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 여성 특유의 페미니즘이 있다.
최근 한국보건사회연구원(보사연)에서 성차별이 개선되면 출산율도 상승할 것이라는 논문을 발간했다.
이 논문은 WEF 성차별 통계를 근거로 논리를 전개했는데, WEF는 내가 브런치에서도 여러차례 분석글을 올렸던 그 보고서다.
WEF 성차별 보고서 관련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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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보고서에는 성차별이 개선되면서 출산율이 줄어들다가, 어느 시점이 되면 성평등이 오히려 출산율을 올린다는 주장을 전개했다. 그리고 우리나라는 선진국이기 때문에 성차별이 개선되면 출산율이 증가할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나는 이 결론에 대해서 완벽하게 틀리다는 사실을 확인했고, 이어서 정보공개청구를 진행했다. 통계 오류와 데이터 디자인의 문제점, 그리고 통계적인 개리멘더링에 대해서다.
정보공개청구에는 통상적으로 10일 안에 답변을 주도록 되어있다. 하지만 10일이 되었는데도, 보사연은 내가 던진 질문이 어려웠는지 답변 연기가 결정됐다.
UNDP보고서에서는 한국이 성평등 10위권의 전세계적 선진국인데 WEF 성평등 순위는 100위 바깥의 아주 후진국이다. 둘 중에 차이가 커도 너무 크다. 우리나라의 성평등은 대체 어느 정도인가? 그리고 성평등이 출산율을 올릴 것이란 주장이 맞나? 그리고 WEF 보고서에서 우리나라 순위는 대체 왜 이렇게 낮은 것인가?
그동안 WEF 보고서를 여러차례 분석하면서 굵직한 결론을 하나 내릴 수 있었다.
우리나라 여성들이 생각하는 페미니즘은 서구권 여성의 페미니즘과 다르다는 사실이다.
WEF통계는 서구 여성들이 생각하는 성평등을 수치로 계산한 것이었다. 서구권 여성이 중요하게 생각한 것들을 조사했다. 조사 항목에 한국 여성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몇 개 없었다. 예를 들면 여성이 얼마나 배려받는지, 남성들로부터 보호받는지, 더치페이를 요구받지 않는지, 출산 후 산후조리원에 가는지 등이다. (WEF 통계에는 데이트 폭력도 나오는데 우리나라는 낮은 편이다) 이런 것들은 WEF에서 조사 대상으로 여기지 않았다.
WEF 통계에서는 여성이 돈을 벌어야만 성평등 순위가 상승한다. 여성 정치인 비율이 높고, 여자 사장 비율이 높아야 성평등 순위가 높아진다. 여자들이 높은 직급에 올라가야 성평등 순위가 상승하고 그들이 행복해질까?
내가 살면서 겪어본 한국 여성들은 그렇지 않았다. 출근하지 않고 육아에 전념하는 것을 행복으로 생각하는 이가 많았고, 직장에서 높은 직위에 오르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하지 않아도 되는 것을 행복으로 여기는 이들이 많았다. 하지만 WEF 통계는 여성이 육아보다 직장에 전념하고, 직장에서 고위직을 차지하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하는 것을 성평등으로 판단했다.
퇴직하고 육아에 전념하기 원하는 여성은 성평등의 적이었다. 오바일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WEF 통계상으로는 그랬다.
왜 이런 차이가 있는걸까?
나는 이 차이가 문화적, 인종적 차이에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요즘 세상에 인종적 차이를 들먹이면 인종차별로 직결되는 사회적 문제가 발생하며, 문화적 차이에 대해서는 연구가 이뤄질 수가 없기 때문에 나는 문화적 차이에만 집중하려고 노력했다.
동아시아 여성의 페미니즘은 왜 서구권 페미니즘과 다를까? 나는 유교 문화가 그 차이를 가져오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한국 여성들이 그렇게 증오하는 유교주의 문화가 사실은 한국여성들 마음 속 깊숙히 자리잡고 있을 것이라는 얘기다.
우리나라 여성들 특유의 성적 엄숙주의, 남녀 분리주의, 가부장적 국가 주도의 겸열 (박가분 작가의 글을 참고함) 은 서구 여성의 페미니즘에서는 발견하기 어려운 것이다. 서구에서는 브래지어 착용도 여성에 대한 규정과 검열이라며 차별로 구분짓는데, 우리나라에서 아나운서가 노브라로 방송에 나왔다가 젖꼭지 실루엣이 보이기라도 하면 여성평등을 외치던 이들이 오히려 앞장서서 비난에 나선다. 서구에서는 볼 수 없는 우리나라 특유의 모습이다.
서구에서는 보기 어려운 우리나라 페미니스트들만의 고유 분위기는 왜 유교 문화에서 기인한 것일까?
아니 그 전에, 한국 페미니즘만의 특성이 유교와 관련이 있기는 한 것이 맞나?
그렇다면 한국인을 구성하는 유교란 것은 무엇인가?
무엇이 한국인을, 넓게는 동아시아인들을 서구인들의 자유민주주의 사상과 구별짓는가?
나는 여기에 대한 한국인들의 연구가 의외로 너무나 빈약하다고 생각한다. 현대 한국인의 정신세계와 유교와의 관련성을 구체적인 분석 없이 추상적인 근거로 너무나 쉽게 결론내린다. 유교란 무엇인가? 어떤것이 유교적인 것인가? 우리의 어떤 것이 유교적이고 어떤 것은 유교적이지 않은가?
한국인 안의 유교를분석하고 비판한 책으로 가장 유명한것은 아마도 2000년 즈음 나온 '유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라는 책일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의 문제는 유교에 대한 정의가 너무 빈약하다는데 있다. 해당 책을 보면 한국인들의 다양한 모습을 유교적인 것으로 정의하고 고쳐야할 것으로 보는데, 20년이 지나서 보기에는 틀린 내용이 너무 많았다. 대표적인게 '외국어를 공부하지 않는다' '세계적이지 않다'는 것이었다. 한국인이 외국어를 못 하는것은 한국어가 영어와 너무 다르기 때문이고, 세계적이지 않은 것은 외국과의 교류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이것은 언어학적, 지정학적인 문제 때문이다. 이게 왜 유교 때문인가? 유교가 외국어 공부를 금지하고 세계화를 거부했나? 나는 저자가 바라본 유교의 문제는 유교의 문제가 아니고 저자가 바라본 기성세대의 문제를 유교적인 것으로 규정한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2024년 현재 세계의 주류 페미니즘은 자유민주주의에서 기원한 것이다. 대서양 문명에서 나온 것이고, 문명의 자유로운 토론에서 기인한 것이다. 현대 페미니즘은 일종의 철학이고 정치사상이기도 하다. 하지만 한국의 페미니즘은 철학이라기 보다는 종교에 가깝고 정치사상 관점에서 볼때에는 심지어 퇴행적이기까지 했다. (2017, 2018년도의 넷페미 운동이 2024년에 와서 어떤 취급을 받고 있는지 생각해보자)
나와 같이 한국의 넷페미 운동에 질린 사람들, 그리고 아직은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그들을 비판하고 싶은 이들이 페미니즘을 비판하고 싶다면 한국의 페미니즘이 서구의 페미니즘과 어떻게 다른지 분석할 필요가 있다. (서구의 페미니즘은 철학에 기반을 두고 있고 PC주의라는 주류 정치흐름을 낳았다)
나는 한국의 유교가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을 많이 했다. 그리고 힌트를 얻었다.
개인적으로 임명묵 작가를 좋아한다. 'K를 생각한다'로 스타덤에 오른 그는 깊은 사유를 바탕으로 질서정연한 논리를 전개한다. 그리고 그의 북콘서트에 찾아가서 직접 질문했다.
'한국의 종교적 기반은 유교가 맞다고 보는가? 그것은 성리학인가? 한국의 무엇이 유교적인지 무엇이 유교적이지 않은지를 알려면 어떻게 해야하나?'
그는 '오구라 기조'를 추천해주었고, 오구라기조가 저술한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라는 책에는 성리학에서 비롯된 한국인의 사고관을 읽을 수 있었고, 거기에는 놀랍게도 한국의 페미니즘에 대한 내용도 한 페이지 있었다. 그리고 나는 1998년에 쓰여진 이 내용이 2020년대 한국의 페미니즘에 대한 분석으로서도 유용하다고 생각한다.
서론에 해당하는 이 글을 오구라기조의 글로 마무리짓고자 한다.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오구라기조 지음)
韓国は 一個の哲学である
6장 리기의 경제, 정치, 역사. 206p.
여성을 기 진영의 존재로 폭력적으로 규정하고, 리 진영의 존재인 남자에게 지배되어야 한다고 하는 유교적 위계질서에 대해, 여성은 기 진영의 존재가 아니다, 여성도 '리'를 드러낼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한국의 페미니즘이다.
(중략) 중요한 것은 한국에서는 여성이 자신을 기 진영의 존재로 간주하고 그 욕망, 반유교적 성향을 선언하는 움직임이 그다지 표면화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자신이 욕망의 주체라고 말하는 여류 소설가나 여자 배우가 등장하여 화제가 되는 일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일시적인 시선을 끄는 것 이상을 벗어나지 못한다. 즉 도적적인 위계질서 자체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그 질서에서 하위자였던 여성을 상위자의 위치로 끌어올리는 것이야말로 한국에서의 페미니즘의 일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