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에서 따뜻한 겨울을 보냈던 나는 이른 봄을 맞이할 거라 기대했다. 2월 초부터 햇살이 따스해서 낮에는 외투를 입지 않아도 될 만큼 포근했으니까. 통도사의 매화도 이른 개화 소식을 전해왔다. 몇 해 전 통도사에서 붉게 맺힌 자장매의 봉오리만 보고 돌아온 엄마는 언젠가는 꼭 만개한 매화를 보고 싶다고 말했었다. 그때가 2월 중순이었으니, 3월 초면 되겠다며 부산 방문 일정도 그때로 잡았다. 그런데 올해는 2월 말이면 활짝 핀 매화를 볼 수 있다는 게 아닌가. 난 때 이른 부산의 봄을 맞이할 생각에 설레기 시작했다.
2월 중순쯤 되자 하늘은 흐리고, 거센 바람이 불어왔다. 나는 이 비만 그치면 봄이 오겠지. 지금의 추위는 하늘이 부리는 잠깐의 투정 같은 걸 거야, 하고 생각했었다. 2월의 추위가 이리 오래갈 줄은 몰랐다. 두꺼운 패딩 같은 건 진작에 집어넣을 줄 알았는데 말이다. 겨울은 내내 맑은 날이 계속되더니만. 어찌 된 일인지 요즘은 맑은 날을 찾아보기가 힘들다.
3월이 되면 짠 하고 맑은 날이 계속되기를 빌었다. 엄마가 따스한 부산의 봄을 느끼고 가실 수 있기를... 그러나 기대처럼 되지는 않았다. 전화로 패딩을 챙겨야 하냐고 묻는 엄마에게 나는 따뜻한 겨울 옷을 입고 내려오라고 말했다.
엄마와의 첫 번째 일정은 당연히 통도사부터였다. 차로 가면 1시간도 걸리지 않는 거리지만, 나는 운전할 자신이 없었다. 지하철 2호선 양산역이 있어 거기까지만 가면 될 줄 알았는데, 버스를 여러 번 갈아타고 2시간 반 정도 가야 했다. 알고 보니 양산 통도사는 양산보다는 울산에 더 가까웠다. 나는 울산역까지 가는 KTX 티켓 두장을 예매했다.
통도사에 가는 날, 하늘은 맑았으나 기온은 평소보다도 낮았다. 봄맞이 꽃을 보러 가는 길, 우리는 두꺼운 겨울 옷으로 무장했다. 울산역에서 내려 13번 버스를 타고 종점까지 갔다. 꽤 긴 여정이었으나 차가 막히지 않아서 생각보다 빨리 목적지에 당도했다. 종점인 신평 터미널에서 내려 조금 걸으니 영축산문이 보였다. 이곳에서 통도사 까지는 무풍한송로라는 소나무 숲길이 이어져 있었다. 그 길이 좋아서 굳이 통도사 안쪽까지 버스를 타고 갈 필요는 없어 보였다. 구불구불 높이 자란 소나무가 적당한 빛은 들여오고, 차가운 바람은 막아주어 아늑했다. 가만히 귀를 기울이면 숲길을 따라 흐르는 계곡물소리도 들렸다. 무풍한송로는 걸어서 20분 정도의 길이었는데, 목적지인 통도사에 닿아 길이 끝나는 것이 아쉽게 느껴질 만큼 마음에 드는 길이었다.
통도사에는 아직 피지 않은, 이제 막 봉오리가 맺힌 그리고 지기 시작한 매화나무들이 보였다. 아무리 봐도 절정은 지난 듯싶었다. 나는 엄마가 아쉬워할 줄 알았다. 그러나 사소한 것에도 깊이 감동할 줄 아는 엄마는 그러지 않았다. 우리가 걸어온 소나무 길이 만족스러워 좋고. 가까이서 보면 시들하지만 멀리서 바라보면 여전히 분홍빛 아름다운 매화를 볼 수 있어 좋고. 딸과 함께 우리나라 3대 사찰이라는 통도사를 찬찬히 살피며 걷는 것 또한 좋아했다. 꽤 쌀쌀한 날씨였으나 하늘이 푸르른 것도 거기에 보태어졌다. 우리는 통도사에서 가까운 책방에 들려 책도 사고 동네 산책도 하며 하루를 보냈다.
집에 돌아와서는 둘 다 금세 뻗어 버렸다. 왕복 4시간 정도 걸리는 데다, 계속 걷는 일정이었으니 지칠만했다. 내가 운전을 했다면 조금이라도 편히 다녀왔을 텐데, 엄마에게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엄마가 부산의 봄을 조금 더 느꼈으면 했다. 마침 오륙도 해맞이공원에 수선화가 만개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곳은 집에서 꽤 가까웠으나 한 번에 가는 버스는 없었다. 운전을 해볼까. 공원 앞에 주차장도 있던데. 나는 지도앱에서 로드뷰를 살피며 눈으로 길을 익혔다. 이 정도면 해볼 만하지 않을까. 운전을 안 한 지가 한참인데. 혼자도 아니고 엄마를 옆에 태우고 가는 건 긴장되는데.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차로 가는 것이 더 효율적인 길이었다.
지도로 여러 번 길을 익힌 후 굳은 결심을 하고 엄마를 차에 태웠다. 오랜만에 하는 운전이라 무언가 덜컹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이놈의 차는 내가 발로 누르는 힘만큼 나아가지를 않는다. 생각보다 조금 나가거나, 갑자기 튀어나가 버린다. 사고로 폐차한 이전 차가 그리워지는 순간이었다. 묵직하게 내가 원하는 만큼 잘 나가는 차였는데. 제대로 된 이별도 하지 못하고 보내버렸다. 그 사고 이후 시간이 꽤 흐르긴 해서 옆차선의 차가 이전만큼 무섭지는 않았다. 목적지 부근에서 길을 잘못 들기는 했지만, 그래도 무사히 주차까지 성공했다.
오륙도의 수선화는 지금이 한창이었다. 그만큼 사람들도 많았다. 우리는 주변의 사람들을 요리조리 피해 가며 사진을 찍었다. 그런데 이렇게 활짝 핀 꽃을 보고도 엄마의 표정이 밝지 않았다. 그건 바람 때문이었다. 강하게 불어오는 바람 때문에 춥기도 하고, 먼지가 눈에 들어와 오래 있기가 힘들어 보였다. 나는 우리에게 날씨 운이 따르지 않는 것아 속이 상했다.
온 김에 부산에 살고 있는 친구를 만나고 돌아온 엄마가 말하기를, 부산이 원래 2, 3월이 더 춥단다. 이 추위는 한 번의 일탈이 아니었던 거다. 날씨 운이 따르지 않은 게 아니라, 원래 부산은 그런 거였다. 새삼 영어 공부를 위해 2월부터 세부에 체류하고 있는 그의 선견지명이 놀라웠다. 부산에 사는 동안 긴 여행을 떠나고 싶다면 2,3월로 정해야겠다.
동네를 산책하다 보면 온통 벚나무가 보인다. 벚꽃이 피면 온 동네에 봄눈이 하얗게 내릴 것만 같다. 엄마를 오래된 벚나무가 있는 곳으로 데려갔다. 앙상한 가지에 통통하게 무언가 품고 있는 듯한 녹색 봉우리가 달려있었다. 금방이라도 피어날 것만 같다. 엄마는 오래된 나무는 우듬지를 보는 것만으로도 멋지다고 했다. 그냥 3월 말까지 있다 벚꽃이 피면 올라가라고 했더니 바빠서 안된단다. 엄마는 결국 봄이 오면 좋겠네 하는 것들만 보고 떠났다.
오늘도 산책을 했다. 쌀쌀한 날씨에도 벚꽃이 제법 피어 있었다. 이번 주말부터는 해도 들거라 하니 활짝 핀 벚꽃을 맞이할 수 있지 않을까. 동네를 벗어나 차를 타고 조금 멀리 나가봐도 좋을 것 같다. 나는 운전하는 사람이니까! 3월이 끝나간다. 이제 해사한 부산의 봄을 맞이할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