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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텅 빈 방 1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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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하은 Jul 13. 2022

우연한 만남

- 베를린, 폴란드 일기 10

6월, 독일은 해가 늦게 진다. 해가 오전 4시 20분에 떠서 오후 9시 30분에 지기 때문에, 오후 5시가 가장 뜨겁고 덥다. 서머타임을 적용했다 하더라도 해가 길다. 그렇지만 박물관이나 미술관이 문을 닫는 시간은 변하지 않기 때문에, 일정을 짤 때 이걸 고려해야 한다.

화장실에 가려고 일부러 맥도날드에 들렀다. 한여름에 아이스크림을 사 먹은 적이 있기 때문에, 그 맛을 익히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화장실에 들렀다 온 뒤 아이스크림을 먹고 고개를 갸웃했다. 아이스크림 맛이 달랐다. 아이스크림 맛이 달랐다. 한국에서 먹은 맥도날드 아이스크림보다 유크림 함량이 더 높은 것 같았다.

아무튼, 아이스크림을 먹은 뒤 발길을 옮겼다.   

 

골목을 돌아, 목적지에 닿았다.

‘콜비츠 광장(Kollwitplatz)’은 ‘케테 콜비츠’를 기리기 위해 만든 곳이다. 광장을 둘러싼 넓은 공원에서 사람들이 자유롭게 오갔다. 병맥주를 마시면서 모임을 하는 사람들도 보였고, 뛰어노는 아이들을 지켜보는 어른들도 보였다. 평화로운 하루를 만끽하는 모습이었다.

광장 한쪽에 콜비츠 동상이 놓여 있다. 전쟁으로 자식을 잃고, 전쟁을 반대하는 작업을 계속 했던 케테 콜비츠의 작품은 힘이 넘치면서도 가슴을 후벼파는 아픔이 있다. 동시에 전쟁으로 가족을 잃은 아이들을 돌보는 어른의 모습을 작품으로 남겼다.

‘콜비츠 광장’에 놓인 콜비츠 동상에는 스프레이로 낙서한 흔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좋았다. 콜비츠를 기리는 광장에서 가족과 친구들과 함께 모여 이야기하고, 일상에서 콜비츠가 줄곧 표현했던 ‘평화’를 누리고 있었다. 

맥주를 마시면서 모임을 하던 사람들이 광장으로 나왔다. 그들은 커다란 필름 카메라를 들고 있었는데, 단체 사진을 찍으려고 했다. 그런데 광장에서 아이들을 지켜보던 나이 지긋한 분께 부탁하자, 이분들이 카메라를 보자마자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들은 고민하다가 우리와 눈길이 마주쳤다. 그때 우리는 디지털 카메라로 동상 주변을 찍고 있었다. 외국인인 우리에게 카메라를 맡겨도 될지 살짝 고민하는 것 같아서 찍어드릴까 물었더니, 카메라를 건네면서 그 사람이 말했다.

“This is original camera.”

그게 무슨 말인지 헷갈렸다. 그런데 카메라를 받아든 반려가 고개를 끄덕였다.

“와, 진짜 좋은 카메라네.”

그러고는 서툰 독일어로(고등학교 때 독일어를 제2외국어로 배웠다 함) 하나, 둘, 셋을 외쳤다. 그들이 웃었으니, 결과적으로 자연스러운 표정으로 사진이 찍혔다.

필름 카메라인데다 묵직한 바디가 인상적이었다. 일행들이 자리를 잡고, 셔터를 눌렀다. 치르르르륵, 필름이 돌아가는 소리가 음악처럼 들렸다. 맞아, 필름 카메라를 돌리면 저런 소리가 나는 기종도 있었지. 

아빠가 내게 처음 사진 카메라는 필름 카메라였다. 빨간 케이스가 있던 그 카메라로 꽤 많은 사진을 찍었다. 필름으로 사진을 찍고, 인화하면서 앨범에 채워넣기도 했다. 그때 받은 첫 카메라는 사라졌지만 아버지가 내게 카메라를 사 주면서 하셨던 말은 기억한다.

“많이 찍어봐. 그래야 는다.”

글도 마찬가지다. 많이 쓰고, 많이 고치고, 다른 사람이 쓴 글도 읽어야 는다.

카메라를 건네자 그들이 웃었다. 디지털 카메라와 달리, 필름 카메라는 인화해야 찍힌 사진을 확인할 수 있다. 반려가 찍은 단체 사진이 좋은 추억으로 남길 바란다.  

   

알렉산더 광장을 지나 ‘Marx-Engels-Forum’에 다다랐다. 공산당 선언의 기초자이자 공산주의 운동의 창시자인 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를 기리기 위해 만든 흉상이 있다. 마르크스는 앉아 있고, 엥겔스는 서 있으며, 두 동상들 뒤로 독일 사회주의에 대한 부조가 새겨져 있다. 이 포룸은 동독 시절에 만들어졌다.

우리가 찾아갔을 때, ‘마르크스 엥겔스 포룸’은 공사 중이었다. 철책이 사방으로 둘러졌고, 안을 볼 수 있었다.

“진짜 보고 싶었는데.”

반려가 중얼거렸다.

우리는 바로 그 앞에 있는 긴 의자에 발을 올리고 앉았다. 고된 일정과 돌바닥 때문에 발이 화끈거렸다. 유럽에서 사람들이 걷는 길은 오래 전에 쓰던 돌길을 그대로 쓰는 경우가 많다. 네모 반듯하지만 울퉁불퉁 튀어나온 돌을 밟으며 전진하면, 계속 지압돌 위를 걷는 듯하다. 지압돌을 밟는 동안 발바닥은 화끈거렸고, 물집이 잡혔다.

족저근막염을 앓았던 나는 운동화를 여벌로 가져가서 스니커스와 번갈아 신었는데, 반려는 스니커즈 한 벌로 버텼다.

양말 바람으로 앉아서 철책에 둘러싸인 ‘마르크스 엥겔스 포룸’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디에서 왔어요?”

원피스를 입은 독일 여자가 영어로 물었다.

“한국에서 왔어요, 남쪽. 서울에서 가까운 도시에서요.”

외국에서는 대부분 한국과 서울을 등가처럼 생각하기 때문에, 내가 살고 있는 다른 도시를 말하면 잘 못 알아듣는다. 그래서 내가 살고 있는 ‘일산’이 아니라 ‘서울과 가깝다’는 표현을 한다.

“아, 여기 포룸을 봤나요?”

“네, 공사 중이던데요.”

“저는 공사를 하더라도 더 보강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두 사람의 업적과 활동을 더 알려야죠. 철학자로서, 경제학자로서, 두 사람이 역사에 끼친 영향을 본다면요. 늘 이곳을 볼 때마다 너무 대강 설명해서 안타까웠거든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 분은 환하게 웃었다.

“독일은 통일이 되기 전에 서로 많이 달랐어요. 통일이 되기 전에 여러 노력들이 있었죠. 당신들도 그렇죠?”

여행을 다닐 때 ‘Korea’라고 하면, 남쪽이냐 북쪽이냐고 묻는 사람들을 만날 때가 있다. 그들 중 어떤 사람은 ‘마르크스 엥겔스 포룸’ 앞에서 만난 이분처럼 북한에서 온 사람과 만났다.

“나는 북한에서 온 사람과 친했어요. 그와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죠. 그가 나와 나눴던 깊은 우정을 아직 기억해요. 오늘 당신들을 보니, 마치 그때 그 사람을 본 것 같아서 말을 걸었어요. 당신들 나라에도 우리처럼 통일이 이루어지길 바랍니다.”

뭉클했다. 이런 말을 직접 들어본 건 처음이었다. 감사하다는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다. 그런데 가방에는 온통 우리가 쓸 물건들뿐이었다. 다행히 가방에 색동끈이 달려 있었다.

이 색동끈은 지난 봄에 제주도에서 샀다. 색동끈과 보자기 등을 만들어서 팔던 공방에 들렀다가 여러 개를 샀고, 그 중 하나를 가방 손잡이에 달아두었다. 나는 그 끈이 썩 마음에 들었고, 내 가방을 빛나게 했다. 

베를린에서 노상 식당에 앉아 케밥을 먹을 때 지나가던 연인이 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둘이서 말을 나누었다. 나는 웃으며 왜 그러냐고 물었고, 그때 두 사람은 가방이 멋지다고 했다. 남대문 시장에서 산 가방 때문인지, 아니면 가방에 단 색동끈 때문인지 더 묻지 않았지만 내 가방을 빛내준 물건이었고 다른 곳에서는 사기 힘든 물건이었다.     

이 색동끈은 손잡이에 고정하려고 실로 꿰맨 상태였다. 나는 실로 꿰맨 부분을 뜯었다. 청지로 된 손잡이에 섬유가 손상되었다. 그래도 괜찮았다. 이렇게 깊은 마음을 나눈 사람에게 마음을 드리기 위해서니까.     

“당신에게 이걸 드리고 싶어요.”

“오! 정말 멋져요. 제가 받아도 될까요?”

“오늘 이야기 잘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친구에겐 이런 선물을 드려야죠. 이건 색동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제가 당신 가방에 이걸 묶어 드릴 거예요. ‘댕기’라고, 한국에서 오래 전부터 하던 머리장식 모양입니다.”

그리고 그분 가방에 내 색동끈을 댕기 모양으로 묶었다. 그러고는 그분은 우리에게 여행을 잘 마무리하라고 했고, 우리는 그분께 더 건강하시라고 했다. 사진을 찍어도 되냐고 물었을 때, 그분은 환하게 웃으며 그러라고 하셨다.

“나중에, 공사가 끝난 다음에 다시 이곳에 들러요. 오케이?”

“그랬으면 좋겠네요.”

만약 다음에 들를 수 있다면, 그때는 우리에게 말을 건네던 이분을 떠올릴 것이다. 북한 사람과 친구였고, 한국의 통일을 바라고, 여행자에게 따뜻한 말을 건네던 독일인.

“안녕!”

이름을 물어보지 못했다. 그래도 그 웃음과 따뜻한 말은 늘 기억하고 싶다.  

 


발은 아팠지만, 충만한 마음으로 걸어서 ‘TV 타워’ 근처까지 왔다. 동독에서 자신들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 세웠다는, 높은 건물이다. 베를린의 상징이다. 뾰족한 탑 끝에 동그란 구가 꽂힌 모양새가 마치 과일 꼬챙이처럼 보인다.

타워까지 올라가진 않았고, 그 근처에 있는 ‘성 마리엔 교회(St.Mary’s Church)’ 앞에 섰다. ‘마틴 루터’가 정기적으로 설교했던 이 교회에서 종교개혁이 시작되었다.

붉은 지붕과 벽돌이 인상적인 교회 앞에서 우리는 함께 있는 사진을 찍고 싶었다. 카메라를 믿고 맡길 사람을 찾는 게 우선이었다.

사진을 찍고 있던 젊은이들에게 카메라를 넘기면서 사진을 찍어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가끔 들고 튀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유럽 여행에서는 진짜 조심해서 상대방을 골라야 한다. 우리는 사진을 찍고 있는 사람이거나 고프로를 들고 촬영하는 사람들을 골라 몇 번 부탁했다.)

둘이 사진을 찍으려는데, 갑자기 우리 옆에 다른 사람이 섰다. 사진을 찍어주는 사람과 일행인 이 사람은 마치 우리와 같은 일행인 것처럼 자연스럽게 포즈를 취했다.

웃음이 터졌다.

그들 일행도 배를 잡고 웃었다.

덕분에 가장 유쾌한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우연히 누군가를 만나 통일을 이야기했고, 또 누군가 우리 사진에 끼어들었다. 이런 인연이 삶에서 계속 즐거운 충돌을 일으켜서 지치지 않게 한다.

나는 훈련소에 가 있는 둘째에게도 그런 즐거운 만남과 소소하고 기쁜 충돌이 있기를 바랐다.

‘잘 있지?’

그애 또래인, 우리 사진에 끼어든 청년에게 고맙다고 인사했다. 그 사람은 모를 것이다. 우리가 어떤 마음으로 고맙다고 하는지. 

다양하고 좋은 풍경을 보고, 낯선 것을 마주할 때마다 우리는 아이들과 다녔던 예전 여행을 떠올렸다. 다시 아이들과 같이 걸을 일은 오지 않겠지. 무모했고, 다들 어떻게 다녔느냐고 할 정도로 힘들었지만, 그때였으니까 가능했을 여행이었다. 

첫째가 가끔 뮌헨에서 먹은 슈바인학센과 학센 옆에 놓였던 폭신한 감자, 그 음식점에서 갑자기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던 옆 테이블 사람들과 그들을 축하하며 다 같이 노래 부르던 다른 테이블 사람들 이야기를 할 때가 있다. 그러면 우리도 그 때로 돌아간다.

가족이, 사랑하는 사람이 함께 나눈 추억들이 가득찬 집에서 둘째가 떠났고, 우리도 떠났다. 이제 텅 빈 방은 첫째가 오롯이 느끼고 있을 터였다.

아이들이 보고 싶었다.


베를린 돔 밖으로 해가 지기 시작했다. 저녁 9시 무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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