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혼일지
이제는 남보다도 못한, 옆집 박 씨보다도 못한 존재가 되어버린 당신과 나에 대해 생각해 봤다.
호기롭게 타국땅에서 내 삶을 찾아보겠다고 떠난 지 2년 만에 객지 생활하며 얻어온 오만가지 병들, 맹장 터져 눈으로 대상포진이 와 게다가 5년 동안 짝사랑하다 극적으로 사귀게 되어 '너와 결혼까지 생각했을 법'한 전 남자친구와도 이별, 모든 아픔 뒤로한 스물아홉의 어떤 날 어쩌다 그를 만났다.
비쩍 마른 게다가 허세도 심해 보이는, 결단코 호감이 생기지 않던 그 남자.
나는 29살에 이제 어떻게 내 삶을 자리 잡아야 하나 고민만 컸고, 그 남자는 나에게 꽤 공을 들였고 뭔가 자신감에 꽉 차보였다.
항상 집 앞에 와서 기다리고, 적극적이던 찰나 빨간 재킷을 입고 새로운 머리 스타일을 하고 유독 도드라지는 갈색 눈과 마주쳤던 어느 날, 그때부터 이 사람과 결혼을 하게 될 것 같다는 생각이 깊어졌다.
아무것도 몰랐던 참 어린 나이였다. 결혼에 대한 의미나 맺을 結(결) 그것에 대한 진정한 의미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던..... 진정 철부지의 나날들. 불안했던 전조증상도 불구덩이로 자폭하며 들어가는 불나방처럼 나는 그렇게 지옥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고 회상해 본다.
나는 그때 너무나 자존감이 낮았었다. 그에 반해 그는 호기로워 보였고, 상처 하나 없는 단단한 사람이라 믿었다. 세상이 나에게 돌을 던진다 해도 이 사람만큼은 나 대신 돌이라도 맞아줄 것 같은 환상은 그야말로 환상이었다. 제일 먼저 선봉대에 서서 나에게 돌을 던질 사람일 수 있는 말 그대로 남의 편이 된 것은 결혼 후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으니까.
친정오빠조차 어떻게 너네한테 애가 생겼냐 할 정도로 우린 신혼도 없었고, 서로를 할퀴는 말뿐 아니라 물건을 부수는 날들도 많았던 모든 게 혼란스러운 순간들의 연속이었다.
결혼은 환상이 아니라 현실이었음을. 그 사람의 장점이 언젠가는 내게 목을 옥좨오는 순간이 될 수도 있었음을 나는 그때 정말 몰랐다.
그가 좋아하기에 예비 시부모님댁에 주마다 찾아갔고, 따스해 보이는 그 가정, 대화가 많아 보이는 그 가정이 알고 보면 내가 등에 짊어져야 할 십자가였음을 29살 그땐 정말 나는 아무것도 몰랐다. 애 낳는 것도 웃으면서 낳았다 할 정도로 미련하게 참는 걸 지독하게 잘하는 나는 그렇게 참고 또 참아가며 병들어가기 시작했다.
신혼여행 때부터 몸싸움은 기본이었고 그러면서도 완벽히 봉합되지 못한 채 생채기가 나고 또 터지고 근본적으로 우린 너무나 미성숙한 어른이들이었기에 만나면 안 되는 사람들끼리 만나 부모라는 이름도 얻었고, 결국은 단 한 번도 내 인생에서 상상해보지 못한 사건의 지평선상에 있다.
멈출 수 있을 때 그렇게 했어야 했다는 걸 이제와 후회하면 뭘 할까. 어쩔 수 없는 시간이었는 걸.
결국, 나는 나조차도 완벽히 홀로 설 수 없을 때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은 마음을 품었던 게 독이라는 걸 깨닫는다. 그 뼈아픈 진실을 결혼하고 한참을 지나 미련하게 깨달았다.
내가 온전히 나 스스로 자립하고 우뚝 설 수 있었을 때 누군가와 맺어져야 했음을. 그게 진정 결혼의 완성이어야 함을 반성하고 또 반성했다. 여전히 반성중이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로 살다가 결국은 그마저도 지독하고 미련하게 참아오다가 이건 아니다란 자각이 생겼을 때가 10년 차였다.
나에게 미안했고, 엄마로 불행하게 사는 모습을 보는 아이에게 더더욱 못할 짓 같았다.
불안했던 순간순간마다 내 새끼는 얼마나 더 힘들었을까.
아이 때문에 참아야지 내가 문제일까 우리는 뭘까, 결국 외딴섬에서 각자 따로 10년의 삶을 살던 우리였다는 것을 깨닫고 늘 51:49의 심정에서 그 나머지 2%가 이혼을 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채워졌을 때 나는 뒤를 돌아보면 안 된다는 결론을 내렸다.
우리는 한 번도 둘이 하나가 된 적이 없었음을. 그리고 서로에게 아무런 기대조차 없었음을.
너무 늦게 알아버렸다.
후회하기엔 너무 늦은 찬란한 내 30대가 고스란히 붕괴하는 순간이었다.
우린 도대체 뭐였을까? 가족이었을까?
아이는 낳았지만 왜 나는 미혼모의 심정으로 늘 외로웠을까.
결국 도돌이표 자책의 연속이다. 오늘도. 아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