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전포에 있는 작은 서점에서 열린 정지우 작가의 북토크에 갔었다. 서점에서 열리는 북토크에 가본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동안 가보고 싶은 북토크가 없었던 건 아니다. 하지만 내가 살았던 경기도 남부에서 북토크에 참석하는 건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순식간에 마감이 되어버리거나 혹은 너무 멀었기 때문이다. 부산에서 웬만한 곳은 삼십 분에서 한 시간 정도면 갈 수 있으니, 그 위치가 부산이기만 하면 괜찮았다. 또 마감이 될세라 난 서둘러 참가비를 송금했다.
글쓰기에 대한 생각을 주고받는 북토크의 내용도 의미가 있었지만, 책을 좋아하고 글을 쓰는 사람들이 모인 그 자리의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그 서점에서는 종종 북토크가 열리고, 책 읽기 모임도 하는 것 같았다. 회사를 그만두고는 새로운 사람들을 만날 기회가 많지 않았다. 같은 관심사를 가진 사람들과 만나면 어떨까 궁금증이 생겨 서점 인스타를 팔로우했다. 요즘은 인스타를 해야만 전하는 소식을 접할 수 있으니까.
그 서점에는 무슨 일이 있나 몰래 엿보고만 있을 때, 2024 젊은 작가상 동네서점 에디션이 입고되었다는 글을 보게 되었다. 나는 몇 년 전부터 젊은 작가상 수상집이 나오면 사서 보고 있었다. 대형서점에서 구매하는 젊은 작가상 수상집 커버는 누가 봐도 문학상 수상집처럼 생겼다. 동네서점 에디션 커버는 그와 달랐다. 저걸 가져야겠다! 책 커버가 이쁘면 읽는 기쁨과 책꽂이에 꽂아두는 기쁨도 더 크니까. 그러나 저 책 하나 사자고 전포동까지 가는 건 귀찮았다. 온라인으로 살 수도 있지만, 그건 책을 사는 맛이 안 난다. 서점에 가서 이것저것 뒤적거리다가 우연히 발견한 책 한 권을 들고 나서는 기쁨이 있는 거다. 이건 미리 구매를 결심한 책이니 상관없다는 건 안다. 그래도, 그래도 동네서점 에디션이라지 않는가. 왠지 동네에 있는 서점에 가서 집어 들어야겠다는 별 의미 없는 결심이 섰다.
생각해 보니 우리 동네는 요즘 부산의 젊은이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분명 전포동 분위기의 작은 서점이 있을 것이다. 그렇게 시작했다. 우리 동네 서점 탐방을! 결심을 하자 이번에도 마치 운명처럼 인스타에서 부산의 동네서점 추천 글을 보았다. (운명이라기보다는 내가 서점 검색을 해서 추천되었겠지만) 그중에서 우리 동네에 있는 서점 몇 군데를 골라 둘러보기로 했다.
우연한 서점과 주책공사는 민락동 카페거리에서 아주 가까운 거리에 위치했다. 난 먼저 우연한 서점으로 향했다. 서점은 외벽이 노르스름한 타일로 장식된 건물 1층에 있었다. 커다란 창으로 책보다는 테이블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서점보다는 북카페에 가까운 것 같았다. 음료만 마셔도 되고, 따로 가져온 책을 읽어도 된다고 했다. 서점 내에는 노트북으로 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도 보였다. 서점의 책은 판매용과 대여용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음료 외에 추가로 천 원만 내면 대여용 책을 읽을 수 있다고 했다. 나는 아메리카노 한잔을 주문하며 천 원을 추가로 결제했다. 책장에서 욘 포세의 아침 그리고 저녁을 골랐다. 서점 중앙에 놓인 6인용 테이블에 홀로 앉아 책을 펼쳤다. 마침표 없이 쉼표로 이어지는 낯선 문장이 설어서 처음 몇 장을 넘기기 전까지는 집중을 하지 못했다. 그러다 리듬처럼 이어지는 문장을 타고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두 시간이 훌쩍 흘렀다. 그 두 시간 동안 나는 한 인간의 탄생과 끝을 마주했다. 덮고 나서 여운이 남는 책을 좋아하는데. 이 책이 그랬다.
우연한 서점에서 직접 로스팅한다는 커피는 향긋했고. 공간은 조용하고 아늑했다. 시끌벅적한 카페대신 종종 이곳에 와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판매하는 책 중에 2024 젊은 작가상 수상집은 없었다. 대신 나이 책이라는 것이 눈에 띄었다. 누런 크라프트지로 포장된 책등에 나이만 쓰여있는 블라인드 책이었다. 그 안에 어떤 책이 들어있는지는 알 수 없다. 포장지를 뜯을 때 괜히 두근거릴 것 같았다. 그와 나의 나이 책을 살까 잠시 고민하다 다음에 또 오기로 하고 서점을 나섰다.
주책공사는 오래된 주택을 서점으로 리모델링한 공간이었다. 담벼락에는 커다랗게 책, 서점입니다,라고 붙어 있었다. 이곳은 우연한 서점 보다 책이 정말 많았다. 어린이용 책을 판매하는 공간도 따로 있었는데, 책으로 만든 트리가 놓여 있어 인상적이었다. 주책공사에는 독립 서적들이 많았다. 책에는 저자가 책에 대해 메모한 내용이 하나하나 붙어 있어 정성스러워 보였다. 쓰인 메모를 읽으며 평대에 놓인 독립 서적을 구경하는데 한참을 보냈다. 평대에는 주로 독립서적 에세이들이 놓여 있었고, 책장에는 각종 출판 서적들이 꽂혀 있었다. 이곳에도 2024 젊은 작가상 수상집은 없었다. 그래도 마음에 드는 책 한 권을 사기로 했다. 서점 한편에 놓인 커다란 테이블에 앉아 책을 읽으면 딱 좋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난 결국 책을 사지 못하고 서점을 나왔다. 대학도 문헌정보학과를 나왔고, 무언가를 정리하고 분류하는 게 중요한 데이터를 다루는 일을 오랫동안 해왔다. 그래서 카테고라이징이 되지 않은 수많은 목록을 보면 정리욕구가 샘솟는다. 아니 에르노 책이 여기에 있었는데, 저기에도 꽂혀 있다. 분류되지 않은 수많은 책을 보다 보니 책을 빼서 옮겨놓고 싶어졌다. 하지만 남의 영업점에서 그럴 수는 없지 않은가. 그래서 머리가 고장 나버린 것처럼 멍해졌다. 다음에 마음을 다잡고 이곳에 와서 찬찬히 둘러본 후 마음에 드는 에세이 한 권을 사자 다짐하며 서점을 나섰다.
결국 2024 젊은 작가상 수상집 동네서점 에디션을 사지 못했다. 책을 사는 건 포기하고 민락동 카페거리를 어슬렁 거리며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때 건너편에 ‘책방오월’이라는 간판이 보였다. 서점이 또 있었네 하며 그곳으로 들어섰다. 책방 오월 역시 우연한 서점처럼 테이블이 있고 음료를 팔았다. 벽에는 잘 분류된 책들이 꽂혀있었다. 마음이 편해진 나는 책장의 책들을 들여다보았다. 2023년 젊은 작가상 수상집이 잔뜩 꽂혀 있었다. 그건 2024년도 어딘가 있을 거라는 기대를 품게 했다. 그러다 평대에 놓인 얇은 소설책이 눈에 띄었다. 창비에서 나온 시티픽션이었다. 각 도시를 배경으로 쓴 고전 명작 단편집. 책 두께가 얇아서 가지고 다니며 읽기 좋을 것 같았다. 곧 우리 집으로 여행 올 손님 둘이 떠올랐다. 그래 이건 웰컴북이다. 나는 책 두 권을 집어 들고 카운터로 갔다. 계산을 하면서 직원에게 2024년 젊은 작가상 수상집은 어디에 있는지를 물었다. 그녀는 잘 모르겠다고 답했다.
설마 아직 출간되지 않은 건가. 집으로 돌아와 검색해 보니. 현재 예약 판매 중으로 4월 3일부터 배송이 시작된다고 했다. (글을 쓴 시점은 4월 1일입니다. 이제 살 수 있겠네요!) 이런, 어쩐지. 나는 아직 팔지도 않는 책을 사겠다며 온 동네를 돌아다닌 것이다. 그래도 이 주책맞은 우연한 산책이 마음에 들었다. 그냥 온라인으로 사버릴까 하는 충동을 느끼긴 했으나, 책이 나올 시점에 다시 동네서점 나들이를 하기로 마음을 먹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