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기를 시작한 지 어느덧 4년. 꾸준히 달리기를 해왔지만 마라톤에 딱히 관심은 없었다. 순위를 매긴다는 것도, 기록을 세우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경쟁을 피해 회사도 그만뒀는데, 승부를 가리기 위한 대회에 나간다는 건 어불성설이었다. 그런 우리의 생각이 지금은 달라졌다. 비엔나 시티 마라톤을 구경한 이후부터다.
비엔나 시티 마라톤은 1984년부터 오스트리아 빈에서 개최된 마라톤 대회다. 42,195km 풀코스와 하프코스 그리고 달리기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도 참여할만한 5km 코스도 있다. 대회가 열리는 날 우리는 별생각 없이 호프부르크 왕궁을 향해 가다가, 링슈트라세를 따라 서 있는 사람들을 보고서야 마라톤 대회 날임을 깨달았다. 거리는 온통 축제 분위기였다.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을 응원하고, 하이파이브를 하고. 결승점에서는 오직 참가자들을 위한 작은 파티도 벌어졌다. 인터뷰도 진행되었는데, 국적이 다양해서 신기했던 기억이 난다. 그날 빈에서는 하루종일 같은 옷을 입고, 메달을 걸고 환한 표정으로 시내를 돌아다니는 참가자들을 보았다. 그건 간절히 원하던 장난감을 얻게 된 아이의 뿌듯한 표정 같았다.
그래도 일부러 찾아서 마라톤 대회에 나가봐야지 하는 생각은 없었다. 어쩌다. 우연히. 계기가 된다면 한번 참석해 볼까 정도? 어느 아침 친구가 톡으로 링크 하나를 보냈다. 기브엔 레이스 마라톤. 장소는 부산, 그것도 바로 우리 집 앞. 벡스코에서 시작해서 광안대교 위를 달려 광안리 해수욕장에서 끝나는 마라톤이었다. 언젠가 광안대교 위를 달리는 사람들을 보며 부러워했는데, 드디어 나에게도 기회가 온 것이다. 참가 신청을 하고 링크를 보낸 친구에게 물었다. 4월쯤 부산 놀러 온다며. 같이 달리자. 그렇게 급 친구의 여행 날짜까지 정해져 버렸다.
그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동안 나는 통 뛰지를 못했다. 주 5일 수영을 하느라 달리기를 잊었다. 오랜만에 달리는데 과연 괜찮을까, 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4년간 나는 평균 5km를 6분 정도의 속도로 달렸다. 최장 달리기 기록은 7km. 이번에 나는 8km를 뛰어야 한다. 대회 일주일 전에야 나는 마라톤 연습을 했다. 주 5일 수영을 끝내고, 토요일은 7km, 일요일은 8km를 뛰었다. 오랜만에 달렸더니 기록이 예전 같지 않았다. 그래도 8km를 뛰는데, 죽을 만큼 힘들지는 않았다. 적어도 완주는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대회를 앞두고 친구들이 내려왔다. 우리는 멀리 다니기보다는,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걸으면서도, 밥을 먹으면서도, 자기 전에도. 이야기는 끊이지 않았다. 관광이라면 동네 벚꽃 구경을 하고 온천을 한 게 전부다. 소금빵으로 유명한 빵집에 줄을 서서 빵을 사고, 향긋한 커피를 테이크아웃해서 공원에 앉아 나누어 먹었다. 더없이 좋았다. 그동안 눈여겨봐 왔던 동네 숙성횟집에도 갔다. 대기를 걸어 놓고 무려 219분을 기다린 끝에 입장할 수 있었다. 반들반들 윤이 나고 두꺼운 회를 보니 오래 기다린 보람이 있었다. 이 좋은 안주를 앞에 두고, 청하 한두 잔으로 그날을 마무리했다. 다음날 마라톤이 있기 때문이었다. 힘들면 그냥 걸으면 되지,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대회 당일 3km를 신청한 친구들은 광안리 해수욕장에서 코스를 시작했다. 나 홀로 벡스코까지 가야 했다. 혼자 놀기, 혼자 달리기. 이런 건 익숙하다. 군중 속에서 혼자 있는 기분을 느끼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았다. 벡스코로 가는 길, 파란색 티셔츠를 입은 사람들을 여럿 보았다. 나와 같은 곳을 향하는 이들이었다. 괜히 친밀감이 들었다. 도착 후 그들은 각자의 무리로 섞여 들었다. 동호회 깃발이 나부끼고. 모여서 기념 촬영을 하고. 으쌰으쌰 하는 사람들 가운데 혼자 있으려니 머쓱하고 외로웠다. 폰을 꺼내 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이제 곧 달릴 거야. 그는 기록에 욕심내지 말고 천천히 달리라고 당부했다. 나 기록에 욕심내고 그런 사람 아닌데.
달리기는 그룹을 나눠서 출발했다. 내가 속한 그룹의 출발 순서가 되자, 다 같이 손을 머리 위로 올리고 손가락으로 숫자를 세었다. 5,4,3,2,1 출발! 초반에는 다 함께 달렸으나, 광안대교 위로 올라가자 걷는 사람들이 하나 둘 늘었다. 언제 광안대교 위를 걸어보겠는가. 다들 인증사진을 찍느라 분주했다. 그 와중에 나는 사람들을 요리조리 피해 가며 오직 달리는데만 집중했다.
황령산에 만발한 벚꽃. 광안대교에 가리지 않은 수평선. 그 위를 떠다니는 배들. 나는 이런 것들을 곁눈질로 훑으며 그냥 지나쳤다. 흔적은 남겨야겠다 싶어 누가 봐도 광안대교 위를 달리는구나 싶은 사진 한두 장을 찍은 후 서둘러 폰을 집어넣었다. 다시 달리기에 열중했다. 수없는 사람들을 앞질렀다. 달리기 앱을 켜둔 워치를 보니 평소보다 빠른 속도였다. 이상하게 하나도 힘이 들지 않았다.
결승점으로 향하는 길. 이미 도착한 사람들이 아직 달리는 이들을 응원했다.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과 하이파이브를 하고, 열렬한 박수도 받으며 결승점에 도착했다. 거친 숨을 내쉬며 달리기 앱을 확인했다. 연습 마라톤 보다 빠른 기록이었다. 숨을 돌리고 나서 부스로 가 준비된 간식과 메달을 받았다. 나무로 만들어진 메달을 손에 들고 인증 사진을 찍으며 생각했다. 그래, 이걸 받고 싶어 그렇게 달렸구나.
먼저 도착한 친구들과 만나 얼마 전 미슐랭 셀렉티드로 선정되었다는 식당에 갔다. 작은 식당 안은 파란색 티셔츠를 입은 사람들로 가득 찼다. 식당 문 밖에 서서 기다리는 사람들 역시 같은 옷을 입고 있었다. 밥을 먹고 나간 광안리 해수욕장 역시 파란 옷의 물결로 가득했다. 축제가 벌어진 것 같았다. 가수들이 공연을 하고, 사람들은 기록을 인증하는 사진을 찍었다. 사람들의 표정이 너무나 행복해 보였다. 땀 흘려 성취한 메달을 손에 들고 만족하는, 아주 순수한 감정이었다.
다시 차가 달리는 광안대교를 바라보니 아쉬움이 남았다. 좀 더 찬찬히 돌아볼걸. 기록이 중요하지 않다고 해놓고, 나는 뭐가 그리 급해서 앞으로 달리기만 했을까. 사실 나는 늘 그랬던 것도 같다. 그런 나를 붙잡아 주변을 좀 천천히 돌아보라고 말해준 사람이 그다. 서둘러 목적을 달성하기보다는 즐기면서 천천히 가는 것의 즐거움을 알게 해 준 사람. 그가 없으면, 여전히 나는 급히 달리는 사람이 되어 버린다. 그가 기록에 욕심내지 말라고 당부한 이유가 있었다. 다음에는 그와 함께 천천히 광안대교 위를 걸어 보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