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혼 일지
선우정아의 도망가자란 노래를 즐겨 들었다.
정신 차리고 보니 나는 말 그대로 로드무비 주인공처럼 도망가고 있었다. 그것도 을왕리 앞바다로.
"방배경찰서 OOO경감입니다, 실종신고가 접수되어 전화했습니다."
"아이는 엄마인 저와 있습니다. 어제 날짜로 이혼 소장 접수 후 별거를 위해 이사하는 것입니다."
시어머니에 빌라 경비아저씨까지 내 전화통이 쉴 새 없이 울려댔다.
그만 좀 전화하라고. 내가 전화할 거라고. 기다리라고....!
그날 아침은 하나님은 내 편이었던 게 분명하다. 10년의 결혼생활 속에서도 그의 일정을 담은 다이어리를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는데 친절하게 소파에까지 펴놓고 잠을 자다니.
게다가 남들처럼 일정한 직장이 있어 출근하는 사람도 아니고, 시부한테 빨대 꽂고 기생충같이 사는 그였으니 집과 암수한몸 자웅동체같이 살던 그에게 재택의 삶은 코로나로 인해 생겨난 새로운 문화도 아닌 늘 익숙한 그의 상태였기에 나의 도망은 더욱 불안할 수밖에 없었으니까. 내 도망의 계획이 탄로 나면 말 그대로 난 끝이니까.
장손 남발하는 뼈대(?) 있는 김 씨네 집안인지라 아이 양육권은 절대로 내게 양보 안 할 그와 시댁이었기에 어쩔 수 없었던 선택이었고, 최종적으로 이렇게까지 할 수밖에 없어 내린 결단은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위로한다.
아이를 등교시키고 외국인 학교 특성상 결석이라도 하면 부모 모두에게 바로 메일이 가니 30분 뒤 병원을 데려간다는 핑계로 다시 아이를 빼.돌.렸.다. (이런 표현은 쓰고 싶지 않지만.....)
아이를 봐주기로 한 언니네에 아이를 데려다 놓고 영문도 모르고 해맑게 웃는 아이를 뒤로하고 나의 조력자들과 함께 마지막 국밥을 말아먹고 짐을 싸기 시작했다. 학부모로 만나 내 아픔에 대해 같이 울어주고 기꺼이 도와준 나의 J언니 그리고 Y. 손이 떨려 아무것도 못하는 나 대신 모든 짐을 다 싸준 고마운 사람들.
미안하고 고맙다 친구들아. 덕분에 남편 빤스 한 장도 같이 딸려 왔더라......
임시로 마련한 오피스텔에 친정 아빠께 짐을 받아달라 부탁하고, 나는 잠시 며칠간 을왕리로 피신해 있기로 했다. 고성이 오가며 아이를 데려가겠다고 못 볼 꼴 볼 게 뻔한 진흙탕의 서막이 될 게 뻔하니까.
을왕리에 리조트를 운영하는 아이 친구 엄마가 고맙게도 숙박권을 주며 마음 다독이라며 상황이 진정될 때까지 피해 있으라 해줬다.
그래도 나 죽지 말라고 천사들을 하나둘씩 내게 보내주는구나. 위로하던 지난날들이었다.
을왕리에 도착해 내가 떠난 뒤 5분 뒤에 집에 도착해, 마주치지 않아 다행이었던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와 나의 마지막 통화는 앞으로 법정에서 만납시다였다. 시어머니에게도 전화했다. 어디냐고 얘기 좀 하자고, 이젠 늦었으니 전 끊겠다고 그렇게 그날 하루는 저물었다.
마냥 해맑던 아이에게 나는 어떻게 이 상황을 설명해야 할까.....
아이가 태어나고 줄곧 이어져 오던 부부의 불화를 아이도 모르지는 않지만 작디작은 이 어린 가슴에 내가 뭔 짓을 한 거냐 자책도 해보고 나에게 가장 어려운 숙제만을 남긴 채 그날 밤은 쉽게 잠자리에 들 수가 없었다.
와인을 마셨고, 그래도 잠은 오지 않았다.
바다가 너무 보고 싶었고 그날 밤 아이를 재우고 창밖으로 원 없이 밤바다는 바라볼 수 있었다.
숨이 안 쉬어지게 고통스럽고 먹먹한 내 결혼생활은 이렇게 마침표를 찍었다.
지옥같이 숨 막히던 싸늘한 그 집을 나오던 그 순간만큼 나는 홀로 철없이 축배를 들었다.
물론, 끝날 때까지 끝나는 게 아닌. 여전히 나는 이혼하는 중입니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