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idle Apr 25. 2024

아주 신중한 쇼핑

 우리는 아주 신중한 쇼핑을 한다. 꼭 필요한 것만 구매하고, 마트에서 장을 볼 때에도 단가를 하나하나 따져가며 물건을 고른다. 싸고 좋은 건 없다는 구호 아래 이왕이면 고가의 물건을 고르던 은퇴 전과는 완전히 달라졌다. 그런 우리가 부산에 와서야 뒤늦게 빠져든 장소가 있었으니, 바로 창고형 마트 트레이더스다. 전에는 두 식구에게 필요한 물건을 사기 위해 창고형 마트에 갈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다. 거긴 양이 너무 많으니까.


 우리는 긴 여행 후 부산으로 내려왔기 때문에 장기간 보관이사가 불가피했다. 세제나 치약 같은 액체류는 보관이 안된다고 했기 때문에 우리는 이런 종류의 생필품들을 모조리 새로 사야 했다. 사야 할 것들이 많으니 이왕이면 조금이라도 싸게 사볼까 하고 트레이더스에 가보았다. 거대한 매장을 둘러보며 ‘단가’를 따져보니 일반 마트보다 너무 저렴한 것이 아닌가. 우리는 휴지, 세제, 치약, 비누 같은 생활용품. 쟁여 놓아도 괜찮은 인스턴트식품 같은 걸 잔뜩 사서 돌아왔다. 그렇게 첫 경험을 한 우리는 ‘종종’ 트레이더스를 찾기 시작했다.


 그는 딱히 물욕이 없는 편이긴 하나, 쇼핑은 좋아한다. 뭔가 앞뒤가 안 맞는 말 같지만 정말 그렇다. 갖고 싶은 건 없다는데, 필요한 물건을 사는 일에는 흥미를 느끼는 것 같았다. 그는 트레이더스에 큰 감명을 받았다. 양배추나 토마토처럼 신선야채를 사야 할 때도 트레이더스에 가고 싶어 했고, 당장 필요 없어도 세일을 하면 반드시 집어 들었다. 그는 ‘언젠가’는 쓸 물건들로 집안을 가득 채울 기세였다.


 한 달 생활비 지출이 자꾸만 늘어났다. 장바구니 물가가 워낙 올랐으니 당연한 것 같기도 한데. 물가의 오름새 보다 생활비 증가 속도가 더 빠른 것 같았다. 가계부를 들여다보며 하나하나 따져보니 딱히 불필요한 쇼핑은 없었다. 그럼 범인은 바로 ‘트레이더스’다. 그래 ‘언젠가’ 쓸 거니까. 이 생각이 얼마나 위험한 줄 몰랐다. 돈을 ‘절약’하는 일이라 생각했는데, 오히려 돈을 낭비하고 있었다.


 그에게 트레이더스 금지령을 내렸다. 세상 잃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어쩔 수 없다. 저 눈빛에 넘어가서는 안된다. 트레이더스는 한 달에 딱 한 번만 가기로 그와 합의를 보았다.  




 부산에서 수영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13년 전쯤 사두었던 수영복과 수경, 수영모를 꺼냈다. 오래돼서 쓸 수 있을까 싶었는데, 겉보기에는 멀쩡해 보였다. 하나 보관을 잘못했는지 수경은 잔 흠집이 나서 앞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였고, 수영복에서는 반짝이가 떨어져 나왔다. 어쩔 수 없이 새 수영복과 수경을 장만해야 했다. 나는 쇼핑 검색 후 ‘낮은 가격순’ 정렬을 했다. 수경이 다 거기서 거기겠지 하면서 가장 싼 걸로 골라 장바구니에 담았고, 수영복은 몸을 쪼이는 느낌이 싫어서 한 사이즈 큰 것을 골랐다.


 새 장비를 착용하고 수영을 했다. 새 수경을 착용했는데도 물이 들어오는 것 같았다. 줄이 헐렁해서 그런가 싶어서 강하게 쪼였다. 수영을 끝내고 거울을 보니 판다가 따로 없었다. 그래도 물건에 하자가 있는 건 아니니 그냥 쓰기로 했다. 더 큰 문제는 수영복이었다. 새 수영복은 잘 늘어나는 재질이 아니었다. 수영복이니까 조금 커도 몸에 달라붙을 거라 생각했는데 이건 그렇지 않았다. 중요 부위가 노출될 정도는 아니어서 그냥 입었더니. 수업 내내 온몸으로 물이 들고나는 걸 느끼며, 젖은 수영복을 끌어올려야만 했다.


 이미 입수를 했으니 교환을 할 수도 없고, 중고로 팔릴만한 수영복도 아니었다. 이대로 버리기는 아까웠다. 찾아보니 수영복은 생각보다 쉽게 줄일 수 있다고 했다. 어깨끈을 줄이고 비키니 라인을 접어서 꼼꼼히 박음질을 했다. 입어보니 전처럼 물이 훌렁훌렁 들어오지는 않았다. 성공적이었다. 물론 반짝이가 떨어지는 옛 수영복 보다도 편하지는 않았지만.


 수영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면 그를 붙잡고 이게 얼마나 불편한지를 하소연했다. 그는 그러게 살 거면 제대로 된 걸 사야지, 하면서 그냥 새로 사라고 말했다. 난 괜한 오기를 부리며 한 달을 더 버텼다. 그러면서도 수영 카페를 들락거리며 평이 좋은 수영복과 수경 정보를 모았다. 이쁜 수영복은 많지만 그래도 편한 건 역시 나이키 스윔이라고 했다. 사실 같은 초급반에 나이키 스윔을 입는 사람이 이미 4명이나 된다. 노패킹 수경을 쓰면 자국이 남지 않는다고 했다. 얼굴형에 맞는 수경만 찾으면 완전 신세계란다.


 나는 결국 새 걸 사기로 했다. 초급반에서 아무도 입지 않은 신상 나이키 수영복을 골랐다. 가격은 더 비쌌지만. 이왕 사는 거 마음에 드는 걸 사기로 결심했다. 다들 인생 수경이라고 말하는 노패킹 수경도 샀다. 싸지는 않지만 고가의 물건도 아니다. 새 걸 착용하고 수영을 해보니 너무나 만족스럽다. 진작 좋은 걸로 살걸. 싸다고 해서 큰 차이가 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괜히 돈낭비만 했다.

 

우리집 모카포트와 커피 그라인더


 살까 말까 망설이며 오랫동안 고민한 물건이 있었다. 그건 바로 커피 그라인더. 우리는 둘 다 커피를 사랑한다. 사랑하는 정도가 아니라 없으면 하루를 살아갈 수가 없다. 회사에 다닐 때는 귀찮으니까 간편한 캡슐커피 머신을 썼다. 회사를 그만두고 나서는 캡슐 커피를 구매하는 비용이 부담스럽기 시작했다. 그러다 모카포트를 알게 되었다. 캡슐커피 보다 맛과 향이 훨씬 더 좋았다. 캡슐을 사는 비용보다 분쇄 원두를 사는 비용이 훨씬 더 저렴하기도 했다.


 커피의 맛을 가장 크게 좌우하는 것은 원두, 그다음이 그라인더라고 한다. 이제 막 주문한 분쇄 원두로 커피를 마시면 기분 좋은 커피 향이 난다. 그렇게 만족스러운 커피 맛은 딱 일주일쯤 갔다. 시간이 지날수록 맛은 빠르게 변해갔다. 홀빈을 사서 갈아 마시면 그 맛의 변화가 좀 덜하다는데. 수동 그라인더는 갈다 보면 팔이 아파서 안쓸 것 같고, 전동 그라인더는 관리가 귀찮을 것 같았다. 사놓고 안 쓰게 될 것 같아 당근에 추천받은 커피 그라인더 키워드를 등록해 놓고 들여다보기만 했다. 그렇게 어느덧 3년의 시간이 흘렀다.


 수영복 때문에 깨달은 바가 있었다. 나에게 꼭 필요한 물건이라면 제대로 된 걸 사는 게 낫다는 걸. 남아도는 게 시간인데 조금 귀찮으면 어떠랴. 나는 좋아하는 일을 잘하지는 못해도, 꾸준히 하는 것만큼은 자신이 있었다. 전동 그라인더는 좁은 집에서 자리를 차지하는 게 싫어서, 수동 그라인더를 사기로 했다. 이왕 살 거 무조건 코만단테라는데. 무려 40만 원 가까이하는 그라인더를 사기는 부담스러웠다. 그러다 코만단테랑 아주 비슷하다는 그라인더를 알게 되었다. 품질과 감성이 그만큼은 아닐지라로 충분히 만족스럽다는 평이 많았다. 가격은 10만 원대!


 커피 그라인더를 새로 사면 길을 들여야 한다고 해서 200g에 1,500원 밖에 하지 않는 원두를 미리 사두었다. 원두 50g 정도는 갈아서 버리고, 남은 원두를 갈아서 커피를 마셔 보았다. 아! 250g에 15,000원 하는 분쇄 커피 보다 몇 배는 더 좋았다. 그동안 모카포트에서 느낄 수 없었던 신맛도 느껴진다. 진작에 살걸 그랬다.


 이제는 쇼핑을 죄악시하지 않는다. 무조건 싼 걸 사야 한다는 생각도 버렸다. 내 마음을 설레게 하는 것. 꾸준히 쓰게 될 물건이라면 가격을 고려하지 않고 좋은걸 살 것이다. 다음 주에는 부산에서 ‘월드 오브 커피’ 박람회가 열린다고 한다. 나는 부산시민 할인 티켓을 미리 구매했다. 그곳에서 혹시 내 맘을 설레게 할 무언가를 만날지도 모르겠다.


이전 16화 수영을 배우는 일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