2박 3일 제주도 여행비를 벌 수 있는 절호의 찬스를 누린 날과 원금을 잃고 손실과 배신감을 느끼던 날 사이에서. 옆집 주식들은 다 오르는데 왜 내 종목은 안 오르냐며 보채던 조급함과 투자가 자산이 되는 날까지 기다리는 인내심 사이에서.


5백 원은 뽑기, 5백 원은 쌍쌍바, 1천 원은 투자하는 균형을 잡는 일.


어떤 일이든 균형을 잡는다는 건 쉽지 않다. 투자를 처음 시작할 때는 정제된 곡물보다 통곡물을 먹는 것처럼 거칠게 느껴져도 주식시장의 회오리바람에 휩쓸려보기도 하고 감정의 동요를 겪어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그 과정이 필연적 인지도 모른다. 그런 과정을 거치면 몇 발자국 물러나 나의 투자성향과 가치관에 맞는 방향이 그려진다.


그 방향으로 향하는 일이 균형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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