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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dle May 02. 2024

다음 도시는 어디가 좋을까

 우리가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살겠다 했을 때. 멋지네, 재밌겠네,라고 호응하던 엄마는 그 일이 현실로 다가오자 걱정을 하기 시작했다. 이사하는 일이 보통이 아닌데, 몸도 힘들지만 돈도 많이 들잖아, 빨리 어딘가 정착을 하면 좋겠어,라고. 엄마는 늘 걱정을 품고 산다. 저녁 8시쯤 전화해서는 내가 밖이라고 답하면, 위험하니까 얼른 들어가라고 하는 분이다. 걱정은 많아도 내가 하는 일에 반대는 않으신다. 나는 늘 스스로 결정하며 살아왔다.   


 이사에 돈이 많이 들기는 한다. 들고 날 집의 부동산 복비. 이사비. 전세 보증 보험. 입주청소. 사는 곳만 옮길 뿐인데 버릴 건 왜 그리 많은지. 필요가 없어서 그 많은 걸 버렸는데, 살건 또 왜 그리 많은지. 엄마의 말이 틀린 건 하나도 없다. 그래도!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회사도 그만두었는데. 살아보고 싶은 곳에서 사는 ‘경험’을 위해 이 정도는 투자할만하다.


 은퇴한 지 이제 4년 차. 세상 사는 일이 어디 계획대로만 되겠는가. 중동과 러시아에서 전쟁이 일어나고, 인플레이션이 이리 심하게 올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덕분에 원래 생각했던 생활비 보다 쓰는 돈이 살짝살짝 흘러넘치고 있다. 우리는 구태여 계획에 짜 맞추려 애쓰지 않는다. 계획대로 산다면 지금 부산에 있지도 않을 것이다. 다행히 곳간이 비면 채울 일도 생겨서. 대체로 생각했던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나이대별로 달성해야 하는 퀘스트 같은 것이 있다. 그걸 하나씩 달성하며 살다 보니,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은 무엇인지. 어떤 일을 해야 행복한지 몰랐다. 호기심이 일어도 도전해 볼 용기조차 가지지 못했다. 지금 나는 하고자 하는 것이 생겼을 때 머뭇거리지 않는다. 우리가 가진 것에 비해 과한 욕심만 아니라면 말이다. 그것이 회사를 그만두면서 생각했던 ‘방향’이다.


우리 동네 빵집 무슈뱅상. 전기 밭솥으로 만든 빵.


 나의 아침 식사는 주로 샐러드와 빵이다. 무조건 싼 거 싼 거를 외치다 보니 마트나 프랜차이즈 빵집의 가장 저렴한 빵을 샀었는데. 지금은 달라졌다. 이왕 먹을 거 맛있는 걸 먹어야겠다. 우리 집에서 조금만 걸으면 맛있는 동네 빵집들이 수두룩 하다. 동네 빵집은 매일 영업하지 않는다. 금토일 3일만 영업하는 곳도 있다. 대량으로 빵을 만들지도 않아서, 오후 늦게 가면 솔드아웃 되는 경우도 허다하다. 원하는 빵을 사기 위해 나는 아침 산책을 한다. 동네 빵집 탐방은 구경하는 재미도 꽤 쏠쏠하다. 이 빵집들이 위치하는 곳은 대체로 주택가 골목이다. 주인의 취향이 돋보이는 주택들. 담벼락에 심어진 꽃들. 오래된 가정집을 리모델링한 아기자기한 가게들을 구경하며 걷다 보면 어느새 목표로 했던 빵집에 이른다.


 부산의 음식은 싸고 맛있다. 빵집 역시도 그렇다! 수도권의 유명하다는 빵집에서 7,000원은 줘야 할 빵을 4,000원이면 살 수 있다. 이렇게 맛있는 빵집이 하나도 아니고 여러 군데에 있다 보니 아침 식사가 훨씬 더 풍성해졌다. 굳이 맛을 포기하면서 까지 싼 거 싼 거를 외칠 필요가 없어진 이유다.


 전기밥솥으로 빵을 만든다는 브런치 글을 읽고 얼마 전 도전해 보았다. 핫케익 가루를 사서 오트밀과 견과류를 넣고 나만의 찜 기능으로 40분을 돌리니 카스텔라 비슷한 빵이 만들어졌다. 생각보다 그럴듯했다. 식감도 부드럽다. 가끔 만들어 먹어도 좋을 것 같다. 그는 사 먹는 게 더 맛있다고 한마디 하겠지만. 그래도 내가 원한다면 하게 내버려 둘 것이다. 어설픈 빵을 만드는 것도 ‘경험’이고. 그로 인해 즐거움을 느낀다면 그걸로 충분하니까. 그는 그걸 누구보다도 잘 아는 사람이다.


남천동의 오래된 나무들. 한참 정비 중인 광안리 해수욕장

 

 부산에서의 삶은 생각보다 더 만족스럽다. 서울 못지않게 잘 갖추어진 도시 인프라가 있는데, 사람은 그보다 적어 쾌적하다. 조금만 벗어나면 아름다운 자연도 있다. 물가도 저렴하다. 가장 마음에 드는 건 수도권처럼 어딜 가도 프랜차이즈 일색의 도시가 아니라 동네마다 특색이 있다는 거다. 노포부터 힙한 분위기의 가게까지 다양하다. 특히 오랜 흔적이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이 흥미롭다. 도시 골목길 중앙에 떡하니 400년 된 당산목이 서있으니 말이다. 타고나길 아름답다 해도 그를 유지하는 데는 노력이 필요하다. 오래된 나무를 보호하고, 풍성하게 키워내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것처럼. 해변의 모래를 새로 채워 넣는 것처럼. 삶도 그렇게 가꾸어 나가야 한다. 겉을 꾸미는 것이 아니라 속을 채워 넣는 일에는 큰돈이 들지도 않는다. 가꾸는 일을 귀찮아하지 않고 기꺼이, 즐겁게 하기만 하면 된다. 나는 그렇게 기품 있는 할머니로 늙어가고 싶다.


 얼마 전 친구들이 놀러 왔을 때 함께 타로카드를 본 적이 있다. 나는 딱 하나의 질문만 했다. 다음 거주지는 어디가 좋을까요? 그리고 4장의 카드를 골랐다. 안락한 둥지에 자리 잡고 있는 새가 그려진 카드가 나왔다. 부산에 좀 더 있게 될 것 같단다. 고민할 시간은 아직 많이 남아 있다. 때가 되면 그때 결정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마음이 동하는 곳이 없다면 이대로 쭉 부산에 살아도 좋을 것 같다. 꼭 계획대로 살 필요는 없으니까. 중요한 건 ‘방향’이다.




 ‘지금은 부산에서 살아요’ 연재 브런치북의 마지막 글입니다. 그동안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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